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의상과 십대제자
17. 의상과 십대제자
  • 김상현 교수
  • 승인 2012.10.0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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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에 밝힌 화엄의 등불, 신라를 두루 밝히다

중국에서 귀국 후 부석사 창건
화엄대교 전할 복된 터전 마련

 

의상 스님의 빼어난 전교 활동
당나라는 물론 일본에도 영향

 

 

▲676년에 의상 스님이 태백산에 창건한 부석사 전경. 스님은 이곳에서 해동화엄의 시원을 열었다.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부처님의 후신(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성인(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이다. 최치원이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여러 꽃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구나”라고 찬양했던 뜻도 여기에 있다.


의상은 676년(문무왕 16)에 태백산 부석사를 창건함으로서 화엄대교를 전할 복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절을 중심으로 전개한 그의 전교 활동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에까지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일본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의상이 화엄교를 전파하고 있을 때, 그를 공경한 국왕이 노비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던 일과 의상이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들은 진정(眞定)이라는 가난한 젊은이가 그의 문하로 달려가 머리를 깎았던 일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의상이 태백산에서 밝힌 법등(法燈)이 신라 사회를 두루 비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당나라에 있던 동문 법장(法藏)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하여,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롭게 하신다고 하오니 기쁨은 더욱 큽니다. 이로써 여래(如來) 멸후(滅後)에 불일(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법륜(法輪)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다. 법장의 편지를 통해서도 활발했던 의상의 전교 활동을 알 수 있다.


의상은 태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태백산에서 밝힌 하나의 등불은 열로 백으로 불어나고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는 무진등(無盡燈)이 되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는 참으로 큰 인연. 이로 인해 진리가 빛날 수 있기에.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 있어도 참다운 선지식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 있어도 발심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법. 그러나 의상은 그 이름만을 훔친 스승이 아니었고, 그 제자들 또한 배움만을 취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신라의 화엄교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부석사에서,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화엄을 강의했다. 어떤 때는 그의 저서 ‘법계도(法界圖)’를,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했고, 법장의 ‘탐현기(探玄記)’ 20권을 풀이하기도 했다. 40일을 강설한 경우도 있고, 장장 90일 동안 강의에 전념한 경우도 있다. 그의 가르침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고,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진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깊은 뜻을 갖고 있었으며, 우리들 오척(五尺)의 범상한 몸, 이것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임을 깨우쳐 주려는 희망을 갖고 있었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 물어 올 때면, 의상은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살핀 다음에 의문 나는 점을 풀어 주되,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자주 훈계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


의상은 법장의 ‘탐현기’ 20권을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亮元), 표훈(表訓) 등의 제자에게 각각 5권씩 나누어 강의하게 한 적이 있는데, 이에 앞서 그는 10일 동안 문을 닫아걸고 자신이 스스로 탐구·검토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탁본으로 인하여 탁이 나오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니, 각기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라.”


제자들 또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스승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배운 바를 부지런히 기록했으며, 또한 실천에 옮겼다. ‘지통기(智通記)‘와 ‘도신장(道身章)’ 등은 제자 지통과 도신이 각각 스승의 강의를 기록하여 정리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승의 말씀만을 기록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스승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울 때, 표훈과 진정은 각각 자기의 견해를 적어 스승으로부터 옳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지통은 태백산의 미리암굴(彌理岩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아,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 이를 말씀드려, 이미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인정받아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전해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훗날에도 계승되어 의상의 몇 대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법계도’를 연구하여,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원통기(圓通記)’ 등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고려 때에는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기도 했다.


