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동물과의 소통
8. 동물과의 소통
  • 김상현 교수
  • 승인 2012.05.0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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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죽음 통해 생명에 대한 외경을 배우다

출가를 권유하는 지혜로운 까치·까마귀 등장
탑돌이 하다 호랑이 처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신중탱화 속 우두나찰.

 

 

‘삼국유사’에는 흥덕왕과 앵무새, 그리고 김현감호(金現感虎) 등의 항목이 있다. 이처럼 ‘삼국유사’에는 제목에까지 동물이 등장한다. 신라 42대 흥덕왕은 826년 10월에 왕위에 올랐다. 그 무렵 당나라에 갔던 사신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얼마 안 되어 암컷이 죽자 수컷이 슬프게 울었다. 왕은 앵무새 앞에 거울을 갖다 놓게 했다. 앵무새는 거울에 비친 그림자를 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다가 그림자임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 이에 왕은 노래를 지었지만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흥덕왕이 즉위한 그 해 12월에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었다. 왕이 왕비를 잊지 못해 슬퍼하자, 신하들이 다시 왕비를 맞아들일 것을 청했다. 왕이 말했다.


“외짝 새도 제짝을 잃은 슬픔을 가지거늘, 하물며 훌륭한 배필을 잃었는데, 어떻게 금방 장가든다 말인가?”
그리고는 끝내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짝을 잃은 외짝 새는 앵무새였을 것이고, 이 무렵에 왕은 왕비를 사별한 것 같다. 짝을 잃은 앵무새의 슬픔을 왕은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하면서 노래했을 지도 모른다.


동물의 죽음을 목격한 사람이 생명에 대한 외경을 갖게 되고, 이러한 경험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경우도 있다. 자장과 혜통과 진표의 출가 동기가 이런 경우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자장의 출가 동기는 일찍 양친을 여의고 세속의 시끄러움을 싫어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룡사구층탑의 찰주본기(刹柱本記)에는 다른 내용이 전한다. 즉 자장은 어릴 때 살생을 즐겨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 꿩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감동하여 이에 발심하고 출가를 청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자장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출가 동기는 자신에게 잡힌 꿩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감동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7세기 중반에 활동한 밀교의 고승 혜통(惠通)의 출가 동기도 매우 극적이다. 그는 어느 날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한 마리의 수달을 잡아 죽여 그 뼈를 동산에 버렸다. 이튿날 새벽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았더니, 뼈가 예전에 살던 구멍으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앉아 있었다. 혜통은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이나 놀랍고도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문득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죽여서 버린 수달의 뼈가 돌아가 새끼를 안고 있었다는 것은 설화적인 윤색이겠지만, 자기 새끼를 향한 어미의 절실한 마음을 보다 잘 표현해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 눈물 흘리는 꿩을 보고 출가를 결심한 자장율사의 진영.

 


8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고승 진표(眞表)는 12세에 출가했다. ‘송고승전’에는 그의 출가 동기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진표의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했다. 진표는 대단히 날쌔고 민첩하였는데, 활쏘기를 가장 잘 했다. 당나라 개원년간(開元年間, 713~742)에 있었던 일이다. 짐승을 좇다가 잠시 밭두렁에서 쉬었다. 그 때 그는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개구리를 꿰어 꿰미를 만들어 물속에 두었는데 반찬을 만들고자 해서다. 드디어 산으로 들어가 사냥을 했다. 사슴을 좇다가 산의 북쪽 길로 집으로 돌아가게 됨으로써, 꿰어둔 개구리를 가져가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이듬해 봄이 되어 사냥을 나갔다가 개구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물속을 보니 지난해에 꿰어둔 30여 마리의 개구리가 살아 있었다. 진표는 이 때 탄식하며 자책하기를, “괴롭구나. 어떻게 입과 배가 꿰인 저들이 해를 지나면서 고통을 받았는가?” 이에 버드나무 가지를 끊어서 가만가만 놓아주었다. 이로 인하여 뜻을 발하고 출가하였다. 생명에 대한 외경은 우리들 현실의 삶을 한번쯤 되돌아보게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금산사에서 나온 진표율사는 속리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다. 그 소들이 진표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울었다. 소달구지를 탔던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 소들이 스님을 보고 우는 것입니까? 또한 스님은 어디서 오십니까?”
“나는 금산사의 진표인데, 나는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과 진생(眞)을 받았기에 절을 지을만한 곳을 찾아서 오는 길입니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어리석지만 속은 현명하여 내가 계법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하게 여기므로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말했다.


“짐승도 오히려 이런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으로서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


그는 곧 낫으로 머리털을 잘라버렸다. 진표는 다시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계를 받지 못한 사람이 축생도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그 소는 일찍이 불경을 실어 나른 공덕으로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날 수 있었는데, 곧 욱면(郁面)이었다고 한다.


