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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는 언제나 평안 구축하는 최선의 행동

기자명 성재헌
  • 집중취재
  • 입력 2012.09.17 13:11
  • 수정 2012.09.17 13:16
  • 댓글 0

33. 운거, 어디서든 살만하다

처처가 도량임을 제대로 알아
주어진 상황 맞춰 최선 다해야

 

아만을 뿌리까지 뽑지 못하면
만물 평등한 자리 깨닫지 못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광주 번듯한 아파트에 살던 학우형님네가 나주에 촌집을 마련했단다.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픈 법인데, 이건 배앓이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다. 만사를 제쳐두고 기어코 전라도까지 길을 나섰다. 학우형님, 널찍한 테라스에 거창한 벽난로가 있는 전원주택은 싫단다. 뒷마당 대밭을 매일 들여다보게 쪽문이나 내고, 살던 이들의 냄새 지우기 싫어 비스듬히 기운 흙벽조차 허물지 않을 생각이란다. 나주 곰탕에 밥을 두 그릇이나 말아 후루룩 비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동안 묻어두었던 산골생활에 대한 동경이 가슴을 헤집었다.


“어디가 좋을까? 나주에서 학우형님 영경누나랑 아침저녁 수다 떨며 살까? 응진 스님 곁에서 병풍처럼 두른 설악산을 안방처럼 거닐며 살까? 하동이나 구례로 내려가 포실한 지리산 자락에서 텃밭을 갈며 살까? 장흥으로 가 본격적으로 농사일을 배워볼까?…”


도통 일이 손이 잡히질 않는다. 이런 저런 공상으로 헛바람까지 든 셈이다. 결국 아내를 붙잡고 3년 후에나 가능할 일들을 넋두리처럼 잔뜩 풀어놓았다. 그리고 물었다. “여기서 사는 게 좋을까, 저기서 사는 게 좋을까?”


그러자 아내 왈. “이번 비에 부엌 쪽 벽이 축축이 젖었어. 미장을 새로 하든지, 방수페인트를 바르든지 어떻게 좀 해봐!”


KO 펀치다. 아내의 한 방에 머쓱하게 웃고 얼른 일어섰다. ‘경덕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홍주(洪州) 운거산(雲居山)에 주석했던 도응(道膺)선사는 유주(幽州) 옥전(玉田) 사람으로 성은 왕(王)씨이다. 25세에 범양(范陽) 연수사(延壽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취미산(翠微山)으로 가 도를 물었다. 그곳에서 3년을 지내다가 예장(豫章)에서 온 행각승이 동산(洞山) 양개(良价)선사의 법석을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소리를 듣고는 동산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양개선사의 뜻에 계합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참을 보이지 않던 제자가 나타나자 스승 동산이 물었다.

 

“어디를 갔다 오느냐?”
“산을 돌아다니다 옵니다.”
“어느 산이 살만 하던가?”
“어느 산인들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처처(處處)가 도량(道場)이라. 안락한 마음자리를 얻은 납자에게 때와 장소가 문제될 리 없다. 만일 때와 장소에 따라 있다 없다하는 평안함이라면 그건 인연의 그림자이지 불조(佛祖)께서 밝히신 열반과 해탈은 아니다. 제자의 성취에 스승 동산은 꽤나 기뻤을 것이다. 허나 동산은 노파심이 절절한 선지식이었다. 공(空)을 깨달은 자리에 행여 아만(我慢)이라는 불청객이 자리 잡았을까 염려스러워 흐뭇함을 감추고서 제자를 두드려보았다.

 

“그렇다면 온 나라가 그대에게 점령당한 셈이군.”


아마 동산은 콧방귀를 더해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을 게다. 왜냐하면 물의 깊이를 알아보려면 옷이 젖는 걸 감수하고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는 게 제일 빠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증상만(增上慢)이 있는지 점검해보려면 자존심을 건드려보는 게 제일 빠르다. 허나 도응은 고개를 숙이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의 점검으로 그칠 동산이 아니었다. 억눌러보아도 도응이 흔들리지 않자 이번엔 잔뜩 띄워서 흔들어보았다. “그러면 그대는 들어갈 길을 얻었구나.”


들어갈 길을 얻었다는 것은 곧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니, 생애를 걸고 불문(佛門)에 투신한 자에게 이보다 듣기 좋은 말이 있을까? 허나 스승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도응은 도리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씀드렸다.

 

“길이 없습니다.”
“길이 없다면 어떻게 이 노승과 만나겠는가?”


두 번의 점검으로 그칠 동산이 아니다. 길이 없다는 건 곧 깨달음을 얻을 방법조차 없다는 의미이다. 동산은 자신을 깨달은 자로 설정하고 “깨닫지 못한 네가 어떻게 깨달은 나를 알아보겠느냐” 하고 반문한 셈이다. 그러자 도응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길이 있다면 화상과 몇 생은 떨어져 지내야 할 것입니다.”


동산의 진면목(眞面目)을 보지 못했다면, 동산의 뜻에 깊이 계합하지 못했다면, 아집(我執)과 아만(我慢)을 뿌리까지 뽑아내지 못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한 마디이다. 만물이 평등한 자리[空]를 깨닫고, 이것과 저것의 차별이 헛된 생각의 장난이었음[無相]을 깨달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게다. 이것저것 바라며 이리저리 선택하느라 애를 태우는 짓을 그만둔[無願] 도응이기에 “어딘들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을 것이다.


그럼, 처처가 도량인 도응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만사에 손을 놓고서 되는대로 살았을까? 선사들이 누누이 강조한 무위(無爲)와 무사(無事)를 게으름이나 무책임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위(無爲)란 헛된 생각을 하지 않고 욕망과 분노에 시달리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결코 만사를 건성건성 넘긴다는 말이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 맞춰 언제 어디서나 평안을 구축하는 최선의 행동을 하라는 것이지, 만사를 대강대강 처리하라는 말이 아니다. 어딘들 살만하지 않겠냐고 한 도응의 그 후 행동거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느 날 도응이 장을 담그고 있자 동산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가와 물었다.


“뭐하냐?”
“장 담급니다.”
“소금을 꽤나 쓰네.”


도응이 소금을 팍팍 쳤나보다. 옛날엔 소금 값이 금값이었으니, 살림살이를 주관하는 동산으로서는 걱정이 되었을 게다. 웬만하면 스승의 비위를 맞춰 아껴 쓰는 시늉이라도 할 법한데, 도응은 도리어 소금을 한 움큼 더 넣으면서 말했다.


“저으면 다 녹습니다.”
이쯤 되면 말을 꺼낸 동산이 머쓱했을 게다. “얼마나 좋은 맛을 내겠다고….”
휘휘 젖다가 장이 묻은 손가락을 쭉 빨아본 도응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딱 됐습니다.”


적당(適當), 알맞게 처리한다는 뜻일 게다. 시멘트는 사다 놓은 것이 세 포나 있고, 얼른 방수페인트를 사러가야겠다. 주방 벽지가 뽀송뽀송해지도록 사나흘 애를 써야겠다. 아내 입에서 “딱 됐네” 소리가 나오게 말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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