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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인도 석굴사원이란?

석굴, 철저한 고독 속에 진리 구하는 도량

거주굴은 한평 남짓
홀로 수행하는 공간


우리 절의 원조는 인도 석굴사원이다. 석가모니 제자 출가자, 즉 상가들이 함께 모여 수행하며 우기의 비를 피해 또 혹서기의 무더위를 피해 영구 시설인 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산치 같은 평지 사원은 스투파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 사방에 집단 거주처를 만들었지만, 바위 절벽에 죽 판 석굴은 일렬로 배열될 수밖에 없다. 중간쯤에 스투파 모신 예배굴, 즉 차이탸 굴을 하나 파고 좌우로 거주굴 즉, 비하라들을 여러 개 줄줄이 팠다.


이번에는 우선 거주굴부터 보자. 비하라 굴 하나는 여러 개의 독방들로 구성된다. 작은 굴은 5~6 방, 큰 굴은 30여 방들로 구성된다. 독방 하나 크기는 딱 한 평 남짓이다. 우리 정부에서 수년 전부터 공식적으로 건물 면적 단위에 평을 못 쓰게 하고 평방미터 표준단위만 쓰도록 강제하고 있는데, 지금도 일반인들은 아파트 시세가 전부 “3.3평방미터에 얼마”로 표시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른 한 사람이 큰 大자로 누우면 그게 딱 한 평이다.

 

 

▲그림 1. 독방 돌침대. 그림 2. 침대 아래 파낸 사물보관함. 두 침대 방그림

 


인간 세상 오래전부터 내려온 알기 쉬운 몸 단위를 못 쓰게 하는 것은 국민의 종복이어야 할 공무원들이 백성을 계몽 대상으로 아는 오만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한 평의 독방 석굴 내부는 사방 아무것도 없는 돌 벽일 뿐이고 입식 생활에 필요한 침대가 전부다. 가구를 별도로 들여놓은 것이 아니라 석굴을 파다가 덜 파낸 곳이 바로 돌침대가 된다(그림1). 명실상부하게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간혹 벽 위에 작은 구멍을 파거나 침대 아래를 더 파내어 사물 보관함을 만들기도 한다(그림2).

 

 

▲그림 3. 수평 시루떡 암반 지형의 산 중턱 일렬 배치 석굴. 준나르.

 


인도 돌이 우리 화강암처럼 단단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말이 쉽지 두부도 진흙도 아닌 단단한 돌을 파내어 방을, 나아가 번듯한 집을 만든다는 것이 상식을 초월한다. 인도 석굴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래도 지형 지질상의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석굴이 집중 분포한 곳은 중부 데칸 고원 일대다. 화산 용암이 식으면서 수평으로 굳어져 현무암이 된 지형이다. 시루떡처럼 층층 켜켜 띠로 굳어졌기 때문에(그림3) 반듯이 일렬로 팔 수 있고, 또 기둥 없이 꽤 넓은 공간을 파내어도 무너지지 않는다(그림 4). 같은 현무암이라도 공기 구멍이 숭숭 있는 제주도 암석보다는 훨씬 단단하다.

 

 

▲그림 4. 기둥 없이 넓게 파도 무너지지 않는 독방군 거주굴 비하라. 나식 3굴.

 


