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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앙박물관장 흥선 스님

“성보에 담긴 부처님 말씀에 귀 기울여 보라”

고운 최치원 시 탁본 계기로
30여 년 금석문 연구에 매진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지내며
교계 전시문화 새 지평 열어

 

 

▲흥선 스님

 

 

“초저녁의 정밀을 사랑합니다.

마루에 서서 하늘호수를 헤쳐가는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파초 잎 일렁이는 뜰을 거닐기도 합니다.

그제서야 오롯이 나와 마주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합천 해인사 홍류동 계곡에는 가족을 이끌고 해인사로 은둔한 고운 최치원의 시를 새긴 제시석(題時石)이 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광분첩석후중만(狂奔疊石吼重巒)
인어난분지척간(人語難分咫尺間)
상공시비성도이(常恐是非聲到耳)
고교류수진롱산(故敎流水盡籠山)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 지척의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

 

자신을 향해 ‘이러쿵 저러쿵’ 할 세인들의 소리조차도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로 잠재워버리는 고운의 기백이 한껏 느껴지는 시 한수. 1978년, 해인사 강원에서 수학하던 흥선 스님은 선배 학인을 따라 이 시를 탁본했다. 흥선 스님의 손끝에 형언하기 어려운 ‘고고함’이 전해져 왔다. 어쩌면 그 때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을 결정’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 계기로 스님은 30여 년을 한결같이 금석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강원 졸업 후 흥선 스님은 군 제대까지 마친 후 서울대 동양사학과에 입학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한다. 1990년대에는 유홍준 교수가 이끄는 한국문화유산답사에 참여한 스님은 ‘답사여행의 길잡이’ 시리즈 중 ‘팔공산 자락’,‘가야산과 덕유산’ 편을 집필했다.


1999년 직지사 성보박물관장을 맡은 스님은 다양하고도 의미 있는 전시회를 기획해 그 안목과 통찰을 일찍이 인정받았다.


2003년 한국과 일본에 있는 한국 범종 100여점에 새겨진 도상과 글씨를 탁본한 후 열어 보인 ‘한국의 범종 탁본전-하늘꽃으로 피어난 깨달음의 소리’, 2008년 몽골 지역의 선사시대 암각화와 사슴돌, 고대 투르크 비문에 대한 탁본 조사 성과를 펼쳐 보인 ‘돌에 새긴 선사 유목민의 삶과 꿈’ 특별전 등은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지난해 내놓은 ‘석등-무명의 바다를 밝히는 등대’는 벌써 명저로 손꼽히고 있다. 스님의 인문학적 소양은 물론 스님만이 도출해 낼 수 있는 해석이 가히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흥선 스님의 진면목을 다 드러낼 수는 없다.


2009년 세상에 선보인 ‘맑은 바람 드는 집’ 한 대목을 보면 흥선 스님의 또 다른 면모 일편이나마 엿볼 수 있다.

나옹 선사의 ‘신령한 구슬(靈珠歌)’


신조끽죽재시반(晨朝喫粥齋時飯)
갈즉호아다일완(渴則呼兒茶一椀)
문외일침산적요(門外日沈山寂寥)
월명창반백운산(月明窓畔白雲散)


‘이른 아침 죽을 뜨고 점심에는 밥 먹으며 / 목마르면 아이 불러 차 한 잔을 달이게 하네 / 문 밖으로 해지면 산은 마냥 적요롭고 / 달 밝은 창가로는 흰 구름이 흩어지네’

 

깔끔하면서도 정감 넘치는 해석이 돋보인다. 이에 대한 스님의 단상을 들여다보자.


‘돌아서면 배고파지는 것이 죽이라고 합니다만, 요즘처럼 먹을 것 넘쳐나 도리어 탈인 세상에서는 쉬 출출해지는 점이 오히려 미덕입니다…그 빈 느낌이 좋습니다…대저 자유는 비어 있음에 깃듦이 예사인 모양입니다.’


‘죽’ 한 그릇에서 ‘자유’를 읽어 내는 안목. 깊은 사유의 소산이다. 박학다식을 직관으로 꿰뚫어 정수 하나를 꺼내 놓는 선기가 느껴진다.


