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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탑당굴 내부 기둥들은 어디서 왔는가?

진리 상징한 스투파에 신성 더하는 사물

인도 중부 작은 도시에
스투파 감싼 기둥 원형
툴자레나 석굴 존재해

 

인도 탑당굴은 가장 안에 스투파를 모신 긴 말굽형 평면으로 정착되었다. 그에 더해 스투파를 감싸면서 동시에 홀 양쪽에 빽빽이 기둥들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기둥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여기서 잠깐, ‘차이탸(chaitya)’를 전에는 탑원굴이라 했는데 왜 이제는 탑당굴로 쓰는지 의아해 할 것 같다. 무심코 선행 일본인 번역을 이어받아 ‘탑원굴(塔院窟)’로 했으나 이후 ‘탑당굴(塔堂窟)’로 정정한다. 부처님 상을 모신 집은 불당(佛堂)이고, 탑을 모신 집은 ‘탑당(塔堂)’이다. 한자 ‘院(원)’은 ‘담으로 둘러싸인 안마당집’이다. 거주처 ‘비하라’는 사방 둘러싼 독방들의 가운데 안마당 집이므로 ‘승원굴(僧院窟)’이지만, 안마당 없이 스투파만 모신 평지 차이탸는 ‘탑당’이고 굴은 ‘탑원굴’이 아니라 ‘탑당굴’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

 

 

▲ 1. 준나르 툴자레나 석굴. 스투파 감싼 기둥들의 원초형 탑당굴.

 


기둥으로 감싼 스투파의 원초형 탑당굴을 보려면 인도 중부 준나르라는 작은 도시로 가야한다. 지금은 인구 3만 정도로 쇠락했지만 준나르는 B.C.3세기에서 A.D.3세기까지 로마로부터 아라비아해 뭄바이 인근 항구에서 서가트 산맥을 넘어 내륙으로의 무역로상 중심도시였다. 당시 불사 후원을 많이 했던 사타바하나 왕조는 인도 석굴이 집중 분포된 이 지역과 흔히 남인도라 일컫는 중남부 아마르바티 지역을 넓게 지배했다. 준나르 중심으로 10리 안 사방 나지막한 산맥 네 곳 석굴군이 총 개수로 무려 200여개가 집중 분포되어있는데, 당시 불교가 얼마나 성행했는가를 알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서쪽에 툴자레나 석굴군이다. 인도에서 자주 그렇듯 안내판은 물론 길도 제대로 없어 물어물어 왔다갔다 반복하며 벌판을 가로 질렀더니 멀리 산기슭에 석굴군이 눈에 들어왔다. 11개 굴 밖에 안되는 작은 규모로서 맨 앞에 탑당굴이 나왔다. 암벽 굴 입구는 완전 허물어 없어져 원모습은 알 수 없다. 원형 스투파 주위를 기둥들이 빙둘러 싼 원형굴은 인도 전역에서 이 석굴뿐이다(그림1).


▲2. 툴자레나 탑당굴 평면. 스투파 감싼 기둥.
스투파 주위 울난간 위치에 대신 기둥들로 감싼다(그림2). 결과적으로 스투파에서 기둥열과 굴벽의 2중 탑돌이길이 생겼다. 12개 기둥은 물론 따로 박은 것이 아니라 덜 파낸 부분이다. 단순 팔각기둥인데 전면 기둥 2개 꼭대기에 잘록 파낸 간단한 장식이 있다. 너무 단순하여서인지 현대 낙서 장식이 그득하다.


기둥은 추후 탑당 공간에서 아주 중요한 장식체가 된다. 스투파 자체는 별다른 장식 없이 원통대좌 위에 공모양 불란(佛卵)을 올려놓은 단순 형태다. 스투파 상부 양산은 알 꼭대기가 매끈한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없이 군투팔리 석굴처럼 상부 원형 돔 천정이 덮는 큰 대체 양산으로 설계된 것으로 보인다(그림3).

