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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신찬, 스승을 일깨우다

기자명 성재헌

마음 성품은 물드는 법 없이 본래가 원만

“옛 종이 백년 뚫어봤자 못나가”
신찬, 경만 읽는 은사에 쓴 소리


육근 벗어나면 본체가 드러나
허망한 인연만 여의면 부처님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등유 한 드럼에 27만원이란다. 여름 지난지가 언제라고, 덜컹 겨울걱정이 앞선다. 지난해 거금을 들여 창호를 교체하고 천정에 단열재를 부착해보았지만, 겨울을 보낸 소감은 에구 머니~ 였다. 돈이 들어가도 일정 소득이 있었다면 덜 억울했을 게다. 내복을 껴입고 방안에서 외투까지 걸치고도 기름을 열 드럼이나 썼으니, 팡팡 돌아가는 보일러 소리가 뒷골목에서 삥 뜯는 깡패의 협박처럼 들려 겨우내 불쾌했다.


그래도 방법은 있겠지 싶어 인터넷을 뒤졌다. 그러다 환경운동가들이 앞장서서 보급하고 있는 로켓스토브 원리를 이용한 난로를 발견했다. 적은 비용으로 손수 제작할 수 있고, 작은 연료로 고효율의 열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고, 나무를 거의 완전 연소시켜 환경오염을 최대한 줄여준다고 하니, 맘에 쏙 들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한국인 취향에 맞는 구들장 형식의 로켓메스히터가 좋겠다 싶었다. 해서 큰 맘 먹고 직접 제작에 나섰다.


벽부터 통째로 허물었다. 그리고 스파이럴닥터 12m, 모래 한 차, 벽돌 천 장, 시멘트 네 포를 구입하고, 산에 가 황토를 열 포대 퍼왔다. 망치질도 못할 것 같은 샌님이 우당 쾅쾅 요란을 떨고 종일 벅벅 시멘트를 비벼대니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난리다.

 

“이런 일 해봤어?”
“아니요.”

“아이고, 기냥 연탄보일러 놓지 우짤라고 그래여~”


그렇게 동네 분들의 뜨거운 관심과 따가운 눈총 속에서 보름간의 노동을 끝냈다. 그리고 드디어 아궁에 불을 들이는 날이었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거, 참내~” 하며 혀를 차던 건넛집 조씨 할아버지가 제일 먼저 들렀다.


“다 만들었어?” “예.”
“불 때?” “예.”
“잘 들어?” “예.”
“어데 함 봐.”

숙제검사를 받는 학생처럼 조마조마했다.

“음……”


말없이 한참 아궁이만 들여다보던 조 영감 슬그머니 나가더니 곧바로 앞집 성당 할배를 데리고 왔다.

 

“이것 좀 봐. 참 신통하네. 아, 나무를 위에서 꽂았는데 불이 위로 안 올라오고 아래로 쭉쭉 빨리네.”

“어데 함 봐.……희한하네. 연기도 안 나네. 이거 방에다 놔도 되겠는데.”


조 영감과 성당 할배의 활약으로 동네 사람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족히 몇 십 년은 장작을 때고 산 경력자들이 하나같이 말했다.

“참 신통하네.”


물은 아래로 내려가고, 불은 위로 올라가는 법이다. 순리를 역행(逆行)하면 손해를 입고 화를 당하기 마련이다. 거꾸로 타는 난로처럼 역행하고도 더 큰 이익을 얻는 경우는 드물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가 아들을, 스승이 제자를, 어른이 아이를 이끄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드물긴 하지만 그 순리를 거스르고도 이익과 복을 초래한 일이 역사에 있었다. 고령사(古靈寺)에 주석했던 신찬(神贊) 선사가 그 예이다.


신찬선사는 대중사(大中寺)에서 출가한 분이었다. 총명하고 반듯했던 신찬은 은사스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제자였다. 허나 은사의 각별한 보살핌에도 헛헛함을 채우지 못했던 신찬은 행각을 나서 백장산(百丈山)을 찾아갔다. 그리고 회해선사로부터 본래 평등한 자리의 금강처럼 견고한 평안을 맛보고는 곧바로 본사로 돌아왔다. 아끼던 제자가 간만에 얼굴을 보이자 반가움에 섭섭함을 섞어 은사가 물었다.

 

“그래, 내 곁을 떠나더니 밖에서 무엇을 성취했느냐?”
“아무 것도 얻은 게 없습니다.”


은사는 그를 다시 곁에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가 목욕을 하면서 신찬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신찬이 등을 문지르면서 말했다. “법당은 참 멋진데 부처님이 성스럽질 못하군요.”
은사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한마디 덧붙였다. “부처님이 성스럽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방광은 하네요.”


승가의 스승과 제자 간 예의는 속가보다 엄하다. 그런 당돌한 언행에도 꾸짖거나 내쫓지 않고 여전히 곁에 두었으니, 그 은사의 속정이 속가의 부자간보다 더했나 보다. 그러나 신찬의 역행(逆行)은 거기서 그치질 않았다. 어느 날 은사가 창가에서 경을 읽는데, 벌이 한 마리 들어왔다가 창호지에 머리를 박으며 나가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스승 곁에서 시중을 들다 이를 본 신찬이 말했다. “세계가 저처럼 넓은데 거기로 나갈 생각은 않고 창호지만 뚫고 있으니, 나귀 해[驢年]에나 나가겠군.”


그리고 게송을 한 수 읊었다.


텅 빈 문으로 나갈 생각은 않고/ 창에만 몸을 던지니 참 바보구나/ 그런 옛날 종이 백년을 뚫어봐라/ 언제 빠져나갈 날이 있겠냐.


자신을 꾸짖는 소리임을 은사가 모를 리 없다. 목욕탕에서의 일을 참았던 은사는 보던 경전을 덮어버리고는 작정을 하고 물었다. “이리저리 쏘다니면서 도대체 누굴 만난 거냐? 앞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요상한 말만 늘어놓는구나.”


그러자 신찬이 정중히 말씀드렸다. “저는 백장 화상 덕분에 쉴 곳을 얻었습니다. 이제 자비로운 은덕에 보답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러자 은사가 대중에게 고하여 공양을 장만하게 하고는 제자인 신찬에게 설법을 청하였다. 신찬은 법좌에 올라 당당한 목소리로 백장 문중의 기풍을 제창하였다.


“신령스런 광명이 홀로 빛나 육근과 육진을 아득히 벗어나면 본체가 드러나 참되고 영원하며 문자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성품은 물드는 법이 없어 본래 스스로 원만하고 완성되어 있으니, 그저 허망한 인연만 여의면 그대로 여여한 부처님입니다.”


은사는 제자의 설법에 그 자리에서 깨닫고 감탄하였다. “늘그막에 이런 지극한 설법을 들을 줄 누가 알았으랴?”
놀라운 일이다.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가 쉽지, 제자가 스승을 가르치기는 어렵다. 제자가 스승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가 쉽지, 스승이 제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 어렵다. 이런 어려움에 불구하고 스승은 해탈과 열반이라는 이익과 홍복을 성취하고 제자는 보은(報恩)의 도리를 완수했으니, 거꾸로 타들어가는 로켓스토브 화덕만큼이나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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