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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 [중]

돌보던 蘭을 보내고 얻은 ‘무소유’

▲운허 스님이 추진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법정은 탑전에서 홀로 수행하다가 해인사로 갔다. 그곳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면서도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인가. 이 길을 가기 위해 출가를 한 것인가. 선배들의 길 말고 나만의 길은 없는가”를 고민했다. 아침저녁으로 장경각에 올라 참회의 예불을 하면서 신심을 모았다. 방선 시간 포행도 장경각 둘레를 거니는 것으로 대신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장경각 계단을 내려오면서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방금 보고 내려온 것이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니, “못 봤다”고 한다. “선반 같은 곳에 가지런히 꽂힌 것”이라고 하니, “아, 빨래판 같은 것 말입니까”라고 되묻는다. 법정은 그때 “누군가는 팔만대장경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말과 글로 옮겨 전해야 하겠구나”고 생각했다.


해인사에서 동안거에 이어 하안거까지 마치고 강원으로 내려갔다. 경전을 배우고 익히기로 했다. 대강백 명봉은 ‘뜻은 대승에 두고 행동은 소승처럼 하라’고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그만 방 앞에 ‘소소산방(笑笑山房)’이라 이름 붙였다. 그 방에서 ‘화엄경’ 공부에 빠졌고, 경전을 볼 때면 어김없이 가사장삼을 수하고 단정히 앉아 향을 살랐다. 경전 공부에 진척이 빠르고 문재(文才)가 특별했기에 해석을 유려하게 했던 법정은 운허가 추진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도 참여했다.


통도사에서 1년 반이나 역경 작업에 몰두하다 해인사로 돌아온 법정은 여기서도 운허의 청으로 번역에 몰두했다. 방 안은 원고뭉치로 넘쳐났고 서울에서 수시로 학자들이 내려와 일을 보았다. 구족계 계사 자운이 해인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번역작업을 편히 하도록 배려했고, 글 솜씨가 알려지면서 신문사나 잡지사에서 칼럼을 청탁해오는 일도 잦았다. 이때 ‘굴신운동’이라는 글로 한바탕 홍역을 앓았다. 맹목적이고 기복적인 절을 비판한 글에 성철 제자들이 몰려들어 법정을 몰아세운 것이다. 훗날 성철이 “펜대를 바로 세우고 글을 쓰는 사람은 법정 뿐”이라고 했지만, 법정은 이 일로 해인사를 떠났다.


또 한 번은 월남파병을 두고 종단 차원에서 연일전승 무운장구를 비는 조석 기도를 추진하자 “그 어떤 명분일지라도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악이다. 그런데 싸움을 말려야 할 종교인이 그 싸움에 동조한다는 것은 더욱 큰 악”이라고 비판했다. 이때는 승적박탈까지 논하게 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해인사에서 봉은사로 자리를 옮긴 법정은 다래헌에 머물며 소일거리로 난(蘭) 두분을 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밖에서 그 난 때문에 안절부절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다른 이에게 보냈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내 소유란 없다. 어떤 인연으로 해서 내게 왔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가버린다. 나의 실체도 없는데 그 밖에 내 소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한동안 내가 맡아 가지고 있을 뿐이다”라는 생각으로 수필을 썼다.


평소 즐겨 읽던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까지 소개하며 쓴 이 수필이 바로 ‘무소유’였다. 대중들이 소유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망하며 쓴 ‘무소유’는 세간의 화제가 됐고, 이를 본 김영한 보살은 고급요정이었던 대원각을 보시했다. 오늘날의 서울 성북동 길상사다. 법정은 길상사를 개원하던 날도 “맑은 가난이 마음에 평화를 이루게 하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며 무소유 정신을 강조했다. 이날 김수환 추기경이 “스님께서는 책에서 무소유하라고 이야기하시지만 나는 ‘무소유’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무소유는 많은 이들의 순수감성을 자극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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