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는 십계명이라는 율법이 있다. 십계명은 크게 기독교의 신 야훼에 관계 된 계명과 인간과 관계 된 계명으로 나뉜다. 십계명은 첫째,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 것. 둘째,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 것. 셋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 것. 넷째,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킬 것. 다섯째, 부모를 공경할 것. 여섯째 살인하지 말 것. 일곱째, 간음하지 말 것. 여덟째, 도적질 하지 말 것. 아홉째,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지 말 것. 열 째, 이웃의 소유물들을 탐하지 말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첫 번째에서 네 번째 계명까지가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밝힌 계명이고, 나머지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를 밝히는 계명이다. 그런데 열 개의 계명 가운데서 신과 관계된 계명이 네 개나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기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아니라 신을 위해 존재하는 종교라는 것을 말해준다. 기독교 십계명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계명이 글자그대로 명령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명령이란 지키면 무사하지만 어기면 그에 따른 벌을 받는다.
신이 볼 때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 언제든지 신을 배신할 속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악을 행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인간들에게 법령을 세우고 이를 어길 때에는 가차 없이 징벌을 내려 신의 두려움을 알게 하고 이로써 인간세상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 한다. 특히 야훼 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을 어기는 것보다 인간이 신과의 관계에 대한 계명을 어길 때 더욱 혹독한 형벌을 내린다.
그 형벌은 현생에서만이 아닌 목숨을 버리고 난 후에도 지속되어 계명을 어긴 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고통을 받게 된다. 구약 성서에는 신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인간들을 어떻게 신이 형벌을 내렸는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내용 속에는 세상을 창조했다는 신의 사랑과 용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야말로 분노와 복수로 얼룩진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신이 이와 같은 계명을 인간들에게 내린 이유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계명은 신의 뜻을 깨닫고 죄를 인식하며 신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적으로 보면 율법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만 실제에 있어 율법을 통한 구원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다만 이와 같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은 스스로 율법을 다 지키려고 애를 써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만들려는데 있을 뿐이다.
기독교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애초에 신이 율법을 정할 때 인간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킬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간들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점을 신은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구약시대의 인간들에게 있어 미래는 어둠과 공포 그 자체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렇게 절망적이기만 한 인간들에게 하나의 큰 빛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의 출현이다.
예수는 인간들에게 지금까지의 율법으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으며 인간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을 믿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선포한다. 이른바 율법시대가 종식되고 복음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의 율법이 파기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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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열 법림법회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