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사성제와 사회적 고-17
44. 사성제와 사회적 고-17
  • 이도흠 교수
  • 승인 2012.07.09 1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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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뉴런은 연기의 깨달음에서 발생
시냅스 연결로 불성은 스스로 드러나

12연기를 거슬러서, 역관으로 보자. 늙고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이요, 태어남은 자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존재는 자기에 대한 집착에서 생겨나며, 집착은 대상을 갈망하는 데서 비롯된다. 갈망은 대상을 느끼는 데서 생기며, 그 느낌이란 대상과 접촉할 때 일어난다. 접촉은 눈, 귀, 코 등 육처에서 생기며, 육처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체인 몸에서 비롯된다. 명색(名色)인 몸은 수정란에 식(識)이 깃들면서 생겨나고, 이 식은 자신이 인류 역사 이래 지은 모든 의지활동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요, 이 의지활동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무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존재인 인간이 거울뉴런을 가졌다. 타인과 내가 연기적 관계라는 것을 깨달은 원숭이는 거울뉴런을 만들고 이를 점점 발달시켜 나갔다. 사회를 형성하면서 타인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됨을 알고 나자 진화적 선택을 한 것이다. 거울뉴런을 가진 인간은 타인의 말과 행동을 자신의 것처럼 이해하고, 그것이 빚는 고통에 자신도 가슴이 아프고 더 나아가 그를 해소하려 하는 마음이 든다. 이를 부처님께서 자비라고 통찰한 것이다. 그러니, 이 실상을 올바로 보고[正見], 모든 인간 존재가 서로 조건이 되고 의지처가 됨을 깊이 깨달아 나란 무아이고 공임을 올바로 사유하며(正思惟), 타인에 상처를 주지 않고 진리에 부합하는 말만 구사하며[正語], 타인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행위와 실천만을 행하며[正業, 正命], 타인을 해하려는 일체의 나쁜 마음을 끊어버리고 선을 닦아[正精進], 진리를 명확하게 터득하여[正念], 지혜로 마음을 고요히 집중하여 선정을 올바로 하는 것[正定]이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는 길이다.


인지공학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거울뉴런이 있다는 말로 대체될 수 있다. 사회 속에서, 거울뉴런을 씨앗삼아 인간은 소통하고 이해하고 공존하면서 자비행을 행한다. 팔정도를 통해 해탈한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타인이 고통 속에 있는데 어찌 홀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불교는 이에 대해 진속불이(眞俗不二)론을 내세운다. 저 아름다운 연꽃이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고 향기로운 바람이 스치고 지나는 높은 언덕에 피지 않고 냄새나는 수렁의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이 저 높은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고 반야의 바다를 완전히 갖추었어도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고 무량한 겁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 온 중생을 구제한 뒤에 비로소 열반을 얻는 것이다. 높은 깨달음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아직 중생이 고통 속에 있다면 그를 구제하지 못하는 한, 거울뉴런을 가진 부처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설혹 내가 부처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를 구제하지 못하는 한 아직 부처가 아니다. 반대로, 내가 중생의 고통에 공감하고 그를 없애 그를 해탈시킬 때, 바로 그 순간 나 또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거울뉴런을 가진 중생의 마음은 본래 하늘처럼 청정하고 도리에 더러움이 없다. 다만 본래 청정한 하늘에 티끌이 끼어 더러운 것처럼,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뇌세포들이 만든 무명에 휩싸였기 때문에 고통을 낳는다.

 

▲이도흠 교수

그런 뇌세포를 시냅스로 연결되지 않도록 억제하면, 유리창만 닦으면 하늘이 다시 청정함을 드러내듯, 본래 청정한 중생 속의 거울뉴런이 시냅스로 왕성하게 연결되면서 불성이 스스로 드러난다. 그러니, 깨달음과 깨닫지 못함,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이도흠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 ahuru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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