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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만파식적(萬波息笛)

세상 온갖 거친 파도 잠재우던 신비의 피리

신라 중대 무열왕권의
정당성·신성성 강조한
대표적인 정치적 성물

 

 

 

 

신라 중대 조정에는 신비한 피리 하나가 국보로 전해지고 있었다. 신문왕 때 만든 만파식적(萬波息笛)이 그것이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은 물러가고, 질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개이며, 바람이 자고, 물결은 평온해졌다. 세상의 온갖 거친 파도를 고요히 잠재우는 피리, 그러기에 이 피리를 만파식적이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 하나의 독립된 항목으로 수록된 만파식적 설화는 이렇다.


신문왕은 즉위 2년(682)에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는데, 문무왕을 위한 것이었다. 감은사는 처음 문무왕이 짓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자,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이를 완공시켰던 것이다. 이 해 5월1일 해관(海官)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에 작은 산 하나가 떠서 감은사로 향해 오는데 물결을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일관(日官) 김춘질(金春質)에게 점을 치게 했다. 일관이 아뢰었다.


“성고(聖考)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三韓)을 수호하시고, 김유신은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한 아들로서 하강하여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 하여 성을 지키는 보배를 주시려 하시니, 만약 폐하께서 해변에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을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 달 7일에 이견대(利見臺)로 거둥(擧動)하여 그 산을 바라보면서 사자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산세는 거북의 머리와 같은데 위에는 한 그루 대나무가 있어서,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 사자가 돌아와서 아뢰었다. 왕은 감은사로 가서 유숙했는데, 이튿날 오시(午時)에 대나무가 합하여 하나가 되자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일어나 어두워지더니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 달 16일에 이르러 비로소 바람이 자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왕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그 산에 들어가니 용이 검은 옥대를 받들어 왕에게 바쳤다. 왕은 용에게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혹은 갈라지기도 하고 혹은 합해지기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용이 말했다.


“비유하면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없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대나무란 합쳐야만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성왕께서 소리로서 천하를 다스리게 될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이 대나무를 취하여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지금 왕의 아버지께서는 해룡(海龍)이 되셨고, 김유신은 다시 천신(天神)이 되어 두 성인이 마음을 같이하여 이처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보배를 저에게 주시어 저로 하여금 그것을 왕께 바치게 한 것입니다.”


왕은 몹시 놀라고 기뻐하여 오색 비단과 금과 옥을 용에게 주고 사자를 시켜 대나무를 베게 한 다음 바다에서 나왔다. 그때 산과 용은 문덕 사라졌다. 왕은 돌아와서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의 천존고(天尊庫)에 간직했다.


이 설화는 신라의 지배층에서 형성된 것이기에 당시의 정치적 목적이 투영되어 있다.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된 김유신, 두 성인이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지키는 보배를 준다는 것은 일관과 용의 말이 일치하고 있다. 이 말속에는 신라 중대 왕권의 정당화와 신문왕권의 강화라는 정치적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신라에는 이미 신라 삼보(三寶)가 있었다. 황룡사 구층탑과 장육존상, 그리고 천사옥대 등의 신라삼보는 신라 중고기의 불교적 정치이념의 표방과 관련하여 형성된 것이었다. 중대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강조하려고 한 상징적 보물인 만파식적은 유교 정치이념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바다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신이 된 김유신이
동해의 용왕 통해 전달

 

 

 ▲ 일제 시대 ‘조선신보’에 실린 신라 피리.

 


나라를 지키는 보배를 획득하는 이야기는 신화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리하여 카오스에로의 복귀와 그 뒤에 따라 일어나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신화적인 순간을 알려주고 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갱신과 재생과 새로운 창조를 허용하기 위해서 혼돈이 따른다. 새로운 형태가 탄생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기 위해서 현존하는 상태를 끝내버리려는 경향 때문이다. 그리하여 천지가 진동하고 풍우가 일어 어둡기를 7일 동안 계속한다. 천지진동은 세계의 완전한 파괴를, 어둠은 어떤 한계나 외형적인 윤곽이나 거리 등을 전혀 식별할 수 없는 밤의 정권의 수립을, 풍우는 모든 형태의 용해이고 무형에로의 복귀를 나타냄으로써, 이들은 모두 창조 이전의 카오스에로의 복귀를 말해준다. 그리고 7일은 시간의 주기적인 재생을 의미한다. 7일간의 혼돈이 끝난 후에 신문왕이 배를 타고 그 산에 들어갈 수 있었고, 용도 나타날 수 있었다. 시간의 소거가 가능해지면 모든 장벽은 무너져 내리고, 죽은 자는 되돌아 올 수가 있게 되는 것이기에.


