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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어사 한주 석공 스님

무욕의 빈 렌즈에 화엄세계 펼쳐진 인드라망을 담다

대강백·선사 자신 없어
강원 졸업 후 하산 결심

 

이색풍경·미시세계 연
카메라는 수행의 도반

 

 

▲석공 스님은 자신만의 눈으로 만물을 담아내고 있다. 렌즈를 통해 얻은 혜안! 그건 연기였다. 자신만의 화폭에 담아 낸 건 다름 아닌 상생과 생명을 말한 ‘화엄’인 것이다.

 

 

석공 스님의 사진은 따뜻하다. 세상 그 모든 것들과 조우하면서 긴밀한 대화라도 나눈 듯, 그 어떤 소곤거림이 들려온다. 특별한 소재가 주는 낯설음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 놓여있거나, 예로부터 있었던, 그 어느 산사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의 사물들이고 풍경이다. 하지만 석공 스님의 렌즈에 담긴 순간 피사체들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지금 눈앞에 놓인 사진이 그렇다. 범어사 경내를 구분 짓는 어느 담 한켠에 놓인 9개의 빗자루. 눈처럼 내린 은행잎들이 화면에 가득하다. 빗자루도 가을 정취를 한껏 느껴보려는 듯 떨어지는 은행잎을 온 몸으로 맞이하고 있다.


순간, 의문이 인다. 은행잎이 떨어지기 전, 저 빗자루들은 무엇을 쓸었을까? 이전의 고단함을 뒤로한 채 잠시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제목을 붙이라 한다면 휴식(休息)이라 하고 싶다. 사람(人)이 나무(木) 아래, 혹은 기대어(휴. 休), 자신(自)의 마음(心)을 보려는(식. 息)게 휴식 아니던가. 9개의 빗자루도 스스로를 반조하며 지금, 이 순간의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저 빗자루를 세워두고 간 스님들도 지금은 가을바람에 몸을 맡긴 채 한적하게 쉬고 있을 것만 같다.


범어사에서만 40년 째 살고 있는 석공 스님은 교계를 대표하는 사진가 중 한 명이다. 1988년 한국사진대전에서 작품 ‘수계의식’으로 동상을 수상하며 한국사진가협회 회원이 됐다. 이후 부산사진대전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을 죽비로 내려치는 모습을 담은 ‘경책’으로 대상을 타는 등 10여 차례의 수상 경력이 있다.


석공 스님의 여정을 통해 보이듯, 스님은 취미 차원에서 카메라를 잡고 있는 게 아니다. 속세말로 ‘프로’다. 그래서 궁금증이 인다. 렌즈를 통해 보이는 세상은 어떤지. 무엇을 담고 싶은지. 그래서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말이다.


“사진이 좋아 찍을 뿐입니다.”


이 한마디와 함께 또 다른 사진 한 장을 내어 보인다. 얼핏 보아서는 메말라 갈라진 땅 위에 넝쿨 한 가닥 놓여 있는 듯하다. 죽음과 삶 사이의 ‘생사일여(生死一如)’일까? 아니다! 갈라진 땅이 아닌 소나무다.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넝쿨을 접사해 담아 낸 사진이다.


“사진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미시세계를 보여 줍니다. 이 경내에 산재해 있는 소나무들, 촬영하기 전까지는 그저 소나무로만 보였습니다. 렌즈로 통해 본 소나무! 거기엔 소나무를 의지해 하늘로 향하는 넝쿨의 생명이 있었습니다. 소나무는 거부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 하나 턱 하니 내어주고 있습니다.”


소나무와 넝쿨은 서로 얽혀 있으면서도 다투지 않고, 제 색깔을 그대로 간직한 채 그저 그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공존하고 있다. 무아의 세계요, 화엄의 세계다.


또 하나의 사진이 눈앞에 놓여진다. 새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고, 딱 한 마리가 비상한 컷이다. 이 찰나의 순간이 어떻게 석공 스님 눈앞에 펼쳐졌을까?


“새 한 마리가 분명 다른 무리에 한 발 앞서 날개를 펼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기다린 보람 끝에 촬영한 사진입니다.”
마음만 앞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셔터만 눌렀다면 새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어디론가 날아갔을 것이다. 기다림의 미학이 창출해 낸 작품, 제목을 붙인다면 ‘일갈’이라 하고 싶다. 대중에게 ‘당장 깨어나라!’는 일갈을 내린 후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걷는 선사가 아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또 다른 ‘외로움’이 보인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을 홀로 떠나는 나그네의 모습이다.


순간, 무엇인가 잡혔다. 석공 스님의 사진들을 유심히 보았다. ‘산길’이 그렇고, 단 한 개의 감만 남겨 둔 ‘감나무’. 미묘한 고독이 석공 스님의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다.


