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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민심 기반으로 권력에 맞섰던 정토진종 본산

 

▲ 정토진종 최대 사찰인 니시혼간지는 ‘현세 이익’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에 따라 부적이나 기왓장 등 물건을 파는 곳이 없다. 정면에 보이는 어영당은 신란 스님의 목상을 안치한 곳으로 36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법회를 볼 수 있다.

 

엊저녁엔 고다이지(高台寺)에 들렸다. 임제종 사찰로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오래된 전각, 연못, 잘 가꾸어진 나무, 그윽한 조명…. 자연과 빛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절경 앞에 숨조차 내쉬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도 끝내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던 건 단 하나의 조각상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100만 가까운 조선인의 생명을 앗아간 장본인.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모습을 조각해 절 안에 안치한 것이다. 히데요시의 아내가 죽은 남편을 위해 지었다지만 멋들어진 전각 안에 당당하게 앉아있는 침략자. 한국인으로서 그를 지켜보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밤사이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오늘은 종일 비가 왔다. 우리는 빗속에서 니조조(二城)와 여러 선종사찰을 답사했다. 마지막으로 혼간지(本願寺)를 들렀을 때는 해저물녘이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길 건너 서있는 혼간지를 대하는 순간 감정은 어제 고다이지 때와 비슷해졌다. 임진왜란에서부터 구한말, 일제강점기까지 혼간지는 한국과 질긴 인연을 계속해 왔다. 거기에는 국경을 뛰어넘어 불교로 맺어진 도반애도 있었겠지만 역사의 그물에 걸려 기록된 자료들은 혼간지가 조선침략에 깊이 개입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제국주의 첨병 노릇을 자처했던 것도 이곳 스님들이었으며, 일제강점기 한국불교가 왜색불교에 물들었던 것도 혼간지 스님들의 영향이 자못 컸다. 

 

신도 1200만…말사 1만500개 

 

▲ 일본 국보인 니시혼간지 당문(唐門). 조각과 색채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하루 종일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에는 수많은 사찰이 남아있고, 그보다 많은 사찰들이 들풀처럼 명멸해갔다. 그렇게 많은 절들 중 정토진종 혼간지 만큼 민초들의 마음을 뒤흔든 종파도 사찰도 없다. 불교라는 이름으로 권력에 맞서 가장 극렬하게 저항했던 곳도 혼간지다.

이 중 니시혼간지는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 1만500여개의 절과 1200만의 문도와 신도가 소속돼 있는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본산이다. 물론 바로 옆에 인접해 있는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와 일본 최대 신도수를 겨루는 라이벌 사찰이기도 하다.

신란(親鸞, 1173~1262) 스님은 니시혼간지와 히가시혼간지를 아우르는 정토진종의 개산조다. 스님은 자신을 가장 낮췄던 수행자였으며, 동시에 아미타불에 모든 것을 내맡긴 순수 신앙인이었다. 신란 스님이 일본불교에 던진 신앙의 빛이 강렬했던 만큼 스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승려의 결혼과 계율 외면이라는 어두운 측면을 드리운 것도 사실이다.

1173년 후지와라 가문에서 태어난 스님은 9살 때 출가해 천태종 본산인 히에이잔(比叡山)에서 수행하며 학문을 닦았다. 그러나 20년 간의 구도생활에서 스님이 발견한 것은 당시 사회적·정치적 권력자에 아부하고 속된 신앙에 영합하고 있는 승려 사회의 실상이었다. 

1262년 신란 스님 사당 기원

스님은 히에이잔을 떠나 교토의 호넨 스님에게로 향했다. 그는 오로지 염불수행에만 전념할 것을 강조하는 호넨 스님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스님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지성으로 염불했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는 이들 염불수행자에게 고난이었다. 1207년 염불이 칙명에 의해 금지된 것이다. 끝내 염불승의 길을 꺾지 않은 스님은 1211년까지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절은 스님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유배를 계기로 스님은 출가자라는 기본적인 상과 틀조차 철저히 버렸다.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 그럼에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스님의 지극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던 것 같다.

스님은 스스로 미천한 범부라고 자처하면서 악인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을 폈다. 신심은 아미타명호의 힘에 의해 모든 사람이 미혹의 세계에서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명호야말로 모든 중생들에게 삶의 지표가 된다고 역설했다. 특히 악한 사람들이야말로 아미타부처님이 먼저 구제한다는 ‘악인정기(惡人正機)’를 주장하기도 했다. 자비로운 아미타부처님은 선한 사람보다 지옥행이 예정된 중생들을 더 가엾게 여기고 구제의 손길을 편다는 것이다. 귀족불교에 대한 완벽한 반전이다. 

 

▲ 니시혼간지 종무소. 이곳에서 사찰 관련된 주요 업무가 이뤄진다.

