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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아래 첫 바위서 중생을 품다

  • 집중취재
  • 입력 2012.10.23 15:45
  • 수정 2012.10.23 17:06
  • 댓글 0

18. 금오산 약사암

‘삼족오’ 상징한 금오산 정상
현월봉 중턱에 자리한 암자
의상대사 해탈한 곳에 창건

 

 

▲금오산 약사암. 현월봉 중턱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멀리 금오지와 구미 시가지가 아련하다.

 

 

가을은 거스를 수 없는 감동이었다. 기암괴석 곳곳에서도 단풍이 피었다. 구미 금오산 초입에 들어선 의상(625~702)은 감탄했다. 울긋불긋한 나뭇잎이 산을 장엄해서다. 이를 악물고 손을 꽉 쥐었다. 단단한 바위틈에서도 나무는 태양빛을 잎에 물들이고 겨울과 이듬해 봄을 준비 중이었다. 의상은 서원했다. ‘이곳에서 자유자재한 불성을 확연히 꿰뚫어보리라.’ ‘세속에 찌들어 불성으로 향하는 길을 단단히 막아선 벽을 뚫고 연꽃을 피우리라.’

 

금오산 정상인 현월봉(해발 976m)에 이르는 길은 된비알의 연속이었다. 몹시 험한 비탈길 곳곳에 암석이 솟아 있었다. 의상의 이마에선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땀에 젖은 바랑은 걸음을 무겁게 했다. 더딘 발걸음에 지친 심신은 마구니를 몰고 왔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산에 오르나. 어차피 도로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정상에 올라 화두를 참구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그냥 저잣거리로 나가게나.’ ‘자넨 굳이 이곳에서 수행하지 않아도 훗날 대사로 이름을 날릴 걸세. 그러니 내려가서 몸 좀 편히 쉬고 다음에 수행해도 늦지 않는다네.’


의상은 마음이 동했다. 꼭 청정하고 조용한 산에서 수행하란 법은 없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머리를 세차게 도리질했다. ‘내 이번 생에도 윤회를 끊지 못한다면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리라!’ 나약해진 맘 다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의상은 기어코 현월봉에 올랐다. 산 아래 호수와 마을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재차 마음을 먹었다. ‘저 바위 위에서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려오지 않겠다.’ 의상은 현월봉 중턱 바위에 움막을 쳤다. 비와 눈을 가릴 요량이었다. 그뿐이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가부좌를 틀었다. 의상의 시선은 산 아래를 지긋이 응시했다. 해는 뉘엿뉘엿 저물고 어둠이 산자락을 덮기 시작했다. 바람이 일었고 장삼 자락이 날렸으며 의상의 화두는 단단해져갔다. 의구심은 날선 검처럼 하루하루 쉴 새 없이 화두를 베고 또 벴다.

 

하늘이 감응한 것일까. 참선을 마치면 불보살이 한 끼 공양을 내려다 줬다. 어느 날이었다. 지긋이 뜬 눈이 법열에 휩싸였다. 몸은 환희로 떨려 왔다. 세포 하나하나에 가득했던 의심덩어리가 법열에 밀려 온몸에 난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의상의 입가엔 희미하게 미소가 흘렀다. 금오산에 어둠이 물러가고 새벽 미명이 찾아왔다. 움막을 정리하고 암자를 세웠다. 약사암이다. 산을 내려온 의상은 영주 부석사를 창건하고 해동 화엄종의 대종사가 됐다.


도선(827~898)은 의아했던 마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금오산은 과연 명산이었다.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능선을 유심히 보니 ‘왕(王)’자처럼 보였고, 가슴에 손을 얹고 누워 있는 사람 모습 같았다.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해탈했다는 풍문은 과장이 아니었다. 주민들은 금오산을 이렇게 불렀다. 세 발 달린 황금빛 까마귀가 저녁노을 속에 금빛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는 모습과 닮아 ‘금오산(金烏山)’이라 했다. 태양 안에 산다는 세 발 달린 상서로운 까마귀, 곧 ‘삼족오’의 산이라는 게다.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말도 들렸다. 부처님이 누운 모습과도 같아 ‘와불산(臥佛山)’이라고도 했다.

 

 

▲도선국사가 정진했다는 도선굴의 부처님.

