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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특별한 것 없음 알기에 특별하다고 이름 붙인다

머릿 속 복잡하니 이름만 많아
물맛 알려면 물 속에 들어가야


깨쳐도 없던 것 생기지 않아
알아차린 그것이 곧 얻은 것

 

 

▲지유 스님

 


우리가 알고자하는 불교의 참뜻이 번거로운 것은 아닙니다. 목표는 한 곳인데, 한 곳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각자 지금까지 배워온 학문, 지식, 경전을 바탕으로 수많은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진리다, 보리다, 도다, 열반이다,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이다 등등을 머릿속에 복잡하게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름일 뿐이지 실제는 아닙니다. 실제라고 하면 그것도 또 하나의 이름이 되겠지만 부득이 참 모습을 표현하자니 열반, 주인공, 진리, 도라고 할 뿐이지 이름을 붙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사 스님들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사람마다 또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아무리 듣고, 경전을 읽고, 머릿속으로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해일 뿐 실제 목표로 하고 있는 자리에 당도한 것은 아닙니다.


깨달음의 자리는 따지고 들어갈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이때까지 배운 모든 학문을 버리고 몸소 체험하는 것입니다. 물이라는 설명을 아무리 듣고 책을 보고 이해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물의 참맛은 아닙니다. 물의 참맛은 몸이 물에 들어가 봐야 비로소 맛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머릿속 복잡한 지식들을 버리고 산문에 들어서는 것을 사교입선이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선문에 들어서보면 또 문자가 많습니다. 1700공안만 해도 그렇습니다. 공안이 그렇게 많습니다. 비록 1700가지나 되는 공안이 있더라도 그 뜻은 자기의 본래면목입니다. 자신의 본래 면목을 화두를 통해 한번 깨달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선문에 들어설 때는 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저 처음 경전을 접하고 공부를 하다 보니 경전의 묘한 맛이 참 많았습니다. 초보자가 몰랐던 것을 알게 되니 진도가 나가는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불법을 제대로 알게 되는가 싶어 즐겁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습니다. 당시 내 나름대로의 생활 방식이 있었습니다. 나름의 공부도 있었습니다. 밤 9시가 돼서 대중이 모두 잠자리에 들면 나도 자는 척 하다가 사방이 다 잠들었다 싶으면 살며시 일어나 한 쪽 구석에 앉아 내 나름대로의 공부를 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나다 보니 처음에는 금방 지나가던 1시간이 어느 순간부턴가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공부한 글들이 머릿속에 뱅뱅 도는 것입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거든요. 내가 불문에 들어온 것은 마음 하나 깨닫기 위한 것이었고, 중생이 도를 깨닫지 못한 것은 번뇌망상, 산란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니 모든 망상을 제거해야 도가 성취된다 싶어 경전에 의지한 것이었는데 경전을 공부하다보니 지식은 많아져도 거꾸로 마음은 더 산란해지고 있어 당초 내 목표와는 반대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책을 보기 전에는 염주만 돌려도 금방 1시간이 지났는데 책을 보고 난 후로는 그 시간이 무척 지루해진 것이었습니다. 경전을 공부하면서 지식은 많아졌지만 마음은 더 산란해지고 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선방으로 갔습니다.


그때만 해도 참선이라는 것을 말만 들었지 그것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선방에 가서 구참 스님에게 용맹정진을 하겠다고 했더니 스님이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는가’물으셨습니다. 사실 그때 화두라는 말도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화두가 뭐냐 물었더니 ‘화두도 모르는 놈이 무슨 참선이냐’하는 거예요. 그래서 화두를 가르쳐달라 했더니 조실 스님을 뵙고 화두를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 조실 스님이셨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는 ‘내일부터 선방서 공부를 하려고 화두를 타러왔습니다’했습니다. 참 순진했지요.