젊은 김대성은 사냥을 즐겼고, 어느 날 그는 토함산에서 곰 한 마리를 잡았다. 그날 밤 꿈에 그 곰이 나타나 덤벼들었다.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 또한 너를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대성은 곰에게 용서를 빌었다. 곰이 요구했다. 나를 위하여 절 하나 지어 줄 수 있느냐고. 대성은 약속하고 꿈을 깼다. 땀이 온 몸을 적시고 있었다. 이렇게 ‘삼국유사’에는 짐승의 당당한 주장도 보인다. 김대성은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세워 곰의 명복을 빌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비원(悲願)은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그의 불심은 더욱 두터워 져 훗날 그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하기까지 했다. 죽은 곰이 대성의 불심을 일깨웠던 것이다.


지통(智通)은 출가하여 낭지의 제자가 되는데, 이는 까마귀의 권유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량공(伊亮公) 댁의 종 지통에게 까마귀가 울면서 와서 말했다.


“영취산에 가서 낭지(朗智)의 제자가 되어라.”


이에 지통은 영취산의 낭지 스님을 찾아갔다. 까마귀는 또 낭지에게 알렸다. 거룩한 아이가 스님에게로 오고 있으니 나가서 영접하라고. 까마귀의 통보를 받은 낭지는 지통을 마중하면서 말했다.


“신령스러운 까마귀가 너를 깨우쳐 나에게 오게 하고, 또 내게 알려서 너를 맞이하게 했다. 이것은 무슨 상서(祥瑞)일까? 아마 신령이 몰래 도우신 듯하다.”


▲태양에 산다는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
‘삼국사기’에도 까마귀가 등장한다. 궁예(?~918)가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는 법명으로 수행하고 있을 때다. 하루는 제를 지내려 가는데 까마귀가 무슨 물건을 물어다가 그가 가지고 있던 바릿대 속에 떨어뜨렸다. 이는 왕(王)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상아 조각이었다. 궁예는 이를 숨기고 마음속으로 자못 자부하고 있었다고 한다.


까치가 등장하는 이야기도 있다. 청도군의 작갑사는 후삼국의 난리 통에 폐허가 되었다. 중국에서의 구법을 마치고 귀국한 보양(寶壤)스님은 이 절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다. 그래서 북쪽 고개에 올라가서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이 있었다. 그러나 내려와서 찾아보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다시 올라가 바라보니 까치가 땅을 쪼고 있었다. 그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예전 벽돌이 많이 있었다. 이를 쌓아올리니 탑이 되었고, 남는 벽돌이 없었다. 이곳이 전대의 절터임을 알았다. 보양은 절을 복구한 뒤에 이름을 작갑사(鵲岬寺)라고 했는데, 937년에는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선덕여왕(632~647)이 병환을 얻어 오래 낫지 않았다. 흥륜사의 승려 법척(法)이 불려가 치료했으나 오래도록 효험이 없었다. 다시 밀본(密本)이 궁중으로 초청받아 왕의 곁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경을 다 읽자마자 가지고 있던 육환장(六環杖)이 침실 안으로 날아 들어가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뜰아래에 거꾸로 내던지니 왕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삼기산(三岐山)의 신이 원광(圓光)에게 자신의 혼이 떠나는 것을 보라고 했다. 원광이 가서 보았는데 검고 늙은 여우가 숨을 헐떡거리다가 죽었다. 진성여왕(887~897) 때는 늙은 여우가 승려의 모습으로 변하여 곡도(鵠島)의 신지(神池)에서 매일 용의 간을 빼먹는다는 설화도 있었다. 이처럼 여우는 변신하는 것으로 믿었고, 흔히 요망한 것으로 생각했다. 고구려 차대왕(次大王)은 3년(148) 7월에 평유(平儒) 언덕에서 사냥을 했는데, 흰여우가 따라오면서 울었다. 왕은 그것을 쏘았으나 맞히지 못했다. 무당에게 물으니, 대답했다.


“여우라는 것은 요망한 짐승으로 상스럽지 못한데, 게다가 그 빛깔이 흰색이었으니 더욱 괴이하다고 하겠습니다.”

 

 

▲ 수원 팔달사 명부전 호랑이 벽화.

 


원성왕(785~798) 때의 김현(金現)은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한 처녀와 눈이 마주쳐 정을 통했다. 그 처녀는 원래 호랑이였는데, 하늘이 세 오빠 호랑이의 악행을 징계하려 하자 이를 스스로 대신하고, 김현으로 하여금 사람을 해치는 사나운 호랑이를 잡는 공을 세우도록 하여 벼슬을 얻게 했다.

 

▲김상현 교수
그리고 김현은 서천(西川) 가에 절을 지어 호원사(虎願寺)라 하고 ‘범망경(梵網經)’을 강하여 호랑이의 저승길을 인도했다. 이것은 김현이 호랑이를 감동시킨 이야기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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