 


도선은 ‘풍수대가’라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싫진 않았다. 허나 장부로서 세상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다. 금오산에 든 이유이기도 했다. 의상대사 이야기가 도선의 마음을 움직였다. 도선은 금오산 입산 전 바위에 큰 구멍이 난 대혈(大穴)을 봤다. 정진하기 꼭 알맞은 곳이라 여겨졌다. 굴에 이르는 길을 찾아 헤맸다. 대혜폭포에 이르러서야 굴을 찾았다. 폭포 옆 암벽에 뚫린 곳이 대혈이었다. 낭떠러지를 발밑에 두고 암벽 옆을 탔다. 도선은 천연동굴에서 화두를 들었다. ‘이곳에서 내가 정진했다는 소문이 나면 훗날 도선굴로 불릴지도 모르겠구나.’ 피식 헛웃음이 났다. ‘풍수대가’라는 세간의 평을 뒤로 하고도 세속 인연이 이곳까지 미칠 생각을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이내 번뇌를 떨쳤다. ‘도선굴’ 속 도선의 마음은 화두를 향한 의심으로 들끓고 있었다.


소문 듣고 찾아온 객을 금오산은 떨쳐내려 했다. 약사암도 발길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가파른 비탈길과 곳곳의 암석은 심신을 지치게 했다. 얇은 귀로 동한 어설픈 신심은 물러나라는 게다. ‘관두자’는 마음이 내내 객을 괴롭혔다. 보물인 마애보살입상, 의상이 해탈했다는 약사암, 도선이 정진한 도선굴 등등. 수차례 접으려던 발걸음이 다시 약사암으로 향했다. 조선초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왕의 기가 서려 있다’고 했다니 기운 한 번 느껴볼 요량도 있었다.


채미정~케이블카~해운사~대혜폭포~도선굴~돌탑무더기~오형돌탑~마애보살입상~약사암으로 길을 잡았다. 채미정은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 건립한 정자다. 길재는 고려 마지막 충신으로 조선에 출사하지 않고 선산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 채미정의 ‘채미(採薇)’는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이 중국 백이와 숙제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절의를 지킨 고사를 떠올리게 한다고 해서 붙여졌다. 여기서부터 4km 남짓 걸어야 현월봉 정상이었다. 케이블카 힘을 빌어 해운사에 다다라 대혜폭포로 올랐다. 금오산 정상 현월봉 부근에서 흘러내린 가는 물줄기가 북쪽 계곡과 골짜기를 지나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 게 대혜폭포다. 금오산을 울린다고 해서 ‘명금(鳴金) 폭포’로 불리기도 한단다. 물길은 말랐고 폭포는 힘없이 흘러내렸다.


도선국사 수도처인 천연굴 유명
마애불, 바위 돌출 부위에 새겨
동그란 탑들이 제1경으로 꼽혀

 

도선굴이 궁금했다. 야은 길재도 이곳에서 수도했다. 전망이 좋고 아래가 깎아지른 절벽이어서 이속에서 난을 피한 사람도 많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인근의 고을 사람들이 절벽에 붙은 칡넝쿨을 부여잡고 이 굴로 피신했다. 연인원 100명이 넘었다고. 폭포의 물을 긴 막대로 받아먹으며 연명했단다. 아찔한 암벽 옆구리를 탔다. 깎아지른 절벽 옆으로 겨우 한 사람이 지날만한 길이었다.

 

외길엔 철제난간만이 유일한 보호도구였다. 난간 없이 이 길을 다녔을 옛 사람들 신심을 떠올리니 아찔아찔하다. 암벽 바닥은 반질반질했다. 수많은 이들의 신심이 남긴 족적이었다. 오래됐다는 증거다. 기도하기 좋은 장소로 알려져 발길이 잦단다. 도선굴 부처님이 촛불 공양 위에 앉아있었다. 참배를 위한 좌복이 깔렸고, 쓰레기통도 보였다. 누군가 꾸준히 도선굴을 찾는다는 얘기다. 어둠을 사르는 촛불 위 부처님은 도선일까, 의상일까, 길재일까, 객일까, 당신일까……. 못난 생각이다.

 

 

▲마애보살입상으로 가는 길목의 돌탑들.