어두컴컴한 좁은 독방 돌침대에 앉아 있어 보면 고요함 속에 금욕하며 근엄하게 면벽 수행했던 초기 석가모니 제자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영국의 박해를 피해 미국 북동부 해안으로 상륙했던 미국 초기 개척자 청교도 마을의 소박한 널빤지 집들이 생각났다. 종교의 다름을 떠나 금욕 검약 생활은 서로 통하는 바가 있다. 근래 물질적으로 잘살게 된 탓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규모로 화려하게 불사를 일으키고 보는 우리네 절들은 인도 초기 수행자들의 소박한 석굴을 한번 돌아보고 모든 부귀영화를 버린 석가모니의 근본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림 5. 전형적인 비하라 평면. 가운데 안마당 주위 3면에 배열된 독방군. 독방 내 실선은 침대를 나타냄. 입구 전실 베란다. 나식 3굴
우리 절은 목조 건축이라 융통성이 있어서 그런지 넓은 방에 수행자들이 공동 합숙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자동적으로 상좌 승을 위시하여 서열이 있는 집단 생활이 된다. 그러나 인도 석굴은 철저히 독방 위주다(그림5). 서열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딱 누우면 되는 한 평을 차지하게 된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일찍이 홀로 하는 고독한 작업이라 규정하고 옆 수행자로부터 방해받지 않도록 독립된 개인 공간이 철저히 잘 보장되어 있다. 물론 공동생활이 필요할 때는 안마당으로 나오면 된다.


잘 알려진 세계문화유산 아잔타와 엘로라는 중부 석굴 집중 지역 끝자락에 있다. 석굴은 지도를 보면 아라비아 해안에서 시작하여 내륙으로 분포해있다(그림6). 해안에서 내륙 데칸고원으로 올라가는 西가트 산맥의 가파른 지형은 마치 우리 동해안에서 태백산맥 대관령으로 가는 길처럼 굽이굽이다. 현대 인도의 최대도시 뭄바이는 인근에 옛 항구 소파라가 있던 곳으로 인근 페르시아, 아라비아와는 물론 로마와도 교역하던 곳이다. 석굴 분포는 정확히 내륙으로의 물자 수송로와 일치한다. 첫째, 항구를 기점으로 하여 뭄바이 인근 아라비아 해안가의 석굴들과 둘째, 고개 넘어 옛 도시 나식, 준나르를 거쳐 수도 프라티쉬타나를 거쳐 아잔타, 엘로라, 산치로 이어지는 가장 석굴이 많은 주 통로와 셋째, 대도시 뿌네를 거쳐 지금은 사라진 옛 도시 테르로 향해가는 카를리, 바자, 베드사 석굴군 등 몇 갈래의 노선으로 퍼져나간다.

 

 

▲ 그림 6. 필자가 답사한 석굴 분포 지도.(■는 평지사원. ○는 대도시)

 


중부 석굴지역은 불교 석굴시대 B.C.2세기부터 A.D.3세기까지 사타바하나 왕조가 지배했던 지역이다. 돌 벽에 새겨진 옛 글자를 해독하여 큰 석굴은 후원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카스트 제도상 크샤트리아 계급인 왕과 왕비와 공주도 있지만 바이샤 계급 상인 집단도 후원자였다. 인도 석굴은 마치 조선시대 역원제에서 오늘날 지명으로 남아있는 이태원, 장호원처럼 수송로 상에 교역 상인이 하룻밤 쉬어갈 숙소로서의 부차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지금도 우리 절에 가서 말만 잘하면 기꺼이 하룻밤 재워주기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석굴이 파진 위치는 교역로와 암벽 조건에 더하여 불교 이전 원래부터 성지로 숭배되던 곳이기도 하다. 즉 불교에 들어와 사나운 괴물 모습으로 바뀐, 야차(夜叉)로 번역되는 대지와 숲의 신 약샤(yaksha) 숭배와 결합되기도 한다. 유명한 엘로라 석굴에 가면 불교, 힌두교, 자인교 석굴들이 사이좋게 나란히 모여 있기도 하다. 또 카를리 불교 석굴 들어가는 바로 코앞에 가건물 형태의 힌두교 사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폐허가 되어버린 많은 불교 석굴에 힌두교 신상을 넣고 전환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모든 인도 종교에서는 인도 고유성이 워낙 강하다.

 

▲이희봉 교수
우리는 외래종교 불교가 무속신앙과 만나 습합되었으나 불교가 살아남은데 비해, 인도에서 천년을 번창하던 불교는 인도 고유의 신앙 힌두교에 흡수되어 대륙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앞으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다음에는 초기 불교 석굴, 그러나 작지 않은 규모의 바자 석굴을 보도록 하자.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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