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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대안, 자신을 길들이다

기자명 성재헌

부처 알고 싶다는 것은 소 타고 소 찾는 꼴

억세고 추한 검정소도 소지만
순하고 귀한 하얀 소만은 못해

 

당신이 본래 부처라고 한 말은
당장 붓다처럼 행동하라는 뜻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추석이다. 많은 사람과 한자리에 모이는 명절이면 늘 듣는 꾸중이 한 가지 있다.

 

“너, 아직도 담배 피우냐.”


살을 덧붙이면 “불교공부 한다는 놈이 그것 하나 절제하지 못하냐”는 말씀이고, “백해무익한 담배도 끊지 못하면서 꿀처럼 달콤한 욕망과 폭풍처럼 거센 분노를 어찌 다스리겠냐”는 말씀이니, 사무치는 부끄러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골백번도 더 다짐했을 게다. 허나 번번이 하루나 이틀을 넘기지 못했고, 까짓것 참아본 게 사흘이다. 올 설에도 그랬다.


“올해엔 반드시 금연하리라” 다짐하고 사흘을 버텼다.

 

그러나 나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 황악산 찬바람에 볼 살이 얼얼해 정신을 차려보니 담뱃가게 앞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 달려온 곳이 담뱃가게라니, 비참했다. 게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지갑이 들어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비몽사몽간에 담뱃값까지 챙겼던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로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김유신은 천관녀의 집 앞으로 이끈 애마의 목을 베어버렸다는데, 대장부가 한번 다짐을 했으면….”


그러나 정작 내가 선택한 행동은 드르륵 하고 담뱃가게 문을 연 것이었다. 그리고 새벽 댓바람에는 좀체 나오기 힘든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저씨, 담배 두 보루 주세요.”


담배가 유해하다는 건 알기도 쉽고, 설명하기도 쉽다. 하지만 정작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걸 부끄러워하기는 쉽다. 하지만 부끄러움이 사무치고도 다시 범하지 않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알면서도 범하는 잘못이 어디 담배뿐일까?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생각이야 천번 만번 지당하고, 말이야 청산유수 잘도 풀어놓는다. 허나 정작 문젯거리에 봉착하면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느라 머릿속이 분산하고 희로애락의 파도에 쓸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실상이니, 일치하지 못하는 행동으로 지극히 합당한 생각과 말마저 손가락질당할 지경이다. 그래서 붓다께서 말씀하셨나 보다.


“강인한 적을 물리치는 자보다 자신을 굴복시키는 자가 더 용감한 사람이다.”


붓다의 가르침, 아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고, 설명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행동하기란 쉽지 않다. 붓다의 가르침에 귀의하고도 여전히 길들여진 습성대로 행동한다면, 아무리 거창한 깨달음을 얻는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한마디로 그런 깨달음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러니,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무익한 행동을 교정하고 유익한 행동을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修行]이 곧 참된 깨달음으로 가는 길[道]이라 하겠다.


‘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대안(大安)선사는 복주(福州) 사람으로 성은 진(陳)씨이다. 황벽산(黃檗山)에서 공부하면서 계율을 철저히 익혔지만 올바른 지도를 받지 못하면 극한 노력도 허사임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리고 홍주(洪州)의 백장산(百丈山)으로 찾아가 회해선사에게 절을 하고 물었다.

 

“학인(學人)이 부처를 알고 싶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회해선사는 한심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꼭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꼴이군.”


자신이 본래 붓다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대안은 넘치는 기쁨을 뒤로 하고 한발 더 나아가 물었다.

 

“알고 난 뒤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해선사는 당연한 걸 뭣 하러 묻냐는 식으로 대답했다.

 

“소를 찾았으면 타고 집으로 가야지.”


대안선사는 무척이나 꼼꼼하고 치밀한 분이셨나 보다. 애태우던 소도 찾고 돌아갈 목적지도 분명했지만, 재차 도중(道中)의 일을 여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처음부터 끝까지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까?”


작은 깨침에도 쉽게 덤벙거리고 들뜨는 여느 납자와는 달리 침착하게 하나하나를 점검하는 대안의 모습이 꽤나 기특했을 게다. 회해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친절하게 말씀을 덧붙이셨다.


“목동이 작대기를 들고 지키면서 남의 논밭을 삐대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대안 스님은 이때부터 다시는 밖으로 깨달음과 해탈을 찾아다니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회해선사 회상에서 같이 공부하던 영우(靈祐)선사가 위산에 절을 짓자 그곳으로 가 함께 살았다. 그러다 영우 선사가 입적하자 대중의 청에 못 이겨 주지가 되었다. 대중과 더불어 농사를 지으며 늘 말없이 지내던 스님이 상당(上堂)하여 말씀하셨다.


“다들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여러분은 저에게서 무엇을 찾습니까? 만일 부처가 되고 싶다면 여러분 스스로가 부처입니다. 그런데도 목마른 노루가 아지랑이를 쫓듯 엉뚱한 곳으로만 헐레벌떡 달려가니 언제 상응(相應)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부처가 되고 싶다면, 그저 허다한 잘못된 견해와 인연에 얽매이는 짓과 허망한 생각과 나쁜 지각과 더러운 욕망 따위의 청정하지 못한 중생심만 없으면 됩니다. 그러면 그대들이 바로 발심하자마자 바르게 깨달은 부처인데, 다시 어디에서 따로 찾습니까? 저는 위산에서 30년을 지내며 위산에서 밥을 먹고 위산에서 똥을 쌌지만 위산의 선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마리 검정 암소를 돌보았을 뿐입니다. 그 놈이 풀밭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끌어내고 남의 논밭을 삐대면 즉시 채찍으로 조복했는데, 이것이 오래되자 요 기특한 놈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뭡니까. 그래서 지금은 흰 소로 변해 항상 눈앞에 있는데, 하루 종일 드넓은 벌판에 풀어놓고 쫓아도 가지 않습니다.”


억세고 추한 검정 소도 소는 소다. 하지만 순하고 귀한 하얀 소만은 못하다. 수많은 선사들이 “지금 이대로 당신이 본래 부처다”고 설파한 것은 “부처가 되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지금 당장 붓다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이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점철된 못난 행동들까지 정당화시킨 말씀이 아니다. 중생이 본래 부처라지만 ‘부처다운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부처는 끝내 중생노릇을 면치 못한다.


선사(禪師), 그들은 자신이 본래 붓다였음을 인정하고, 붓다답게 한 걸음 한 걸음 당당하고 바르게 걸어, 늘 푸근하게 반기는 부처님이 계신 고향집으로 돌아간 자들이다. 휘영청 밝은 달빛 밟고 고향 가는 길, 담배부터 끊어야겠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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