‘소쩍새 울음, 창문을 밝히는 달빛, 흩어지는 구름이 도리어 고요함을 한층 깊게 합니다… 시은(市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잣거리에 숨는다는 뜻입니다… 사람 북적이는 시정(市井)에서 화광동진(和光同塵)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은거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경지야 제 일이 아니거니 언감생심, 감히 넘볼 일이 있겠습니까. 하여 저는 제 깜냥대로 만뢰구적(萬籟俱寂), 모든 소음과 잡담을 어둠이 거두어간 초저녁의 정밀(靜謐)을 사랑합니다. 이럴 때 저는 그 고요함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미닫이를 열고 나갑니다. 마루에 서서 가는 듯 마는 듯 하늘 호수를 헤쳐가는 달을 바라보기도 하고. 파초 잎 일렁이는 뜰을 거닐기도 합니다. 그제서야 오롯이 나와 마주서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석등 하나에도 조화 담겨있어
풍부한 해석이 포교 첫 걸음

 

문화재 정수에 법음 담아 설파
연기·무아 삶 속 자비실현 중요


솔직하다. 그리고 담백하다. 세상 모든 사람을 금방이라도 끌어안을 듯하다.


‘근자 들어 차를 마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목마르면 마시고, 쉬고 싶을 때 끓이고, 졸릴 때도 찻잔을 끌어당깁니다… 혼자 마시는 차에 일정한 법도가 있을 리 없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마십니다. 간편하게 유리잔에도 마시고, 머그잔에도 마시고, 찻사발에도 마시고 대중이 없습니다. 격식 차려 제대로 마시는 분들이 본다면 웃을 일이나 뭐 그다지 괘념치 않습니다. 혼자 마시는 차를 ‘신(神)’이라 이른 옛말을 위안 삼아 혼자 즐길 따름입니다.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도 제 방식대로 차를 내곤 합니다.’


남들 눈 의식해 격식을 차릴 법도 한데 ‘아예 그럴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지 않는가! 강골(强骨)이다. 아마도 ‘상대하기 까다로운’스님으로 알려진 것도 이러한 강골 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공과 사가 명확하고,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는데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직설적이니 웬만한 사람에게는 ‘까다로운 스님’으로 비춰졌을 법하다.
스님에게 우문 하나를 여쭈어 볼 참이다. 국가지정 문화재 70% 가량이 불교문화재다. 불자라면 누구나 갖는 긍지 중 하나일 터. 원론적 물음 하나가 있다. ‘우리는 불교문화재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말이다. 생뚱맞은 우문이지만 여기에 천착하는 이유가 있다.


언젠가 자문해 본 적이 있다. 도량에 서 있는 ‘석등’이나 ‘비문’ 등에 귀 기울여본 적 있는가? 솔직히 말해 거의 없다. 있다 해도 알림판을 좀 유심히 보는 정도다. 박물관이나 사찰 전시관에 전시된 불화, 고승 근영 앞에서 합장을 해본 적 있는가? 환희 속에 저절로 ‘된 적’은 드물게 있어도 ‘한 적’은 없다.


성보와 문화재 사이에 분명 틈이 있어 보인다. 도량 내에 자리하고 있어도 어떤 것은 성보로 느껴지는데 어떤 것은 그저 유물로 느껴질 뿐이다. 더욱이 그 문화재가 사찰에 자리하지 않고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을 때는 이런 간극은 더 벌어진다. 왜일까? 흥선 스님이 이 의문을 풀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 물음을 통해 불교문화재를 대하는 마음을 다시금 다잡아볼 수 있을 것 같아 불교중앙박물관장 흥선 스님을 찾았다. 다짜고짜 ‘문화재’란 무엇인지 여쭈어 보았다.


“사람 그 자체입니다.”


문화재는 사람이 빚어낸 것이니 연관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어찌 문화재가 사람일 수 있을까?