음악이 신적 현현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동서양이 같았다. 신들은 인간에게, 인간은 신들에게 음악을 통해 대화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도 신에 의해 발명되고 연주되며, 또 인간에게 전해졌다고 하는 많은 악기들의 이야기가 있다. 플루트·하모니카·기타 등은 그리스 신들이 애호한 악기였다. 이처럼 음악과 악기조차도 신들의 선물이라고 믿고 있던 그리스인들은 신들에게 청원을 하고 신들을 달래기 위해 그것을 사용하였고, 신들이 그에 응답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음악이 지닌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성질은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거나 해악을 바꾸는 힘을 지녔다고 믿었다. ‘예기’ 악기편에서 ‘악은 하늘에 말미암아 만들어졌다’(樂由天作)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처럼 음악이 신적(神的) 현현이라고 하는 것은 만파식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해룡인 문무왕과 천신인 김유신이 보내준 선물이기에…. 만파식적을 신적(神笛)이나 신물(神物) 등으로 부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성왕(聖王)은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 이야말로 이 설화가 전해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다. 여기에는 예악(禮樂)으로써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정치 이념이 강조되었다.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린다고 한 것은 유교의 예악사상과 통한다. 성음(聲音)의 길은 치도(治道)와 통하고, 악을 살펴 정치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공능은 다양성을 합하는데 있다. 악이 종묘 중에 있으면 군신상하(君臣上下)가 함께 들어 화경(和敬)치 않을 수 없고, 여장향리(族長鄕里) 중에 있으면 장유(長幼)가 들으므로 화순(和順)치 않을 수 없으며, 여문(閨門) 중에 있다면 부자형제가 함께 들으므로 화친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이것이 곧 악의 현실적인 공능이기 때문이다.

 

 

 ▲ 피리를 불고 있는 신라 토우들.

 


신라에서는 ‘즐거우면서도 음탕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감상적이지 않은(樂而不淫 哀而不傷)’ 덕음(德音)이 바른 음악이라고 보는 예악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즐거우면서도 어지럽지 아니하고, 슬프면서도 비탄에 젖지 아니하면 가히 바른 음악이다.”
우륵(于勒)의 이 말은 예악사상과 통하고 있다.


신문왕이 이를 강조하게 된 목적이 있었다면, 그것은 왕실과 귀족, 지배자와 피지배자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회유해야만 했던 통일직후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 설화에서 대나무가 낮에는 분리하고 밤에는 합하며, 합한 후에 소리가 난다고 한 것은 악은 천지간의 조화라고 하는 예악사상을 말한다. 천지간의 조화로 생겨난 만파식적의 소리는 자연히 덕음에 속하는 것이고, 적병이 물러가고 파도가 잠드는 등의 신비적인 효능은 천지가 조화를 얻은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효소왕 2년(693)에는 천존고에 소중히 보관하던 만파식적을 도적맞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당시의 화랑 부례랑도 적에게 붙잡혀 갔다. 그러나 백률사 관음상 앞에서의 기도로 잃어버렸던 만파식적을 다시 찾고 부례랑이 살아서 돌아왔다. 이 일로 해서 만파식적은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봉작(封爵)되기도 했다. 만파식적은 신라 하대 원성왕(785~798)에게까지 전해졌고, 이를 전해 받은 원성왕은 천은(天恩)을 후하게 입고 그 덕이 널리 빛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악은 하늘에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기에 천은을 입은 것이고, 악은 덕의 빛남이기에 덕이 널리 빛났다고 했을 것이다. 이 무렵 일본은 만파식적이 군사를 물리친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손에 넣고자 두 번이나 신라에 요구하다가 실패한 뒤 신라 침공 계획을 포기하기도 했다는 설화도 전한다.

 

▲김상현 교수
신라의 풍류도(風流道)는 음악과 깊은 관련이 있다. 풍류는 곧 음악이기도 하기에. 상열가악(相悅歌樂)하던 화랑들이 있어서 가법(歌法)이 성행하던 시절, 만파식적이 국보로 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신라인의 음악적 인생관은 조화를 토대로 하는 평화다. 음악은 천지간의 화기(和氣)고, 그 기능은 다양성을 조화시키는 것. 사람을 감화시키고 풍속을 바꾸는데, 음악만큼 큰 것이 없다. 신라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음악이 세상의 거친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고.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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