 

지붕의 무게를 땅으로 전달해주는 일반적 기둥과는 달리 석굴에서 기둥이란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 전적으로 의장적인 사물이다. 둘러싼 기둥으로 형성된 이중 탑돌이길의 원인을 필자가 추정하면, 스투파는 원래 부처님을 기리며 유골 사리를 묻었던 신성한 숭배물이었으나 석굴 암석에 불과한 스투파에는 사리를 묻을 수 없으므로 대신 둘러싼 겹을 하나 더 만들어 공간적으로 더 신성화 한 것이다.

 

 

▲ 3. 툴자 탑당 상부 원형 돔 천정.

 

 

안·밖 탑돌이 경계선
계급별 예배 탓일수도
의례행진도 유도 역할


탑돌이 의례를 생각해보면 기둥을 경계로 스투파 안돌이와 바깥돌이를 상정할 수 있다. 한사람이 바깥돌이에서 안돌이 순서로 진행했을 수도 있고, 서열 또는 계급 차이에 의한 안팎 차별 탑돌이를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4. 준나르 레냐드리 차이탸. 말굽형 평면. 5. 전형적 차이탸. 안의 스투파, 감싼 기둥열, 말굽형 평면. 준나르 레냐드리 차이탸.

 


일단 스투파 주위를 뺑 두른 것으로 시작된 기둥은 점차 인도 전역의 차이탸, 탑당굴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요소가 되었다. 기둥은 제일 안에 모신 스투파를 감싸서 말굽형 평면 홀 양 측면으로 뻗어나와 결과적으로 굴 밖으로부터 제일 속까지 들어가는 전체 공간의 깊이를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그림4). 단순 암석 덩어리 스투파를 탑당을 만들어 모셔 신성화 한 것에 더하여 의례 행진을 유도하여 제일 깊은 지성소까지의 신성감을 더한다(그림5).

 

산치 같은 평지 스투파에서 울난간 안에서 탑돌이는 부처님 분신을 가까이 접하는 특권을 가진 출가 스님으로 제한되었을 것이다. 재가자 회중들은 시선이 차단된 울난간 밖에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툴자레나 원형 탑당굴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을 뿐 아니라 굴 앞 터가 좁아 바로 낭떠러지이므로 다수의 회중이 발붙일 자리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 당시 초기 불교는 소수 출가자 스님들의 수행처 위주였으므로 많은 인원을 배려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6. 산치 18번 말굽형 탑당. 7. 산치 18번 사원. 안에서 밖으로. 멀리 대스투파 보임. 앞 사각 돌 자리가 원래 스투파 자리.

 


산치 사원 단지 대스투파 바로 남쪽에 말굽형 평면 18번 사원이 있다. 원래 마루야 또는 슝가 왕조인 B.C. 2-1세기 추정 탑당이다. 지성소 스투파 외곽 반원 부분을 기둥 대신 이중 벽으로 감쌌지만 앞부분은 여느 탑당과 똑같이 기둥열을 두고 있다(그림6, 7). 총 14개 기둥이 서있다. 기둥 윗부분 툴자레나처럼 잘록파낸 장식은 훨씬 정교하게 윗 반원 아랫 반원을 잇는 장구형 문양으로 앞으로 불교 기둥 문양의 하나로 정착된다.


개인적 탑돌이 의례 못지않게 중요해진 스투파 앞 다수의 회중 예배로 인하여 원형 탑당이 말굽형 탑당으로 길게 변화하는데, 승가 집단의 인원이 늘어나기도 했겠지만 앞으로 올 대승불교 재가신자 회중들을 점차 배려하여 점점 더 확장된다. 이후 인도 말굽형 탑당은 반드시 안에 기둥열과 함께하게 된다.

 

▲이희봉 교수
불교의 말굽형 탑당은 제일 속 반원형 지성소와 더불어 양쪽 기둥열이 서양 중세 성당과 아주 흡사하다. 기둥열로 형성된 양쪽 회랑은 서양성당과 달리 예배보는 곳이 아니고 오로지 한 줄로 행진만 가능한 좁은 공간이다.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볼 예정이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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