효봉 스님의 세납이 당시 예순 정도 되셨는데, 한 참 생각하시더니 ‘석가미륵 유시타로 타시아수(釋迦彌勒 猶是他奴 他是阿誰)’하시며 ‘의심이 나지?’하고 물으시기에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그러시며 ‘따지고 분석하지 말고 이것이 뭣고 하고 의심하며 지극히 하다보 면 깨닫게 된다’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니 반가웠습니다. ‘타(他)가 누구인고’하고 지극히 의심해 나가기만 하면 깨닫게 된다 하시니 깨닫기가 이렇게 쉬운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선방에 들어가 ‘타가 누구인고’하니 제법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나니 별로 진척도 없는 것 같고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나 살펴보니 전부 졸고 있는 것입니다. 참 이상했습니다. 나는 졸기는커녕 공부가 안 돼서 애를 먹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졸고 있으니 그분들에게는 이 공부가 참 쉬운 것 같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도 한 번씩 죽비로 맞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스님이 저를 보고는 ‘타가 누군고 할 때 누군고하고 있는 놈이 뭣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했습니다. 의심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해보니 뭔가 좀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나고 난 후 그 스님이 다시 ‘누구인고라고 하는 놈이 뭣고라고 하고 있는 그 놈이 뭣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 뭣고, 뭣고 하면서 뱅뱅 도는 것이지 종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잇, 속았다’ 싶어 다시 조실 스님께서 시키신 대로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열심히 하면 한 철에 깨닫는다 했습니다. 한 철도 너무 길다 했습니다. 3년이  지나버리면 앉아서 시간만 보내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또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건 상근기나 하는 일이지 싶어 그저 ‘타는 누군고, 누군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염불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의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때는 그저 일념이 돼야 한다는 생각만 갖고 의심없이 일념으로만 한 것입니다.


계속 하다 보니, 길을 걸으면서도 염주가 돌아가듯이 ‘타가 누구인고’가 돌고, 밥을 먹어도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타가 누구인고’하고 있는 그 놈을 의심하게 됐습니다. ‘타가 누구인고’하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인지 정말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잠시 공부가 중단 되었다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정말 모르고, 정말 알고 싶은 것에 생각을 두고 해야지 의심도 없는 놈을 일념으로만 하고 있다는 것은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있는 놈이 누구인가’를 생각했습니다. 의심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굳이 생각을 하지 않아도 의심이 사라지질 않았습니다.

진리라는 것, 도라고 하는 것은 사량분별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똑같이 불성을 갖고 있지만 제 나름의 학문과 지식에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량분별이 떨어지기 전에는 머리로 아는 이해지 깨달음이 아닙니다. 진리는 말이 아니오, 생각으로 들어가도 없는 언어도단이니, 사량분별이 끊어진 자리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옛 스님이 어느 선사에게 ‘선사께서 깨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니 ‘지금 이 자리의 나’라고 했습니다. 지나간 과거도 아니요, 미래의 성불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숨쉬고 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도 ‘여래란 어떤 특별한 것이 없다는 그것이 특별한 것’이라 했습니다. ‘특별한 것이 있고, 없는 그 양면에서 여래를 보라’했습니다. ‘도를 얻고도 얻은 것이 없으니 도를 얻었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반 상식적으로는 거짓말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자성을 요달하면 이것이 부합됩니다. 무엇을 얻었다고 하면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처럼 생각되지만 사실 그런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을 알아차린 그것을 이름 붙여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깨달았다는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다’고 했고 그래서 선사가 ‘지금 이 자리 나’라고 한 것입니다. 깨닫기 이전에도 나였지만 깨닫고 나서도 나입니다. 나를 두고 새로운 자기를 구하려는 환상에 사로 잡혀있었는데 그것을 날려 버리니 진리, 도라는 이름은 도망가고 흔적도 없어 지금 참된 자리의 나를 눈 떴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것 없는 그것이 일반 사람과 다르기에 특별한 것이라 이름 짓는다 했습니다.


자꾸 세월이 흘러가니 시간을 아껴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범어사 조실 지유 스님이 임진년 하안거 결제일에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지유 스님
193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 중학교 과정까지 일본에서 마쳤다. 해방 직후 귀국해 18세가 되던 1949년 범어사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50년 해인사에서 상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전국의 선원뿐 아니라 선원 아닌 곳에서도 수행정진하며 운수납자의 삶을 살아왔다. 현재 범어사 조실로 제방 납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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