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 스님 [하]
춘성 스님 [하]
  • 심정섭 기자
  • 승인 2012.06.26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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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명작-러시아 문학도 섭렵”
▲스님은 자신의 행적에 글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춘성은 선(禪) 수행 이후로 경전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법문을 할 때나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같은 이야기를 두 번 하지 않을 만큼 대화 소재가 무궁무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선 수행 이전에 읽었던 경전이나, 젊은 시절 읽었던 문학전집 등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춘성은 젊은 시절에 문학전집을 많이 읽었다고 전해진다. 출가 은사 만해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 혹은 다른 계기로 문학의 광이 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호기심이 강하고 모르는 것이 나오면 그것을 알기 위해 필요한 책은 다 읽어야 직성이 풀렸던 과거 습관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춘성과 인연 있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춘성과 관련된 책을 엮었던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책 ‘춘성’에서 시인 이행자의 말을 빌려 춘성이 문학전집을 다 읽을 정도로 독서량이 많았음을 밝히기도 했다.


민족운동을 했던 언론인 이몽의 딸이기도 한 시인 이행자는 20대 중반 망월사에 갔던 길에서 인연을 맺어 나이를 떠나 춘성과 친구가 됐다. 이행자는 “춘성 스님은 세계명작을 다 읽어보신 것 같았다. 특히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셨다고 했다. 스님은 당신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책을 보고서 확인해야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꼭 찾았다고 했다. 그리고 젊었을 때에는 책을 많이 보았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책을 많이 보아야 한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1년 만에 만나면 1년간 책 몇 권을 읽었느냐고 물었다. 그때에 보니 안 읽은 책이 없었다. 저나 제 친구도 책을 무척 좋아했고 그래서 춘성 스님은 우리를 좋아했다. 그 바람에 더욱 친해지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시인 이행자의 이같은 말은 춘성과 책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증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춘성은 제자들에게 책 몇 권 읽어서 말만 잘해봐야 다른 사람 흉내나 내는 것이라고 질책했다. 모양 중노릇, 신심 없는 중노릇, 선지식을 믿지 않는 중노릇은 파괴돼야 한다고 했던 춘성은 “본래 근본을 알지 못하고 책 몇 권 읽어서 평생을 말해 보아야 다른 사람의 흉내만 내는 것이고, 뱉어버린 침을 맛있다고 핥아먹는 개꼴이나 다름없다. 천하 없이 좋은 책을 만든다 해도 부처님이 설한 말씀이 가래침일진대 어떤 중생이라도 가래침이다. 깨치기 전에는 잠을 잘 여가가 없고 음식을 먹을 여가가 없다. 공부야 어쨌든 먹어야겠다, 실컷 자야겠다, 잘 입어야겠다, 큰방은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등 바라는 바가 많은 것은 납자들의 호사일 뿐”이라며 출가자의 나아갈 바를 일러주기도 했다.


그렇게 진정한 출가자로 무애도인의 삶을 살았던 춘성은 화계사에서 입적하기 전 상좌를 불러 “허공의 골수를 보았는가/ 온 산에 작은 나무 한 포기 없으니/ 가파른 절벽에서 손을 뿌리쳐야 대장부이다”라고 말하며 쉼 없는 정진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87년의 일이란/ 일곱 번 넘어졌다 여덟 번 일어나는 것이로되/ 횡설수설이여/ 붉게 타는 화로 위에 한 점의 눈일레라”라고 게송을 읊었다. 입적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던 것이다.


살아생전 제자들이 결제나 해제 때 법문을 녹음하려고 하면 “쥐×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야단을 쳤을 만큼, 자신의 행적과 관련해 글자 하나도 남기지 않았고 남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던 춘성은 상좌들에게 입적 후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오직 수행 정진할 것을 당부한 춘성은 1977년 8월22일 세납 87세, 법랍 74세로 입적했다. 다비를 마치고 열어본 그의 걸망에는 죽비하나, 빼놓은 틀니, 주민등록증, 속옷 하나가 전부였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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