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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인구 폭증해도 보살행 없으면 절망적”

기자명 법보신문

미래세대도 불교 품으로

아시아 불자들 기독교에 대응
포교 나서지만 목적의식 빈약
명상에 심취한 서구인 많지만
자비·배려 실천하는 이 적어

 

 

▲애리조나주 ‘투싼’에서 만난 베트남 사원의 수행자.

 


이 내용은 가족 중심 불교수행프로그램 개발에 대한 3부작 에세이 중 세 번째 글이다.


지난 두 편의 글에서 미래 불교의 성공을 위한 한 방법으로서 서구에서의 가족중심 불교프로그램 개발에 대해 언급 했었다. 앞선 글에서 ‘더럼불자가족’을 한 모델로 제시했기 때문에 나는 그 에세이 내용을 다른 회원들과 공유하는 것에 대해 고려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의 글을 읽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갑자기 오싹해졌다. 그들이 그런 비전에 대해 심히 불쾌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왜냐고? 그들은 이름으로든, 형식으로든 불자가 되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사실 그 그룹 70여명의 회원 중 불자는 딱 네 명이다.-나와 남편 그리고, 맞춰보시라.-나의 두 자녀, 어느 누구도 이 모임을 종교로써 또는 전통문화로써 불교를 보급하는 수단으로 간주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래서 내가 조직화를 위한 하나의 전형으로 이 모임을 제시하고 있다는 내용을 읽게 되면 그들은 매우 불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소규모 활동에서 더 나아가 불교를 더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더럼불자가족’ 모임의 구성원들은 불교를 수행하고 있는 서구인의 절대 다수를 대표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왜 전도해야 하는가, 왜 제도화에 대해 고려해야 하는가, 젊은 불자층이라는 또 다른 세대의 존재 유무에 대해 왜 걱정해야 하는가, 전체적으로 볼 때 아시아 불자들은 불교를 전하는 것에 대해 매우 열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시아 불교를 목격한 바로는 기독교 선교활동에 대한 대응으로, 또는 그를 모방해서 불교 전파에 대해 그들은 큰 목소리를 종종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왜’라는 목적 자체에 대한 인식을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이유로 ‘왜’에 대한 내 답변의 일부는 한국의 불자들에게 무관하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아시아에서 전개되고 있는 현상이지만 통속적인 ‘마음챙김’ 명상(깨달음이라는 종교적 수행의 목적보다는 심리적 평온, 육체적 이완, 심리적 균형 또는 건강 증진, 웰빙 증진 등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행해지는 변형된 명상 형태 : 역자 주)은 서구에서 과거 10여년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이런 통속적인 ‘마음챙김 명상수행’이 아마도 불교센터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결코 없었지만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충분히 만족시키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챙김’ 명상은 심리적 웰빙에 도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윤리와 자아의 본질에 대한 통찰, 불교 가르침, 공동체, 탄생 및 결혼·죽음과 같은 인생행로의 중요 사건에 대한 의례의식 등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특히 아이들은 감각을 통해 냄새와 노래, 동작, 시각예술, 이야기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우정을 통해 영적인 길을 경험한다. 통속적인 ‘마음챙김’ 명상은 대체로 이런 풍부하고 표현되어 드러나는 감각에 바탕을 둔 경험을 결여하고 있다.


어린이들이 공립학교에서 통속적인 명상을 통해 자제하는 마음과 공감, 평온 등을 배우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 불자들은 알고 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에게 다양한 맛, 씹히는 느낌, 열기와 차가움, 다채로운 색깔 등이 가득 찬 제대로 된 식사 대신에 비타민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물론 불교프로그램이 모든 사람, 모든 가족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는 심리적 효과 이익뿐만 아니라 그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그 무엇인가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강력하고 역동적인 불교공동체는 통속적인 명상수행 흐름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는데 중요한 보완 역할을 하며 또한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서구에서 확대되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다음과 같다. 4년 전 우리 가족은 미국 북동부에서 남서부에 있는 애리조나주(州)로 이사해서 1년가량 살았다. 낯선 사막지역으로 이사왔을 때 나는 매우 외로웠고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5년 동안이나 살면서 일했던 명상센터를 떠나왔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곳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법우들이 나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투싼’에 머물게 되자 나는 곧바로 사원이나 명상센터를 찾기 시작했고 곧이어 베트남 사원을 발견했다. 그곳에는 다소 예외적인 경우로 나이 지긋한 서양인이 주지 스님으로 주석하고 있었다. 그는 1950년대부터 수행해왔고 마침내는 선승(禪僧)으로서 불가에 귀의하였다. 여러 해 동안 많은 불교 스승들을 접해왔던 나는 ‘다오 추안 스님’(Ven. Dao Chuan)이 예사로운 분이 아니라는 것을 즉각 알아 차렸다. 진실로 겸허하고 비교적 청정한 삶을 살아왔고 무아(無我, 팔리어로 ‘anatta’)에 대해 특히 깊은 통찰력이 있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그의 삶은 보살의 길을 멋있게 구현하고 있었다. 그 때부터 1년 동안 불교가 전해지지 않은 한 복판으로 이사를 했는데 오히려 그곳에는 뛰어난 역량을 지닌 불자 한 분 있었다는 경이로운 사실에 나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2년 후 입적할 때까지 그는 나에게 지극히 소중한 스승이 되어 주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미국에서 불교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가장 흔한 불평 중 하나는 거주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적당한 거리에 소재하는 지역 명상그룹 또는 센터가 없다는 점이다. 비록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런 그룹은 대개 경험이 많은, 그렇다고 반드시 훈련된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는 없는 재가 불자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다. 이것은 전국에 산재한 다수의 역동적이고 소규모이지만 훌륭히 운영되고 있는 불교그룹을 과소평가하고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접근성은 심각히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수미런던
불교센터는 결코 널리 보급되었다고 할 수 없고 가톨릭 성당이나 개신교 교회에 대한 접근성과는 전혀 견줄 바가 못 된다. 보다 더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불교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해 서구인들이 고민하기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곳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가르침을 원하고 필요로 하고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佛法)을 전도한다는 것은 자비와 배려의 발로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들만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것을 찾는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약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종교로서의 불교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통찰력과 지혜 그리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찾는 수많은 사람들의 ‘웰빙’과 행복을 위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번역=백영일 번역편집위원 yipaik@wooriba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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