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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조사(二祖寺)

기자명 법보신문

달마대사의 선 씨앗을 한 송이 꽃으로 피우다

스승 가르침 받기 위해
자신의 팔마저 잘랐던
혜가의 구법열정 남아

 

 

▲혜가 스님이 주석했던 이조사는 소림사에서 도보로 2시간 걸린다. 달마대사에게 전법게를 받은 혜가 스님은 이조사를 떠나 임종 때까지 전법의 길을 걸었다. 사진은 이조사 입구.

 

 

2조 혜가대사가 계셨던 이조사는 소림사에서 도보로 두 시간 걸리는 산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가 작아 이조암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관광코스로 개발이 되어 소실산 풍경구 내에 이조사로 가는 케이블카가 따로 놓여 있어 편리한데, 그 산세가 기품이 있고 듬직하다.


이조사는 발우봉에서 뻗어 내린 중간 지점의 명당으로 신기하게도 물이 풍부하다. 이조암, 소림사, 달마 동굴 등은 모두 크게는 중국의 오악(五岳) 중 하나인 숭산에 자리하고 있다. 숭산은 태실봉과 소실봉으로 나누어져 있고 소실봉 안에 다시 두 개의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하나는 오유봉이요 하나는 발우봉이다. 달마 동굴은 오유봉 아래에 있고 이조암은 발우봉 아래에 있으니 달마 동굴에서 이조암으로 가려면 반드시 중간 지점의 소림사를 거쳐야 한다. 즉, 소림사를 중심으로 달마대사가 계셨던 토굴과 그의 제자 혜가가 계셨던 토굴이 대칭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조사로 가는 케이블카.

 


이조암으로 가는 길은 산 전체가 온통 도토리 열매 천지다. 도토리가 열리는 떡갈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가 꽉 찼다. 한국 같으면 도토리 줍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중국 사람들은 묵을 쑤어 먹을 줄 모른단다. 같이 가던 한국 사람이 농담 삼아 말한다.


“여기 와서 묵 장사하면 돈 벌겠다. 도토리 주어서 한국으로 수출하고 싶다.”


아무튼, 숭산은 우리나라 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억새풀, 고들빼기, 씀바귀 등 이름 맞히기를 해가며 열심히 걷다보면 좁은 길 한 모퉁이에서 일주문이 반긴다. 일주문에서 조금 더 위쪽 공터에는 사찰 경내지가 아닌데 별도의 혜가대사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혜가가 법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팔을 자른 뒤에 스승 달마대사가 이곳에서 치료해 주었다는 전설적인 땅이라고 말한다. 제자 혜가가 구법단비(求法斷臂)한 뒤에 이쪽에 와서 잠시 기거했다는 이야기다.

 

 

▲달마대사가 신통으로 팠다는 우물.

 


이조사에 있어서 달마대사의 흔적은 우물에서도 나타난다. 이조사 앞마당에는 각기 서로 다른 맛이 나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들은 달마대사가 신통으로 팠다고 한다.


혜가가 “스승님 여기 물이 안 납니다” 하니 달마대사가 짚고 있던 주장자를 여기저기 네 군데 내리치니 물이 펑펑 솟아올랐는데 신기하게도 그 물맛이 단맛, 쓴맛, 신맛, 매운맛으로 다 다르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르나 이조사는 지금도 남아있는 이 우물들이 명물임엔 틀림이 없다.


이조사에 들어서서 곧장 큰 법당으로 가 참배하면서 불전을 놓는데 주지(住持)로 보이는 젊은 스님이 나의 행위가 신심 있어보였는지 이조사의 물맛을 보라며 소매를 끈다. 까마득한 깊이의 우물물을 두레박으로 길러내어 바가지에 물을 떠주면서 물맛이 어떠하냐고 묻는다. 4곳의 우물물 맛을 다 보았는데 감각이 둔한 탓인지 그 맛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이조사 법당에 주존으로 모셔진 혜가 스님.

 


필자는 법당 주존으로 모셔져 있는 2조 혜가대사, 뜰 앞의 아름드리 측백나무 두 그루, 소박하다 못해 헛간 같은 주지 스님의 방, 무술 흉내를 내는 철부지 동자승을 보면서 2조 혜가대사의 가풍은 때로 엄중하며 때로 소탈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한 점은 그의 행적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혜가는 본래 신광(神光)이라는 법명을 가진 수행자였는데 당시 도교와 유교의 모든 경교(經敎)를 섭렵하였으나 ‘마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해 방황하였다. 출가한 지 10여년 쯤, 오유봉 아래 동굴에서 9년간 면벽수행하고 있다는 달마대사를 소문으로 듣고 찾아갔다. 신광의 나이는 막 40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벽관마라문(壁觀婆羅門) 달마대사는 신광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여러 차례 퇴짜를 맞았는데 하루는 본 처소로 돌아와 크게 반성하였다.


“옛 사람이 도를 구할 때는 뼈를 부수어 골수를 끄집어내고, 피를 뽑아서 굶주린 이를 구제하고, 머리카락을 진흙땅에 펴서 부처님을 걷게 하고, 벼랑에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육신을 보시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신광은 스스로 구도심이 부족한 것을 한탄하고 다음날 저녁, 다시 찾아갔다.

