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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법상, 산에서 살다 가다

기자명 성재헌

도인은 환경 적응하며 스스로 삶 변화

생명체 특성은 뜨겁고 차가움
개인 인생사에 적용해도 무방

 

젊어서는 누구나 뜨거운 삶
조용히 늙는것도 아름다움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간만에 대구 처형 댁이 왔다. 온 김에 감주 처이모 댁에 들러 보잔다. 골짜기를 몇 개나 돌아 자동차가 지나는 길 끝자락, 하늘만 빠꼼한 그 동네 어귀에 사시사철 몸빼를 걸치는 처이모님이 한결같은 웃음으로 서계셨다. “어여들 와.”


아들네들이 꼭꼭 채운 냉장고를 훌훌 털어 거하게 점심을 먹고 커피까지 한잔씩 마셨는데도 이모님은 뭘 더 먹여야 성에 차실 눈치다. “아이 야들아, 여 술상 좀 봐 와라. 사우들 왔는데 한 잔썩 해야지.”


대낮의 술판도 부담스럽지만 턱까지 찬 배가 더 걱정이다. 빠져나갈 방도를 살피다 오전에 콩밭에 다녀왔단 말씀이 번뜻 떠올랐다. “콩은 다 익었습니까.”


“익다마다. 터져서 다 흘러 내리여. 그거 꺾니라고 오전 내 밭에 있다 왔잖아.”
요거다 싶었다. “빨리 꺾어야겠네요. 그럼, 콩 꺾으러 가지요.”
정색을 하고 손사래다. “어데, 이꺼정 와서 일은 무슨 일. 그건 내일 하면 되고 나캉 술이나 한잔 해.”
기어코 한잔 해야만 하나보다 싶어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주저앉으려던 순간, 고맙게도 아내가 말미를 돌렸다. “이모, 밭에 가서 한잔하면 되지.”
대구 형님도 거들고 나섰다. “이모님 농사 구경도 하고, 갑시다. 들에 가가 한잔하면 더 좋지예.”
“그람, 함 가보까?”


명도 거역하지 않고 일손까지 거들겠다니, 싫지 않으셨나 보다. 구부정한 허리를 굽은 다리로 지탱하고선 낫보다 소주와 안주를 먼저 챙겨들고 앞장을 섰다. 개울가 다랑이 밭엔 봄 가뭄에 반 말라죽고, 산짐승이 또 반을 먹어치우고 남은 콩들이 듬성듬성 박혀있었다. 딸네 없는 집에서 딸 노릇 톡톡히 하는 처형은 밭으로 내려서자마자 잔소리가 늘어졌다.


“아이고 이 할마씨야, 이거 농사짓겠다고 그 난리가. 만날 허리 다리 아프다 카지 말고 고마 치아라.”
“자는 와 만날 생떼같이 지랄이고, 지랄이.”
“돈 쓰고 몸 아파가미 산짐승한테 존 일이나 하니께 카제.”
“그람 성한 밭을 놀리나. 가들도 먹고 내도 먹고 하는 기제.”


자주 듣는 잔소리가 상그럽었나 보다. 얼른 낫을 잡아들고서 콩대 사이로 허리를 굽혀버렸다. 그 밭의 콩대는 어설픈 일손에도 두어 시간 만에 모조리 꺾였다. 그리고 이모님의 성화로 기어코 밭두둑에 술상이 차려졌다. 이마로 흐른 땀을 소매로 씻고서 산산한 가을바람을 콧등으로 느낄 즈음이었다. 일한다고 멈췄던 처형의 잔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할마씨야, 대처에서 돈 잘 버는 아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뭐한데 여서 이 고생이고.”
한 잔 술로 얼굴이 볼그리 달은 이모님, 모르는 소리 한다는 표정으로 한참을 가만히 바라보시다 먼 산으로 눈길을 돌리고 한 마디 하셨다. “거 가봐야 내 감옥살이하고 지들 짐꾼노릇 시키는 긴데, 그 짓을 와 해.”
“여 혼자 있으면 자슥들 맘 불편하니까 카제.”
“씰데없는 걱정한다 케라. 저거나 잘 살면 되지.”
처가라고 찾아와 밥만 먹고 가는듯해 한 마디 거들었다. “여기서 사시는 게 더 좋으신 갑지요.”


뚱하니 말이 없다 한 마디 하니 좋으셨나보다. 이모님, 한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열다섯에 시집 와가 여서 60년이라. 좋고 말고 할 게 어딨어. 기냥 이래 살다 가는 기지.”


그리고 환하게 웃으셨다. 한 줌의 섭섭함도 아쉬움도 비치지 않는 그 웃음이 언덕배기에 지천으로 흐드러진 들국화마냥 아름다웠다.


당나라 정원(貞元) 연간의 일이다. 염관 제안(鹽官齊安)선사 휘하의 한 납자가 주장자 감을 찾아 산을 헤매다가 천태산(天台山) 여요(餘姚) 남쪽 70리에 있는 대매산(大梅山), 하늘만 빠끔한 골짜기에서 푸근한 웃음이 남다른 한 노스님을 만났다. 젊은 납자는 옷깃을 가다듬고 정중히 여쭈었다.


“화상께서는 이 산에서 얼마나 계셨습니까?”


스님은 가만히 눈길을 돌리고 찬찬히 말씀하셨다.

 

“몰라,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 누레졌다 하는 것을 보았을 뿐이지.”
“산을 벗어나는 길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냇물을 따라가게.”


이상한 일이었다. 말이야 특별할 것 하나 없는데도 그 어간에서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졌다. 절로 돌아온 젊은 납자는 산중에서 만난 기이한 노스님이야기를 스승 염관에게 상세히 아뢰었다. 그 인상착의를 몇 번이나 되묻다가 염관이 말했다.


“내가 강서(江西)에 있을 때에 양양(襄陽) 사람으로 성이 정(鄭)씨인 한 스님을 만난 적이 있었지. 형주(荊州) 옥천사(玉泉寺) 출신에 법명이 법상(法常)인 그 스님은 “마음이 곧 부처다”는 마조 스님의 한 마디에 크게 깨달았지. 하지만 그 뒤로 소식을 몰랐는데, 아무래도 그 스님인 듯하구나.”


제안선사는 편지로 격식을 갖추고 그 스님을 다시 보내 대사를 초청하였다. 그러자 법상선사가 게송 한 수로 답하였다.


서늘한 숲에 의지한 앙상한 고목
수없이 봄이 찾아와도 변치 않는 마음
나무꾼이 보고도 본체만체 하는데
솜씨 좋은 목수가 무엇 하러 애써 찾을까?


구조주의 철학자인 레비스트로스가 인간관계의 특성에 따라 복잡하고 일회적인 관계를 맺는 ‘뜨거운 사회’와 단순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차가운 사회’로 분석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을 읽으며 뜨겁고 차가운 특성이 사회뿐 아니라 생명체들의 특성을 구분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부단히 취사선택하며 적합한 환경을 찾아 이동하는 동물들은 에너지가 넘치는 ‘뜨거운 삶’을 살아가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식물들은 ‘차가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구분이 개인의 인생사에도 적용되겠단 생각이다. 젊어서야 누군들 뜨겁지 않으랴. 하지만 나이 들어서 여전히 하고 싶은 일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만큼 추한 것도 없다.


숲에서는 썩은 나무도 아름답다. 조용히 늙어간다는 것, 참 아름다운 일이다.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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