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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상]

출가 때 짐 속에 넣은 ‘善의 연구’

▲구례장터에서 산 ‘주홍글씨’는 결국 불에 태웠다.

보통학교 때 등대지기를 동경했던 청년은 대학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행랑채 골방으로 들어가 여행가방 속에 책부터 챙겼다. 어느 절로 가더라도 책 몇 권은 가져가려 했다. 청년도 전쟁 직후 불어닥친 영어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일찌감치 ‘영어사전’ 한 권을 가방 속에 넣어두고 있었다. 나머지 책들은 행랑채 궤짝 속에 넣었다 꺼냈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두 권을 정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탐독했던 니시다 기타로의 ‘善의 연구’, 그리고 당시 국내 최고 문장가가 쓴 문고판 수필집이었다. 결국 서옹 스님이 추천해서 백양사 목포포교당인 정혜원에서 불교학생회 총무 일을 볼 때 구입했던 불교서적 가운데 읽고 또 읽었던 책 ‘임제록’은 뺐다.


청년 박재철. 훗날 ‘무소유’로 물욕에 찌든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시대의 스승으로 추앙받은 법정은 그렇게 책 세권을 가방에 챙겨 넣고 출가의 길에 나섰다. 소설책과 시집 등 남겨진 책들은 자연스럽게 어린 여동생과 사촌동생들의 몫이 될 터였다.


‘잠시 친구 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해남 집을 떠나 목포 정혜원에서 묵은 법정은 서울행 열차를 탔다. 목적지는 강원도 월정사였다. 먼저 종로 봉익동 대각사를 찾았다. 용성 선사가 창건한 대각사에서 하룻밤 묵고 월정사로 갈 계획이었다. 부처님 전에 ‘출가하여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겠습니다’ 하고 빌었다. 하지만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서 한암 스님이 이미 입적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한 월정사 스님은 당시 선학원에 주석하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보라고 권했다.


전에 정혜원에서 ‘동쪽에는 동산 남쪽에는 효봉’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낯설지 않았다. 곧바로 효봉을 찾아가 출가 허락을 받았다. 효봉은 “니는 부처님 가피로 세상에 태어났으니 불법인연이 참으로 크다. 부디 수행을 잘해서 법의 정수리에 서야 한다”며 법명을 법정(法頂)이라 내렸다. 그렇게 행자가 됐다.


법정의 책 읽기는 행자가 돼서도 멈추지 않았다. 점심공양을 준비하면서 가져온 책 중 한 권을 꺼내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효봉은 행자 법정을 앉혀놓고 “밥 하는 시간에 책을 보더구나. 이왕 출가했으니 책보다는 화두를 들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장 태우겠다”고 하자, “화두를 들다 보면 어느 땐가 책이 시시해질 것이다. 그때 책을 치워도 늦지 않다”면서 ‘무(無)’자 화두를 주었다.


효봉은 이어 “책 속의 내용이란 남의 것이다. 술이 아니라 술 찌꺼기다. 니 것을 가져야 한다. 니 것을 채우는 데는 참선이 제일”이라며 정진을 당부했다. 법정은 동안거를 해제하고 나서 집에서 가지고 온 책을 모두 미래사 신도 집으로 보냈다. 효봉은 그제서야 ‘중물이 들었다’고 인정했고, 그해 하안거를 해제한 날 사미계를 주었다.


쌍계사 탑전으로 자리를 옮겨 효봉을 시중들며 단 둘이 살던 시절, 법정은 효봉에게 ‘초발심자경문’을 배웠다. 그러던 어느 날 구례장터에서 서점에 들렀다가 책에 대한 호기심을 떨치지 못하고 나다니엘 호손이 지은 ‘주홍글씨’를 사고 말았다. 탑전으로 돌아와 밤 9시 취침시간에 고방으로 들어가 호롱불 밑에서 몰래 읽다가 그만 스승에게 들키고 말았다. “세속에 미련을 두고 그런 걸 보면 출가가 안 된다. 당장 태워버려라”라는 호령을 듣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태울 수밖에 없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아궁이 속에서 활활 타고 있는 책을 본 순간 번뇌마저 타버리고 있음을 느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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