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

서로 다른 가치 조화 이루는 것이 종교의 참 역할

지혜의 눈 열린 사람에겐
모든 가치 진리 안에 있어


내 안의 생각 조율하면
남 이해 못할 이유 없다

 

 

▲수불 스님

 

 

종교가 무엇인지, 왜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알면 시간 낭비를 덜 할 수 있습니다. 헤매지 않고 정성을 더 쏟을 수 있으니 이익도 더 큽니다.


종교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됩니다. 종교를 통해 종교가 말하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핵심에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현실적으로 이익이 될 수 있습니다. 종교를 믿으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이익이 생겨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종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류가 찾아낸 정신적 가치 가운데 최고의 가치라 할 수 있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라는 개념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교의 개념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가 등장한지 2600여년 됐습니다. 기독교는 2000여년 됐습니다. 그 전에는 힌두교 정도의 종교가 있었지만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어지고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 이전에는 자연숭배, 주술, 신화 같은 것을 종교로 여기고 신성시했지만 종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종교에는 과학보다 앞서가는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종교는 정확해야 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갖지 않고 이야기하면 종교가 아닙니다. 기만입니다. 종교에는 더 이상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을 풀어헤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것을 알려야 합니다. 눈을 뜨게 해줘야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의 기능을 그런 것이라고 생각안합니다. 눈뜰 수 있는 기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 안하고 늘 자기 눈높이에서만 종교를 생각하고 믿고 의지합니다. ‘우리 아들딸 합격하게 해주세요, 아픈 사람 빨리 낳게 해 주세요’하는 식입니다. 소박하고,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부탁을 합니다. 그게 우선 급하니까요.


그러나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종교처럼 착각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은 눈을 갖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초등학교만 평생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높이를 달리할 수 있는 가치를 생각하고 배우고 이해하고 실천해서 증명할 수 있는 자세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종교를 위해 종교생활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광신, 맹신입니다. 정신적 우상이나 물질적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타파하고 본질을 추구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놓은 가치, 그 가르침이 종교가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종교상에는 거짓이나 비밀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 공개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비밀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지 깨달은 자의 눈, 지혜를 가진 사람의 눈에 무슨 비밀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비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떤 가르침에 눈떠야 하는가. 과학에서는 지구가 45억년 전에 생겨났고 인간은 350만년전 쯤에 등장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후로 오랜 시간이 흐르며 인류는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 등등을 거치고 씨족, 부족, 도시국가를 형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환경의 동물에서 사회적, 정치적 동물로 변모했으며 마침내 종교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전에는 차원 높은 가치를 인식할 수 있는 눈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어리석음을 지혜로 전환할 수 있는, 그런 가치에 눈뜬 성자가 세상에 출연한 것입니다. 그 성자가 불교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라고 말합니다. 무명과 탐진치 삼독의 지옥 같은 삶에서 좀 더 다른 차원의 행복을 느끼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눈을 뜰 수 있도록 가르치는 지혜로운 가치관이 세상에 등장한 것입니다.


종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법질서에서는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정의는 진리고 불의는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에 대한 구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전제가 돼야 사회가 통제되고 변화 발전할 수 있습니다. 선은 진리고 악은 진리가 아니라고 규정해야만 악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방어 할 수 있습니다. 질서가 유지 됩니다. 그래야 힘없는 사람도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종교윤리에서는 선도 진리고 악도 진리라는 개념을 발견했습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진리 속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진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지만 선악을 포용한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물들지 않는 순수함이 영원한 것이다. 이것을 찾아내고 규명했습니다. 논리로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것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며 정신적인 눈을 뜬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의 질서가 바뀌었습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의 영향입니다. 다만 종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과학은 눈에 띄게 발전하다 보니 오늘날의 발전이 과학의 산물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과학을 앞서가지 못하는 종교는 도태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사고에서는 깨끗한 것만을 청정(淸淨)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물들지 않는 것을 청정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것은 더러운 것이 오면 물듭니다. 그것은 순수한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잠깐 인연 따라 깨끗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가 물들여지니 더렵혀지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청정은 어떤 물을 들이려 해도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더럽지도 않고 깨끗한 것도 아닙니다. 종교에서는 이것을 청정이라고 말합니다. 일반과는 용어의 뜻이 다르니 종교가 어려운 것입니다. 같은 청정을 이렇게 다르게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와 일반, 양쪽을 다 소화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처럼 오해하고 살고 있는 것 가운데 또 하나가 고정관념입니다. 흔히 ‘눈이 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눈이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눈이 본다’는 것은 고정관념, 정체된 것입니다. ‘눈을 통해서 보고 있다’는 것이 바른 말입니다. 죽은 사람이 눈을 뜨고 죽었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으로 하여금 보게끔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생명, 마음, 혼, 정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름이 다만 그럴 뿐이지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을 깨닫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종교의 가치는 내가 누구인지, 생명이 어떤 것인지에 관한 이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자각할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데 있습니다. 눈이 본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눈이 보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양쪽을 다 이해해서 조화롭게 소화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면 어떤 말을 어떻게 하든, 실타래가 엉켜있어도 풀어낼 수 있습니다.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이 시점에서 왜 저렇게 말을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눈을 뜨고 깨달았을 때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됩니다. 그것이 힘입니다. 이런 열쇠를 통해 열고 들어갔을 때 세계가 달라집니다. 내 가치관이 폭넓어집니다. 그런 소통을 통해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야 합니다. 너와 나의 화합 뿐 아니라 내 안의 엉클어진 정신을 소통시키고 화합하는 것입니다. 안팎을 조율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나부터 안정시키면 남을 이해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럼 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이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고 그걸 알 수 있게끔 길을 열어놓은 것이 종교입니다. 중심이냐, 중심이 아니냐, 이런 것을 구분할 수 있는 힘을 지니는 방법, 그런 가치를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길은 어디서 비롯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종교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되는 종교, 불교는 이 길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수행은 어둠을 밝음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눈이 본다와 눈이 보지 않는다의 차이점을 모두 소화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 주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으면 이치로는 배울 수 있지만 실제화는 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우글거리는 어리석음을 뽑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자기를 바꾸는 것, 혁명할 수 있는 능력을 수행이 제공합니다. 오늘 제가 드린 말씀을 참고해서 좀 더 자유롭게,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찾고 싶으신 분들은 오늘부터 열심히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이 법문은 8월20일 서울 가회동 안국선원 정기법회에서 설한 법문을 요약 게재한 것입니다.



수불 스님

1975년 범어사에서 지명 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7년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78년 범어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1979년부터 10여 년 간 제방 선원에서 수행했다. 1989년 부산에 안국선원을 개원했다. 현재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주지이며 안국선원 이사장, 부산불교연합회 회장, 동국대 국제선센터 선원장이다.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