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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보살의 자취 신발과 지팡이

교화와 보살행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다

지팡이는 보살·고승 분신이며
남기고 간 신발은 화신의 증표


혜공설화 속 짚신은 해탈 상징
백율사엔 관음보살 자취 남아

 

 

▲짚신 모양 토기. 부산박물관 소장. 삼국시대.

 


신이나 불보살은 그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아니 그 진짜 모습은 볼 수 없다. 그 진신(眞身)은 드러나지 않지만, 가끔 그 화신(化身)이 등장한다. 어떤 때는 초라한 거사(居士)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파랑새의 모습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신발이나 지팡이를 남겨 그 흔적을 보여준다. 지팡이와 신발은 그 사람의 분신이자 발자취이기에.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4년(158)의 일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가 부부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로 가서 해조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연오를 싣고 일본으로 가버렸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세오가 찾아 나섰는데, 남편이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그 바위에 올라가니 바위는 또한 세오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이렇게 연오가 바위 위에 벗어놓은 신발, 그것은 남편의 흔적이었고 발자취였다.


고구려 성왕이 국경을 순행할 때였다. 오색구름이 땅을 덮고 있는 것을 보고 가서 구름 속을 찾아보았더니 한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면 그 승려는 홀연히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곁에 삼층의 토탑(土塔)이 있었다. 다시 가서 그 승려를 찾아보았지만 풀만이 무성했다. 그곳을 한 길쯤 파보니 지팡이와 신발[履]이 나왔고, 범서(梵書)로 쓴 명(銘)이 있어서 그것이 불탑임을 알았다. 지팡이와 신발은 그 승려가 남긴 흔적이었던 셈이다.


원광(圓光)이 삼기산(三岐山)에서 수행할 때다. 이 산의 신이 원광에게 중국 유학을 권했다. 나이가 3천년에 가까운 그 신은 신술(神術)도 장할 뿐만 아니라 장래의 일도 모르는 것이 없고 천하의 일에 다 통달했다고 스스로 자부했다. 원광은 신의 권유와 일러준 계책에 따라 중국 유학을 다녀올 수 있었다. 중국 유학을 마치고 온 원광은 삼기산의 절로 갔다. 그 산의 신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밤중에 신이 왔다. 원광은 말했다.

“신의 은혜로 편안히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원광은 또 청했다.
“신의 진용(眞容)을 볼 수 있겠습니까?”
“법사가 만약 내 모습을 보고 싶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 하늘 끝을 바라보십시오.”
이튿날 법사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큰 팔뚝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잇대어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했다.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
“보았는데, 너무도 신기했습니다.”


이 일로 해서 삼기산을 민간에서는 비장산(臂長山)으로 불렀다고 한다.


삼기산의 신은 나이가 3천년에 가깝고 신술도 뛰어났지만, 그 몸 또한 장대한 것이었다. 그 몸은 하늘에서도 다 드러나지 않았다.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는 큰 팔뚝 하나, 그것은 신의 팔뚝이었다. 구름 위로 내민 팔뚝만으로 신의 몸집이 얼마나 장대한가를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마지막 숨을 거두며 죽어간 그 신의 모습은 칠흑 같이 검은 늙은 여우 한 마리였다.


관음보살은 여러 모습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교화한다. 원효가 낙산사로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렀을 때, 한 여인이 월경이 묻은 빨래를 하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가운데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말했다.
“제호(醍)를 마다하는 화상(和尙)아.”


파랑새는 말을 마치고 갑자기 숨어서 보이지 않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또 전에 보던 신발 한 짝이 있었다. 그 때야 빨래하던 전의 그 여인과 파랑새가 관음의 진신(眞身)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소나무를 관음송(觀音松)이라고 했다. 파랑새가 떨어뜨리고 간 신발 한 짝, 그것은 관음의 발자취였고 흔적이었던 셈이다.

 

 

▲경주 백률사 입구 바위에 남아있는 관음보살의 발자국.

 


경흥(憬興)은 신문왕 때의 국노(國老)였다. 그가 병을 얻은 지 한 달이 넘었다. 한 비구니가 와서 문안하고 열한 가지의 모습으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자 모두 웃다가 병이 나았다. 여승은 남항사(南巷寺)로 들어가 숨어버렸는데, 지니고 있던 지팡이만 십일면보살상의 탱화 앞에 있었다. 경흥의 병을 고쳐준 그 비구니는 남항사 십일면관음보살의 화신이었던 셈이다. 그의 지팡이가 이 관음보살상 앞에 있었던 것이 그렇고, 열한 가지 모습으로 춤을 추었다는 것이 또한 그렇다.


어느 날 경흥은 대궐에 들어갈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그때 초라한 모습의 한 거사가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 위에 쉬고 있었다. 시종이 꾸짖었다. 승복을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지고 있느냐고. 거사는 말했다.