의상에게는 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십대제자(十大弟子)는 더욱 유명했다. 십대제자를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부르기도 했고, 모두 아성(亞聖)으로도 불렸다는 점에 유의하면, 모두 보통의 제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에게는 십대제자가 있었다. 보개여래(寶蓋如來)의 후신으로까지 불리던 의상이었기에 그에게 십대제자가 있었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의 십대제자는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이다. ‘송고승전’ 중의 의상전에서는 지통(智通), 표훈(表訓), 범체(梵體), 도신(道身) 등을 등당도오자(登堂都奧者)라고 하면서, 이들은 모두 큰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유라조(迦留羅鳥)와도 같다고 했다. 그리고 최치원은 ‘법장화상전’에서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을 특별히 의상의 사영(四英)이라고 했다. ‘삼국유사’에는 도신(道身)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은 그가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 ‘도신장(道身章)’ 2권을 남긴 것으로 확인된다. 이 책에 지엄과 의상의 문답, 의상과 그 제자들과의 문답 등이 인용되어 있는 것으로도 도신이 의상의 직제자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통(智通)은 이량공(伊亮公)의 종이었는데, 7살 661년(문무왕 원년)에 출가했다. 이 해는 의상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던 때다. 낭지(朗智)의 제자였던 지통은 훗날 의상의 처소로 옮겨 화엄교학을 배웠다. 진정은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그의 효성은 남달랐던 젊은이였다. 이 젊은이가 홀어머니와 이별하고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고 공부하여 의상의 십대제자에 포함되었다. 상원은 부석사 사십일회(四十日會)에 참석하여 강의를 들었다. 능인은 안동의 봉정사(鳳停寺)를, 표훈은 금강산의 표훈사(表訓寺)를 각각 창건했다. 표훈은 경덕왕(742-765) 때에 활발하게 활동을 했는데, 김대성에게 화엄의 3종 삼매를 가르쳐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하기도 했다. 오진(悟眞)은 안동의 학가산 골암사(寺)에 있으면서 밤마다 팔을 뻗어 부석사의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교단 조직과 체계적 교육으로
십성이라 불리는 제자들 길러

 

신라 엄격한 신분사회임에도
신분 차별없는 평등교단 구현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골품제도가 당시 사람들의 사회생활 전반을 규제하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출신성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특권과 제약이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의 문하에는 신분이 문제되지 않았다. 지통(智通)은 노비 출신이었고, 진정(眞定)의 신분도 귀족은 아니었다. 의상은 신분의 평등을 주장했다.


“우리들의 불법(佛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함께 균등하고 귀하고 천함이 같은 도리를 지니고 있다.”


의상은 또 제자들에게 오체불(吾體佛)을 강조하기도 했다. 지금 이 오척(五尺) 범부의 몸이 곧 법신(法身) 그 자체라는 것이다. 의상은 “금일 내 오척의 몸을 이름 해서 세간(世間)이라 하는데, 이 몸은 허공 법계에 두루 가득 차 이르지 않는 곳이 없다”고 했고, 또 “내 범부 오척의 몸이 삼제(三際)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무주(無住)라 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 몸은 연(緣)으로 된 오척이므로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가 되고 많은 것이 필요할 때는 많은 것이 된다”고 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기사상(性起思想)에 토대한 것으로 인간의 존엄을 강조한 것이다.


의상법사가 702년에 돌아간 후, 대개 8세기 전반까지는 법사의 직제자들에 의해 화엄교학이 계승·전파되었다. 그런데 8세기 중엽쯤에는 손제자 신림(神琳)이 부석사의 화엄학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곧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부석사에 운집한 천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화엄학을 강의했다. 8세기 중엽 당시 부석사의 융성을 짐작할 수가 있다. 법사의 십대제자가 각기 나누어 전한 화엄의 법등은 그 숫자가 크게 불어났고, 몇 대를 거치면서도 꺼질 줄 모르는 것이었다.

 

▲김상현 교수

이처럼 교단적인 조직과 제자 교육을 통한 법사의 전교 활동은 원효와 비교해 봐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송고승전’에는 의상의 전교를 이렇게 평했다.


“의상의 강수(講樹)가 꽃을 피우고, 담총(談叢)이 열매를 맺었다.”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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