“유무형의 문화재를 창조한 주체는 사람입니다. 작품 하나에는 작가 정신뿐 아니라 당대 사람들의 의식과 열망, 염원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작품연구에 있어 작가의 정신세계와 더불어 시대적 고찰도 함께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중국 송대의 문화재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당대의 중국인을 보는 것입니다. 신라 문화재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봅니까? 신라인의 정신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중국 사람을 보고, 한국 사람을 보는 겁니다.”

 

 

▲현존 쌍사자 석등 3점 중 하나가 영암사 석등이다.

 


명쾌하다. 역사와 사료에 기반한 가치만 말할 줄 알았지 그 속에 담긴 정신, 인문학적 접근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불교문화재를 놓고도 경제적 가치로만 재단하고 있지 않은가. 이건 대략 ‘얼마가 될까’하면서 말이다. ‘문화재는 사람 자체’라는 답변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궁금증은 계속 남아 있다. 불교문화재를 보는 시각은 더 넓어야 할 것만 같다.


“부처님 말씀입니다.”


충격이었다. 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간과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딱히 잡히지 않아 스님의 눈만 쳐다보았다.


“일례로 종, 목어, 운판, 법고 등의 4물은 일체중생을 일깨워 안락을 이루게 하지요. 무엇으로 깨우고, 무엇으로 열반에 들어 안락을 얻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 말씀입니다. 석등 역시 ‘진리’를 밝히는 것이니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다. 목어의 해학, 운판의 아름다움에만 취하고 있을 게 아니다. 그 모든 모양과 색, 소리가 법음을 위한 방편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문화재 이전에 성보임을 적어도 우리 불자는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신심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 속에 담긴 또 다른 예술성은 그 다음 일이다. 우문은 해결됐다. 그 순간, 흥선 스님은 중국 강창 문학을 예로 들었다.


강창문학이란 문자 그대로 이야기(講)와 노래(唱)를 섞어서 연출하는 문학양식이다. 당대(唐代)에 시작된 강창은 후에 연출성격이 바뀌며 우리의 ‘판소리’와 같은 형태로 변모되었다.


“강창문학은 불교에서 시작된 겁니다. 당대 스님들이 포교 목적으로 저잣거리에 나가 강창을 연출했던 겁니다. 무엇을 전했을까요? 부처님 말씀입니다. 성보에 담긴 예술성과 의미를 폭넓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교계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부대중은 그 폭에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적 식견은 아니더라도 불자라면 일반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포교의 시작입니다.”


그렇다! 경전을 통해서만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흥선 스님은 지금 포교 방편의 다양성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영암사 쌍사자 석등이 주변 산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석등을 위한 축대, 무지개 다리가 이채롭다.

 


궁금했다. 흥선 스님은 문화재 해석을 통해 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말이다. 스님은 합천 영암서터 쌍사자 석등을 꺼내 들었다. 저서 ‘석등-무명의 바다를 밝히는 등대’를 통해서도 스님은 이 석등의 아름다움을 그려낸 바 있다.


‘내쌓은 돌축대, 무지개 돌계단, 마당의 삼층석탑, 그 뒤의 금당터 기단, 마치 뒤편의 바위산과 아름다움을 겨루기라도 하는 것 같습니다. 바위산이 하나의 꽃이듯 절터 전체도 한 송이 꽃인 양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쌍사자석등은 꽃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별이 저 혼자 빛나지 않듯 영암사터 쌍사자석등은 더불어 빛나 보입니다.’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의 백미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겁니다. 독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연대의 아름다움, 조화의 미를 지향하는 마음들이 이 석등을 빚은 거라 생각합니다.”


연기를 말함이요 화엄을 일컫는 것이리라.


“저는 연기와 공(空), 무아를 제대로 알고 그 사유체계에 따라 실천하며 사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자비심도 발현되기 때문이지요. 저 역시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중입니다.”


확연해졌다. 아무도 관심 없는 금석문을 연구하고, 탁본을 하며, 독특하고도 의미 있는 전시회를 준비하는 이유. 스님에게는 그 자체가 포교인 것이다. 그 속에서 자신이 뽑아낸 정수를 세상 사람에게 전하며 법음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성보가 곧 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올곧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 하나하나를 챙겨주고 있는 것이리라.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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