“저는 동적인 사진보다는 정적인 사진에 좀 더 치중하는 편입니다. 꼬불꼬불한 산길. 일반사진가 분들은 가능한 사람을 넣어 찍습니다. 그래야 역동적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산길만 촬영합니다. 누군가 걸었을 산길, 또 누군가 걸어야 할 길. 누가 걸었을까? 무슨 사유를 하며 걸었을까?”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는 ‘사진은 독백이고, 나의 대화’라 했다. 촬영된 것은 피사체이지만 실은 작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의 내적 영상인 것이다. 석공 스님 사진 속에서 고독이 밀려 나오는 건 스님이기 때문일 것이다. 끝없이 되뇌었던 독백이 사진 속에 스며있기에 수행인만이 갖는 고독이 느껴지는 것이다.


강원을 졸업한 후 석공 스님은 한 동안 회의감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강백이 될 자신도, 화두를 뚫을 자신도 없었습니다. 하산하려 했지요.”


싸움도 곧 잘 벌였다고 한다. 대부분 산사를 찾는 관광객과의 싸움이 많았다. 함부로 탑에 오르는 사람, 술 한 잔 걸치고 경내에 들어와 고함치는 사람. 스님은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알아듣게 차근차근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당장 소리부터 질렀지요. 제 자신 속에 응어리 진 것을 다른 사람을 통해 풀었던 것 같아 그 분들께 부끄럽습니다.”


방황의 나날이 연속되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작은 카메라 한 대를 얻었다. 렌즈를 통해 보이는 풍경이 이색적이었다. 매일 보던 스님들도 렌즈를 통해 보니 새 사람 같았다. 너무도 멋진 일들이 범어사 도량에서 역동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한 것이다. 잠시 짬이라도 나면 카메라 들고 온 경내를 돌아다니며 눈에 보이는 건 무조건 찍었다. 하산하고 싶다는 생각은 온데 간데 사라졌다. 카메라는 어느 덧 석공 스님의 도반으로 자리 잡았다.

 

차분한 정적 작품들에도
상생·역동성 살아 숨셔

 

'나는 작가 이전에 승려’
개인전 그리 중요치 않아

 

 

▲소나무에 의지해 하늘로 향하는 넝쿨의 생명력을 담았다.

 


어느 날, 불교 대중화를 이끈 광덕 스님이 범어사를 찾았다가 ‘철부지 석공’을 보고는 한마디 던졌다.
“사진 찍는 게 그리 좋은가?”
“예, 스님.”
“마음으로 찍어라!”
들고 있던 ‘무(無)’자 화두 대신 광덕 스님의 일언이 들려졌다. ‘눈’으로 찍는 것과 ‘마음’으로 찍는다는 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마음이란 무엇일까? 스스로 던진 물음에 가까이 갈수록 더 좋은 사진을 가질 수 있었다.


어느 사진가가 언급했듯 ‘작가는 풍경, 사물, 인물, 장소를 자신만의 독특한 눈으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대상물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작가의 눈으로 발견하고 읽어내는 것이 사진예술이라는 것이다.


석공 스님도 자신만의 눈으로 만물을 담아내고 있다. 렌즈를 통해 얻은 혜안! 그건 연기였다. 자신만의 화폭에 담아 낸 건 다름 아닌 상생과 생명을 말한 ‘화엄’인 것이다.


석공 스님의 작품 ‘스님, 봄이 왔습니다’를 보는 순간 어느 비구니 스님의 오도송 시 한 편이 스쳐간다.
‘하루 종일 봄을 찾아 다녀도 봄을 보지 못하고(盡日尋春不見春)/ 짚신이 다 닳도록 언덕 위의 구름 따라 다녔네.(芒鞋遍踏頭雲)/ 허탕치고 돌아와 우연히 매화나무 밑을 지나는데 (歸來偶過梅花下)/ 봄은 이미 매화가지 위에 한껏 와 있었네.(春在枝頭已十分)’


석공 스님은 봄을 찾았을까? 그 여하에 따라 사진의 작품 경향도 달라질 것이다.


“저는 아직 길을 걷는 사람일 뿐입니다. 사진이든, 불교든 공부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요. 사실, ‘중’신분으로 내 사진 두고 제 스스로 이런 작품이다, 저런 작품이다 하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그냥, 좋아서 촬영할 뿐이지요. 제 본업이 사진일 수는 없습니다.”


석공 스님이 아직까지 개인전을 갖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진작가’로 명성이 날수록 ‘수행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사진작가 아닌가. 언제가 한 번은 전시회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닌가.


“새는 내일도 날아옵니다. 꽃 또한 내년 봄이면 피어납니다. 대중에게 올해 핀 꽃을 보일 지, 내년에 핀 꽃을 보일 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전시회, 안 열면 또 어떻습니까. 지금, 저 가지에 앉아 있는 새와 마음 한 번 나눴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향후 좀 더 장대하게 펼쳐질 석공 스님의 화엄세계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안주하지 않되, 서두르지 않는 그 마음이면 우리에게 또 다른 세계를 선사해 줄 것만 같다. 석공 스님만의 화폭에 담길 빛으로 그린 그림이 언젠가 우리 눈앞에 멋지게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누군가, 석공 스님의 사진 한 점 보고 마음 한 자락 열수 있다면, 그 또한 중생제도 아닌가!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작품 ‘스님, 봄이 왔습니다.’

 

 

 

▲휴식에 든 9개의 빗자루가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홀로 길을 떠나는 선사가 오버랩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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