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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기자명 법보신문

비운의 공주, 조선왕실 첫 여성출가자 되다

이방원이 꾸민 ‘왕자의난’에
한순간 오빠 둘·남편 잃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1399년, 조선의 공주가 출가했다. 왕이 직접 딸의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유교적 이념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만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하들 모두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다. 씻을 수 없는 아픔을 가슴에 안고 속세를 등지려 하는 공주의 기구한 삶이 가엾고 애달팠다.


태조 이성계의 딸 경순공주. 그녀는 조선 최초의 왕실 출가자다. 어머니를 여읜지 2년 만에 왕위찬탈의 희생양으로 두 오빠와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비운의 공주이기도 하다. 경순공주의 출가는 그녀의 돈독한 불심의 발로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 이성계의 간곡한 권유에서 비롯됐다.


“미안하다, 이 모든 것이 내 부덕의 소치구나.” 바닥에 떨어진 공주의 머리카락을 보며 이성계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아들들과 사위를 일시에 잃고 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출가시키는 심정은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열고자 손에 피를 묻힌데 대한 업보인가 싶었다.


경순공주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활기찬 성품으로 시집간 후에도 자주 궁을 드나들며 왕을 기쁘게 했던 사랑스러운 막내 딸. 그 밝은 성품을 유난히 아끼고 예뻐했었는데 이제 영롱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그 빛을 잃었고 수척한 얼굴에는 일말의 생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할까. 파르라니 드러난 딸의 맨머리가 가슴을 헤집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


이성계가 창건한 새나라 조선은 건국 7년 만에 혈육 간 죽고 죽이는 최악의 사태로 얼룩졌다. 다섯째 아들 방원이 꾸민 ‘왕자의 난’으로 아들 둘과 사위가 죽었고, 경순공주는 두 오빠와 남편을 잃었다. 자신이 아닌 배다른 동생 방석이 세자가 된 것에 분노해 일으킨 난이었다. 기필코 왕이 되겠다는 그 확고한 의지가 결국 형제들을 향한 칼날로 돌아온 것이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후 방원은 아버지를 찾아와 “조선을 뒷받침한 내가 아니라 아무런 공도 세우지 않은 어린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방원이 과거에 급제할 정도의 학문실력과 무예를 고루 갖춘 뛰어난 자식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너무 강한 성격과 권력 의지를 심히 우려하는 중신들이 적지 않았고, 다른 자식들의 안위도 염두에 둬야했다. 게다가 이성계는 세자 책봉에 있어 무엇보다 신덕왕후의 의사를 고려하고자 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두 번째 왕후다. 첫 아내인 신의왕후가 조선 건국 전 병으로 죽어 조선의 첫 국모가 됐다. 8남 3녀의 자식 중 이방원을 포함한 5남 2녀가 신의왕후의 소생이고 어린 방석과 방번, 그리고 경순공주가 신덕왕후의 소생이었다.


신덕왕후는 왕위 계승자로 유력했던 방원과는 그리 나쁘지 않은 모자관계였지만, 일부 중신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권력지향적이고 냉정한 면모를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방원이 왕이 되면 다른 자식들의 안위가 위태롭거나, 적어도 왕실에서 입지가 대단히 좁아질 것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방석과 방번 등 자신이 낳은 아들을 세자로 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정도전 등의 도움으로 11살이었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은 결과적으로는 방원의 분노를 터트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자신이 아닌 코흘리개 어린 동생이 세자가 된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방원은 신덕왕후 소생의 두 동생을 죽이는데 그치지 않고 방석의 세자 옹립에 힘을 모았던 정도전 등 공신들과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왕의 사위인 이제까지 모조리 처단했다. 신덕왕후 소생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식이 바로 경순공주였다.


방원의 극악무도한 행위에 이성계는 대노했다. 왕이 되기 위해 피붙이를 죽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방원의 세력은 아버지와 비등할 정도로 확대돼 있었다. 방원에게 크게 실망한 왕은 궁궐을 떠나려 했지만 그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게 되자 급히 경순공주를 찾았다. 유일하게 남은 딸의 목숨이라도 보호해야 했다. 그래서 출가를 명했다.


출가는 딸의 안위를 위해 태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조치였다. 출가를 통해 경순공주는 왕의 딸이 아닌 부처님의 제자가 될 것이다. 왕의 딸은 항시 목숨이 위태로울 테지만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면 아무리 왕이라 해도 그녀를 함부로 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로부터 위협받는 딸의 목숨을 지켜내야 하다니 하늘이 통탄할 노릇이었다.


남편을 잃은 후 깊은 상실감과 슬픔에 빠져있던 경순공주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권유에 갈등했다. 출가의 뜻이야 언제나 마음속에 품어왔던 발원이지만, 세속의 고통에 등 떠밀리듯 출가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끔찍한 심적 고통에서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출가해 몸은 왕실을 떠나더라도 가슴이 타는듯한 끔찍한 고통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깊은 슬픔 속에서 과거의 기억만이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남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후회와 죄책감이 그녀를 더 힘들게 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그녀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방원의 집으로 들어가길 설득했다. 후의 일이 어찌됐든 목숨만은 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에게 누가 왕이 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도 죽지 않고 상처받지 않고 다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면 그 뿐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단호했다. 꼿꼿하고 강직한 성품의 남편에게는, 한낱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릇된 길을 간다는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성계가 일찍이 그를 경순공주의 베필로 점찍고 ‘이씨’ 성과 각종 재물을 하사하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했던 것도 그런 성품을 특별히 아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편은 결국 그 성품 때문에 죽음을 맞았다. 아니, 왕의 딸과 결혼했기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공주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귀족의 딸이었다면 아무도 죽지 않고 오래도록 살 수 있었을까.” 고통은 더해져만 갔다.