 

“두 다리 사이에 살아 있는 고기를 끼고 있는 것보다는 시장의 마른 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뭐가 나쁘냐?”


경흥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 거사의 뒤를 쫓게 했는데 남산의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광주리를 버리고 숨어버렸는데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있었고, 마른 고기는 소나무 껍질이었다. 문수사의 문수보살은 초라한 모습의 거사로 화신하여 경흥을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경흥은 탄식하며 말했다.


“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는 것을 경계하셨구나.”


경주의 북쪽에 소금강산이 있고 이 산에는 백률사(栢栗寺)가 있다. 이 절의 관음상은 영험이 많았다. 백률사 입구 바위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 발자국을 두고 민간에서는 관음상이 일찍이 도리천(利天)에 올라갔다가 돌아와 법당에 들어갈 때 밟았던 것이라고도 하고, 관음보살이 부례랑(夫禮郞)을 구출해서 돌어올 때 보였던 자취라고도 했다. 효소왕 때의 화랑이었던 부례랑은 효소왕 2년(693)에 낭도들을 이끌고 원산만 부근인 북명(北溟)을 유오(遊娛)하다가 적적(狄賊)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부례랑의 부모는 여러 날 백률사 관음상 앞에서 기도했고, 이에 부례랑은 한 승려의 안내에 따라 무사귀환 할 수 있었다. 그 승려는 백률사 관음보살의 화신이었고, 이 절 입구 바위에 선명하게 남은 발자국이 곧 부례랑을 구출해서 돌아오면서 밟았던 관음보살의 발자취라는 것이다.


효소왕 8년에 망덕사(望德寺) 낙성회가 열렸다. 왕이 참석하여 공양했다. 누추한 한 비구승이 참석을 청했고, 왕은 그를 말석에 참석시켰다. 재가 마칠 무렵에 왕이 말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왕이 친히 참석한 재에 참석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승려는 웃으며 말했다.


“폐하께서도 다른 사람에게 진신석가(眞身釋迦)를 공양했다고 말 하지 마시오.”

 

 

▲신발 모양 토기. 삼성문화재단 소장. 삼국시대.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하늘을 날아 가버렸다. 왕은 사람들에게 그를 찾게 했는데, 그는 남산 참성곡 바위 위에 지팡이와 광주리를 놓아두고 숨어버렸다. 사람들은 흔히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할 때가 있다. 효소왕도 그러했던 것 같다. 진신석가를 몰라보고. 혜숙(惠宿)은 같은 시간에 그 모습을 여러 곳에 보여주었다고 한다. 진평왕의 사자가 혜숙을 궁중으로 모셔가기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여자의 침상에서 자고 있었다. 그를 추하게 여긴 사자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던 도중에 혜숙을 만났다. 어디서 오는지 물었을 때, 시주집의 7일재에 갔다가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 시주 집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었다. 얼마 후에 혜숙이 죽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현(耳峴) 동쪽에 장사지냈다. 그때 고개 서쪽에서 오던 마을 사람이 도중에 혜숙을 만났다. 어디 가는지를 묻는 질문에 그는 대답했다.


“이곳에 오래 살았으므로 다른 지방으로 유람하려고 합니다.”


서로 인사하고 헤어졌다. 혜숙은 반리 쯤 가다가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그 사람이 고개 동쪽에 이르렀을 때 혜숙을 장사지낸 사람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 사람이 혜숙과 만났던 이야기를 자세히 하자 사람들은 무덤을 파보았다. 무덤 속에는 다만 짚신[芒鞋] 한 짝만 있을 뿐이었다.


이 설화는 달마가 죽은 뒤에 짚신 한 짝을 들고 서천(西天)으로 돌아갔다는 설화를 닮아 있다. 495년 달마가 입적(入寂)하자 웅이산에서 장례를 치르고 정림사에 탑을 세웠다. 3년 뒤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던 위나라의 송운(宋雲)이 총령에서 달마를 만났다. 달마는 손에 짚신 한 짝을 들고 홀로 가고 있었다. 송운이 어디를 가느냐고 묻자 그는 서천으로 간다고 했다. 달마와 작별하고 귀국한 송운이 이를 조정에 알리자 왕은 달마의 무덤을 파서 확인하도록 했다.

 

▲김상현 교수
무덤에는 빈 관 안에 짚신 하나만 남아 있었다. ‘경덕전등록’에 전하는 이 설화와 짚신 한 짝만을 무덤 속에 남긴 채 다른 지방으로 유람을 떠났다는 혜공설화는 비슷하다. 짚신은 흔적이다. 그리고 발자취다. 한 짝의 짚신만을 남기고 떠나간 혜숙, 그는 자유인이었고 해방자였다. 집착도 미련도 헌신짝처럼 훌훌히 벋어 던진.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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