 


마애보살입상(보물 제490호)을 친견하기 위해 걸음이 바빠졌다. 지는 해는 객을 초조하게 했다. 순간, 심장이 멎었다.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다. 우거진 숲이 잠깐 끊기는 길, 그곳엔 셀 수 없는 돌탑 무더기가 객을 압도했다. 누군가가 하나, 둘 아니면 또 다른 이가 그 위에 마음 하나 올렸을 터다. 험한 산길 올라 단단한 돌 하나에 단단한 신심 하나 공양한 이들의 마음이 묵직하다.

 

돌탑 무더기를 뒤로 하고 30분쯤 걷자 금오산 제1경 오형돌탑이 객을 맞았다. 그네들이 올려다보는 구미의 하늘과 내려다보는 구미의 땅이 훤하다. 돌탑 한 가운데 부처님 가부좌와 수인이 단단했다. 오형돌탑. 누구 글인지 알 수 없었다. 뒤집어야 비우고 버릴수 있다는 말 그대로 시도 거꾸로다. “친구 되어 줄께요. 이곳에 놀러오이소, 살다가 힘들거든 후회도 하지 말고 원망도 하지 말고 미움도 버리고 욕심도 버리고 그래요. 뭐라꼬!” 오형돌탑은 자식을 먼저 보낸 아비가 자식의 명복을 빌며 쌓고 또 쌓았다고 전해진다. 수십기 돌탑을 보면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돌탑 옆에 하얀 국화가 놓였다.


 

▲오형돌탑서 내려다보는 경치가 장관이다.

 

 

“큰 돌 작은 돌 잘 생긴 돌 못 생긴 돌 차곡차곡 등에 업고 돌탑으로 태어나서 비바람을 이불삼아 산님들을 친구삼아 잘 가라 띄워 보낸 낙동강을 굽어보며 못다핀 너를 위해 세월을 묻고 싶다.”


마애보살입상을 참배했다. 5.5m의 석불입상이다. 자연암벽에 조각한 석공의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특이하게 돌출부분을 이용해 좌우를 나눠 입체적으로 마애보살을 모셨다. 안내문은 신라시대 조각으로 추정했다. 의상이나 도선도 마애보살을 친견했을까. 언제든 어디든 민초는 밥 한 그릇 걱정에 시름했다. 논에 물들어 갈 날만 기다렸고, 풍년을 기대했고, 자식 목에 밥 한 숟갈 넘어가는 소리에 기뻐했다. 손바닥 내보인 마애보살은 중생의 시름 다 받아줄 모양새다. 민초들 마음을 헤아리듯 암벽에 불보살을 새기는 석공의 절절함이 뼈저리다. 절로 3배의 예를 다했다. 매일 이 곳을 쓸고 치우는 노보살이 있다고 한다. 석공 못지않은 노보살의 갸륵한 정성이 스쳐 지나가는 객 발길을 붙든다.

 

 

▲보물 제490호 마애보살입상.

 


300m 정도 기다시피 오르자 약사암이 산문에 드는 객을 허락했다. 정상에 올라 현월봉 송신탑을 끼고 바위 하나를 돌아 탑바위서 바라본 약사암이 놀랍다. 현월봉 중턱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멀리 금오지와 구미 시가지가 아련하다. ‘동국제일문(東國第一門)’이란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위 사이로 난 계단 위로 탁 트인 시야가 지친 심신을 달랜다. 종각도 바위에 올라앉았다. 열쇠로 가는 길을 막아 범부의 발길을 경계하고 있었다. 새벽 도량석 땐 약사암 종각 범종 소리가 금오산의 온갖 생명붙이들과 미물들을 법음으로 안내하리라.


스님은 뵐 수 없었다. 종무소엔 하얀 고무신 한 쌍만이 가지런했다. 빗장 걸지 않은 약사암 약사전 문을 열었다. 약함을 들고 있는 부처님에게 설익은 신심을 시주했다.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도 약사암에서 참선했다 한다.

 

한 치 틈도 허락지 않는 암벽에 가을이 피었다. 암벽 틈 단풍이 저녁노을에 기댔다. 붉다. 암벽에 매달린 약사암이 물든다. 세파에 찌들어 딱딱해진 부처님 마음 틈으로 약사암이 핀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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