 

실제 스님은 ‘탄이초(歎異抄)’에서 “내게는 한 사람의 제자도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중생은 아미타부처님에 의해 구제되는데 누가 감히 스승이 될 수 있느냐는 게 신란 스님의 신념이었다. 정토진종에서는 도반을 일러 ‘동행(同行)’ 혹은 ‘동붕(同朋)’이라 부르는 것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스님은 유배가 끝난 뒤 칸토오(關東) 지방에 머물다 1262년 90살에 세연을 마쳤다. 혼간지 안내문에는 이때 스님의 딸 카쿠신니(覺信尼)가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 오오타니(大谷)에 스님의 사당을 지었으며, 이것이 훗날 혼간지 건립의 기반이 됐다고 말한다. 또 오랜 탄압과 전란을 겪으며 각지를 전전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현재의 땅을 기증함으로써 1591년 혼간지가 이곳에 안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혼간지에는 신란 스님에 버금가는 두 사람의 법주가 존재했었다. 렌뇨(蓮如, 1415∼1499) 스님과 겐뇨(顯如, 1543~1592) 스님이 바로 그들이다. 제8대 법주 렌뇨 스님은 신란 스님 이후 시들해가던 정토진종의 교세를 크게 확산시킨 인물이다. 당시 불교계를 장악했던 히에이잔의 권승들을 피해 방방곡곡을 누비며 “나무아미타불” 여섯 글자면 누구라도 구제받을 수 있음을 설파해 교단의 위상을 크게 높였던 것이다. 이같은 렌뇨 스님의 노력에 의해 혼간지는 전국시대에 이르러 다이묘와 맞먹는 봉건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제11대 법주 겐쇼 스님은 급성장한 교단을 토대로 당시 권력의 정점이었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와 전쟁을 벌였던 인물이다. 노부나가의 잇따른 억지 요구에 맞서 겐쇼 스님은 ‘불교의 적’ 노부나가를 토벌하자는 격문을 발송하면서 10여 년에 걸친 항쟁이 시작됐다. 한때 노부나가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지만 결국 겐쇼 스님은 정토진종 신도 10만여 명이 학살되는 대참화를 겪으며 무릎 꿇고 말았다. 이 사건은 훗날 막부가 불교계를 견제하기 위해 각종 법령을 제정하는 계기가 됐다. 또 겐쇼 스님의 아들 대에 이르러 종권을 둘러싼 내부 다툼이 벌어지면서 혼간지는 동과 서로 갈리게 된다. 형제들의 권력욕과 불교계를 분열시켜 정치적 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리면서 이뤄진 조치였다.

 

노부나가 신도 10만명 학살
 

 

▲ 절 입구의 신란 스님 얼굴. 큐슈 지역 아이들이 1만5000개의 플라스틱 병뚜껑을 이용해 신란 스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종일 퍼붓던 비가 잠시 멈췄다. 우리는 우산 하나씩 손에 쥔 채 혼간지로 향했다. 절 입구에는 만화 캐릭터 같은 노스님의 웃는 얼굴이 커다란 판넬에 걸려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병뚜껑을 이용해 만든 모자이크다. 신란 스님 입적 750주기를 앞두고 큐슈지역 아이들이 1만5000개의 플라스틱 병뚜껑을 이용해 신란 스님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한다.

경내에 들어서니 정토종 본산 지온인(知恩院)을 능가하는 법당들이 여럿 눈에 띄었다. 하지만 1994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서 국보를 비롯한 중요문화재가 즐비하다는 사실이 그리 와 닿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 부을 것 같은 컴컴한 먹구름 탓도 있겠지만 경내 곳곳에서 한창 진행 중인 공사 때문인 것 같았다. 다만 거대한 본당 앞에 신장처럼 300년째 이곳을 지켜오고 있다는 은행나무가 퍽 인상적이다.

우리는 참배객을 따라 본당에 들어갔다. 3000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는 큰 법당이다. 곳곳에서 경건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중년의 보살님들 몇 분만 기도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보였다. 한국 스님 같았다. 본당 뒤에 있다는 모모야마 시대의 국보 서원과 노 무대는 그 중요성으로 인해 늘 비공개라고 했다. 그렇지만 간혹 공개한다는 빼어난 비대칭 건물 비운각조차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적지 않다.

 

▲ 저녁 예불을 기다리는 젊은 스님.

 

우리는 법당 마루를 따라 신란 스님의 목상을 안치했다는 어영당 쪽으로 향했다. 전각 밑에는 저녁예불을 기다리는 듯한 젊은 스님이 목어 앞에서 시계를 들여다보고 서있다. 저 스님은 어떤 인연으로 출가해 지금 저기에 서 있는 걸까. 어영당에 들어서자 수많은 의자가 반듯이 놓여있었다. 신란 스님 관련 행사 참석자들을 위해 준비한 3620여개의 의자라고 했다. 어영당을 빠져나오니 경내에 어둠이 잔뜩 내려앉았다. 그 때 목어 두드리는 소리가 혼간지 너른 경내를 부드럽게 감싼다.

순간 120여 년 전 현해탄을 건너 이곳에 왔던 동인 스님(1849~1881)과 무불(1850?~1884) 스님이 떠올랐다. 조국을 위해 몸소 횃불을 짊어지고 스스로 불덩이가 되고자 했던 조선의 젊은 개화승들. 이역만리 낯선 땅 혼간지에서 그들은 조선의 개명을 거듭거듭 발원했으리라.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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