두문불출한 채 눈물로 하루를 지새우길 서너달, 공주는 마음을 굳히고 아버지를 찾았다. 남편과의 추억이 깃든 장소, 가족들이 웃음으로 함께했던 기억이 스며든 궁궐을 영원히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품에 기대어 그 가르침을 실천하고 먼저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빌며 여생을 보낼 것을 서원했다.


오랜만에 마주한 부녀는 상복 차림에 수척한 모습이었다. 딸의 상한 모습에 왕은 가슴이 저몄다. 노쇠한 아비의 눈물에도 공주는 담담했다. 더 이상 흘릴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3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잃었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죽고 죽이는 왕실에서는 이제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분쟁과 갈등, 욕망으로 얽혀있는 더러운 세속을 떠나 부처님의 품에 귀의하겠다”고 서원한 마음은 마치 금강과 같이 단단했다.

 

이성계, 딸 삭발시키며 통곡
청룡사서 고려 왕비에 의지  


무명초를 잘라낸 경순공주는 아버지와 함께 지금의 동대문에 위치한 비구니원(정업원) 청룡사를 찾았다. 청룡사는 당시 왕실 여성들이 출가해 수행하던 귀의처였다. 청룡사에 들어서자 이미 기별을 받은 비구니들이 그녀를 맞았다. 대부분 멸망한 고려왕실 여성들로, 그 중에는 공민왕의 후비인 혜비도 있었다. 혜비는 공민왕이 시해당하자 출가했고, 청룡사 주지가 되어 고려 멸망 후에도 변함없이 수행에 전념하고 있던 터였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이제 아픈 기억은 훌훌 털어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수행을 통해 업장을 닦아내는데 전념하세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깨달음을 향해 한발한발 정진하다보면 어느새 고통도 자연히 사라질 것입니다.”


혜비의 진심어린 위로였다. 그제서야 왈칵 눈물이 솟았다. 공주의 야윈 어깨를 쓰다듬던 스님의 눈시울도 덩달아 붉어졌다. 가족을 잃은 그 고통이 오죽하랴. 지금은 청룡사의 주지로 비구니들을 이끌며 수행에 전념하고 있지만, 혜비 역시 왕실의 이해관계에 희생돼 누구보다 기구한 삶을 살았기에 공주의 고통이 남일 같지 않았다.


혜비는 공민왕과 결혼했지만 평생 노국공주의 그늘에 가려져 외면당했고,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는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의 횡포에 적잖이 시름했다. 자제위는 공민왕이 아들을 얻기 위해 왕비와 사통을 허락한 후 온갖 음행을 시도하며 그녀와 다른 왕비들을 괴롭혔다. 견디기 힘든 지난한 세월이었지만 혜비는 끝까지 결연한 의지로 절개를 지켜냈다. 고통스러운 삶에 부처님 가르침이 굳건한 버팀목이었음은 당연지사다. 공민왕이 시해 당한 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출가한 이유는 얽히고 설킨 세속의 어지러운 욕망에 못내 지쳐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상황은 다를지 몰라도 혜비와 경순공주는 같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서로를 의지했다. 공주가 출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케인 의안대군(방석)의 부인 심씨도 청룡사로 출가했으며, 심씨는 혜비가 죽은 후 청룡사 주지가 되어 사찰을 운영했다고 한다.


멸망한 고려나 새나라 조선이나 항상 희생양은 정치적으로 소외된 힘없는 여성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정업원은 상처받은 왕실여성들을 자비로 보듬는 안식처에 다름없었다. 때문에 정업원에 머무는 비구니들은 나라가 바뀌고 불교가 배척당해도 세간의 동정어린 따뜻한 시선 속에서 지속적인 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세상을 미혹시키고 백성을 속인다’는 이유로 불교를 배척하고 꺼려한 태종(이방원)조차 폐불정책을 내걸고 사찰들을 폐쇄할 때에도, 정업원만은 그대로 두고 토지와 노비를 정기적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특히 태종은 극단적으로 반불교, 친유교적 정책을 펼쳤음에도 유신들이 정업원을 일컬어 “1년 예산이 100석이나 되고 알려지지 않는 비용은 더 심하다”며 철폐를 주장하자 이를 묵살하는 등 특별히 대우했다. 어쩌면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는 무거운 죄업이 정업원에 머물고 있는 동생 경순공주에 대한 깊은 죄책감으로 이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 최고의 비운의 여성으로 손꼽히는 경순공주. 세속의 어지러움은 사랑하는 이들을 모조리 빼앗아갔지만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불제자의 길을 걸으며 희생된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았다. 수행이 깊어진 끝에는 어쩌면 방원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내려놓고 그 죄업에 대한 측은지심으로 배다른 오빠를 위한 기도를 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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