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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

열정으로 세상 품고 자비로 세상 바꿔야 참된 대승의 불제자

 

▲현응 스님

 

 

부처님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배우는 행복입니다. 올해의 봉축 표어가 ‘마음의 평화, 세상의 행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마음에 드는 표어입니다. 마음의 평화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세상의 행복이야말로 모든 이들이 가장 누리고 싶은 덕목이며 가치 아니겠습니까.


평화와 행복이라는 말은 불교 뿐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종교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일상에서도 늘 추구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와 덕목은 평화와 행복으로 귀결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에 다다르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교에서 말하는 평화와 행복의 바탕, 본질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고전적인 불교용어로는 해탈이라고 표현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유와 행복의 본질, 그 밑바탕에는 해탈이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600여 년 전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펴시면서 재가자에게는 지계, 보시, 실천을 강조하셨습니다. 남에게 베푸는 삶을 행하고 절제하며 윤리도덕적인 삶을 행하면 천상의 복을 누린다고 하셨습니다. 이것 역시 평화와 행복에 이르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늘 우리 삶과 사회, 자연의 현상, 존재를 잘 살펴 그것이 무아, 무상, 공임을 알게 되면 모든 존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삶과 세상을 올바르게 통찰해 세상, 존재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러한 가르침을 펴신지 어느덧 26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러 지역과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은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변화를 진화라고 생각합니다. 불교는 무상, 무아, 공, 연기라는 기본적인 DNA를 갖고 있지만 그 모습은 시대별, 나라별로 엄청난 변화와 진전을 보였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현대 한국사회의 불교 역시 진화된 형태의 불교입니다. 참선, 명상, 사경, 독경, 주력 등 다양한 형태의 수행, 기도법이 신행되고 있고 티베트, 상좌부 불교계와의 교류도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늘어났습니다. 이 같은 다양한 가르침이 나타난다는 것은 불교가 그만큼 다양하게 진화되었다는 증거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며 완성된 가르침


기독교가 예수나 하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정리돼 전해지는 것인데 비해 부처님의 경전은 제자들의 기억과 구술로 전해오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멸 400~500년 경에 이르러서야 처음 문자로 기록한 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화해 왔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은 기억으로 전승하던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주석을 붙이고 나름의 해석을 더했습니다. 그 모두 것을 모아 놓은 것이 팔만대장경입니다. 즉 불교의 가르침은 부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 외에도 뛰어난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응용해서 발전시켜 기록한 것까지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경전이 발전, 진화, 연구된 결과 21세기 현대사회, 특히 한국사회 불자들이 접하는 불교는 참으로 다양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주제인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행복을 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형태의 불교에서 찾아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가르침에서는 무아를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가르침에서는 불성을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불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는 오늘날 필요한 불교의 가르침이 무엇인가와도 직결돼 있는 문제입니다.


저는 2600년간 진화돼온 다양한 불교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기본불교와 대승불교입니다. 기본불교는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DNA, 진화 과정에서도 변모하지 않은, 변함없는 기본의 가르침. 그것은 무상, 무아, 공, 반야입니다. 이 가르침이야 말로 부처님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며 이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가 기본불교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강조하는 불교는 부처님 입멸 직후의 초기불교와 이후 제자들에 의해 펼쳐진 아비달마, 그리고 중국의 선불교에서 주로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들로 하여금 해탈, 즉 자유로운 마음의 상태를 갖게 해 줍니다. 여타의 종교에서는 평화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스스로의 자유를 신에게 바치고 신의 섭리와 가르침 속에 자신을 내맡겨 은총을 받을 때 평화를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우리를 갈등, 집착하게 만드는 갖가지 번뇌의 속성을 살펴 그 정체를 알게 함으로써 그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듭니다. 이것이 불교의 기본 가르침이며 이것을 강조하는 장르가 기본불교로 분류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목적은 해탈과 해방, 자유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보면 존재론과 인식론의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이것만 갖고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의 평화와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필요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이 궁극적으로는 자유를 누리는 길이지만 그 형태는 매우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는 선사의 경지 역시 바꾸어 말하면 깨달음을 얻어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문제, 즉 배고픔과 졸리움의 문제, 나아가 사회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무상, 무아, 공, 반야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되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사회적 활동, 관계, 실천을 하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무상, 무아, 공, 반야로 대상, 존재, 물질의 속성을 알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잘 응용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단계입니다.


허상임을 알기에 얽매임 없어


예를 들자면 영화와도 같습니다. 영화가 현실이 아닌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그 화면이 허상임을 알지만 그 속에서 기쁨과 희망, 환희를 느끼듯이 우리의 삶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속에서 꿈과 희망, 평화와 행복을 만들어내자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우리의 삶이 무상, 무아임을 아는 그 힘을 바탕으로 진지하고 뜨거운 열정을 통해 삶의 희망과 행복을 만들어 내지만 동시에 그 성패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만약 세상에 출가수행자만 있었다면 기본불교의 가르침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99.9%에 이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살고 있었기에 그들을 위해 제시된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기본불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대승불교는 역사와 삶과 사회를 적극적으로 읽어내고 그것에 가치를 부여해 존재론의 세계, 인식론의 세계에서 가치론의 세계, 실천론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본불교에서는 무소유를 이야기했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소유의 가르침을 이야기합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는 무엇, 무엇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소유 역시 소유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기본불교에서도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에게 베푸는 삶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소유해야 베풀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존재에 대한 적극적 해석을 통해 사회적 실천으로 나가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이를 통해 역사적·사회적 실천도, 정치적 행위도, 경제적 부도 풍요롭게 만들어가는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불교는 2600년의 역사를 거치며 풍부하게 발전하고 진화해왔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부분들을 간과하고 극소수의 스님들, 출가자들에게 요구됐던 불교의 가르침을 현대의 일반인들에게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기본불교의 시대는 세상을 분석하고 규명하고 해명, 설명하는 것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구하는데 주력했다면 대승불교의 시대에는 세상을 바꾸는 일, 변화시키는 일, 만들어가는 가르침이 강조돼야 합니다.


기본불교의 길이 고요한 산중의 암자로 이어진다면 대승불교의 길은 스님들만의 불교가 아닌 99.9%의 절대 다수, 모두의 불교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 위에 많은 이가 걸어가 길을 만들 듯이 원력과 방편, 목표를 통해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갈 때 진정한 대승불교의 길이 실현되고 정토 장엄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는 ‘금강경’의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는 대목은 ‘정토장엄분’에 나옵니다. ‘응당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를 베풀고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청정한 마음을 내고 마땅이 이와 같이 머무는 마 없이 마음을 낼 지다’라는 가르침에는 ‘머무는 바 없이’가 아닌 ‘마음을 낸다’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응무소주’가 기본불교의 가치라면 ‘이생기심’은 대승불교의 자세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진정한 내 마음의 평화와 세상의 행복을 말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불자들 모두는 이러한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일에 더욱 더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호남지역교구본사협의회가 5월8일 광주 KT정보센터에서 봉행한 빛고을 선교율 대법회서 현응 스님이 설한 법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현응 스님

1972년 해인사에서 일타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4년 해인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대한불교조계종 개혁회의 기획조정실장, 실상사 화엄학림 교수,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기획실장, 불교신문사장, 해인사 주지를 역임했다. 현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장이며 저서로는 ‘깨달음과 역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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