 

달마대사에 전법게 받아
선종 2조로 40년간 교화
말년엔 승단 모함에 순교

 

 

▲이조사는 규모가 작아 이조암으로도 불린다.

 


역시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면벽을 하고 있었고 신광은 굴 밖 마당에서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그날 밤 마침 눈이 펑펑 내려 작설하였는데 새벽녘이 되자 허리춤까지 차올랐다. 신광이 인기척을 내자 그제야 달마대사가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 어찌 작은 공덕과 경솔한 마음으로 법을 구하려 하는가?”


하룻밤 눈밭 위에 있었다 해서 대수로운 일이 아니란 뜻이다. 신광은 불퇴전의 신심을 일으켰다. 호신용으로 갖고 다니던 칼을 뽑아서 왼팔을 잘라 달마대사에게 받쳤다. 구법단비의 자연 조각품이 소림굴 안에 있다고 이미 앞쪽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얼마나 성스러운 모습인가! 순간 법이 전해진 것이다. 마음의 보배 구슬을 눈밭에서 전했다는 이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소림사 큰 절 경내에 설인심주(雪印心珠)라는 전각이 따로 있다.


달마대사는 그제야 신광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너의 이름을 혜가(慧可)라고 하리라.”
어느 날, 혜가는 스승에게 물었다.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가르쳐 주십시오.”
달마대사의 대답은 엉뚱했다.
“부처님의 법인은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니라.”
“스승님, 제 마음이 편치 못하니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그 불안한 마음을 내놔 봐라. 내가 편안하게 해주리다.”
온몸을 더듬거리며 마음을 찾던 혜가가 한참 만에 말했다.
“멱심불가득(覓心不可得), 아무리 찾아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스승의 간단명료한 안심법문(安心法門)이 설해졌다.
“네 마음은 이미 편안해졌노라.”


제자는 화답하였다.


“오늘에야 모든 법이 공적하고, 보리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이 법을 어떻게 전해야 하는지요?”
“나의 법은 이심전심(以心傳心) 불립문자(不立文字)니라.”


이후 혜가는 스승 달마대사를 6년 정도 모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스승님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외식제연(外息諸緣)하고 내심무천(內心無喘)하라. 마음이 장벽과 같아야만 가히 도에 들어가느니라.”


달마대사의 제자가 여럿 있었지만 혜가는 단연 으뜸이었다. 한번은 제자들을 모아 스스로의 깨달은 경지를 발표하게 하였는데 거기서 혜가는 크게 인정을 받는다.


도부가 “진리는 문자에 집착하는 것도 아니고 문자를 떠나가는 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대사는 “너는 나의 가죽을 얻었다”라고 답했다.


비구니 총지가 “진리는 불국토를 잠시 보는 것과 같습니다. 한 번은 볼 수 있어도 두 번은 다시 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대사는 “너는 내 살을 얻었다”라고 답했다.


도육이 “사대(四大)는 본래 공(空) 합니다. 오온(五蘊)도 실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터득할 법도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달마대사는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라고 답했다.


마지막으로 혜가의 대답 차례였다. 혜가는 말 대신 태연히 앉아만 있었다. 이 모습을 본 달마대사는 “과연 그러하다”라면서 극찬하였다. 그리고는 “너는 나의 골수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비로소 혜가는 스승으로부터 의발(衣鉢)과 ‘능가경’을 전해 받는다.


“내가 본래 이 땅에 온 것은 법을 전하여 어리석은 중생을 구하려 함인데 한 송이 꽃이 되어서 다섯 잎이 달려 열매가 자연히 익으리라.”


이와 같은 전법게를 받고 혜가는 서기 593년 107세 임종을 맞을 때까지 끊임없는 교화의 길을 간다. 2조 혜가대사는 스승이 돌아가시고, 머물렀던 이조암을 떠난다. 당시 동위의 수도 업도에 가서 절을 열고 많은 포교를 하는데 그곳 스님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 특히 도항이라는 스님의 방해가 심했으나 슬기롭게 이겨나간다.

 

 

▲이조사 주지스님 방. 소박하기 그지없다.

 


혜가대사는 업도에서 무려 40년간을 교화하다가 당시 북주의 무제 때 단행된 서기 574년 대폐불(大廢佛)을 피해 서주의 황공산으로 옮겨간다. 그때 나이가 90 전후였는데 어렵사리 몸을 숨기며 비승비속으로 살던 중에 3조가 될 제자 승찬을 만난다. 폐불 시기가 지나자 혜가대사는 제자 승찬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업도로 나가 포교에 매진하였으나 결국 같은 승복을 입은 스님들, 특히 변화법사의 모함에 걸려 재상 적중 간에 의해 순교 당한다. 이조사 경내를 돌아보면서 혜가대사의 마지막 임종을 되새기자니 꼭 나의 일 같아서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예나 지금이나 시샘과 비방으로 만연한 불교 교단이여!


때늦은 점심요기를 때우느라 절 아래 값싼 야채 만두집에 앉아 이런저런 세상 얘기를 듣는다.


우학 스님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회주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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