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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광덕사 회주 철웅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광덕 들판에 펼쳐진 26만 그루 호두나무 묘목 하나에서 시작

존재 이유 고뇌하던 청년
자유 찾아 마곡사로 출가

 

심지 않고 거둘 순 없어
원한다면 당장 시작해야

 

 

▲1966년 한 스님에게 “출가하면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대학생활을 접고 출가자의 길을 선택했다는 철웅 스님. 폐허가 되다시피 했던 광덕사와 인연이 닿은 스님은 곧 불사의 원력을 세웠고 온갖 비난과 음해를 극복하며 마침내 광덕사를 천안의 대표 사찰 중 하나로 재건했다.

 

 

천안 광덕산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시인이라면 이 풍광 앞에서 시 한 수 지으련만, 그런 내공 없으니 서산대사의 시 한수로 이 가을을 음미해 볼 뿐이다.


‘가을 풍광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하나같이 기이하니(遠近秋光一樣奇)/ 석양에 휘파람 불며 한가롭게 걷네(閑行長嘯夕陽時)./ 온 산에 붉고 푸른 아름다운 빛(滿山紅綠皆精彩)/ 흐르는 물, 새 울음소리 그대로가 시를 설하네(流水啼禽亦說詩).’


소동파는 시냇물 소리(溪聲)와 산빛(山色)을 부처님 설법이라 했는데, 서산 대사는 온 산의 단풍과 흐르는 물소리, 새 우는 소리 자체가 시를 설하고 있다(說詩)고 말한다. 고즈넉함 속에 우주를 담은 서산대사의 선지가 확연히 보인다. 서산 대사의 시 그대로라면 이 풍광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와 우주를 만끽하고 있음이다. 대웅전을 향해 오르는 보화루 계단 옆 호두나무도 시 한수 건네고 있는 듯하다. 어제 내린 비로 잎마저 거의 다 떨어트린 호두나무지만 ‘무상’(無常)을 설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천안이 호두로 유명한 고장이라 하지만 실은 총 생산량의 60%를 담당하고 있는 ‘광덕’이 본 고장이다. 약 700년 전 유청신은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묘목과 종자를 갖고 귀국했다. 묘목은 광덕사 경내에 심고, 호두는 광덕 매당리에 자리한 자신의 집에 심었다고 한다. 광덕사(광덕)가 호두의 시배지인 셈이다. 보화루 옆 호두나무가 유청신이 심었던 묘목은 아니지만, 수령 400년의 이 나무가 한국 최고령 호두나무(천연기념물 398호)다.


하지만 이 호두나무도 광덕사의 옛 위상을 보지는 못 했을 것이다. 광덕사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 온 불치사리 1과 등 사리 10과를 봉안하며 개창됐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광덕사는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사격으로는 가장 큰 사찰이었다. 사찰소유 토지가 광덕면 전체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만 89개였다. 누각이 8개, 종각이 9개, 80칸의 만장각(萬藏閣)과 3층 규모의 천불전도 있었다. 이 모든 전각이 임진왜란으로 전소됐다. 이후 일제강압기와 6.25한국전쟁을 겪으며 광덕사는 옛 명성을 잃었다. 1972년 주지로 부임한 철웅 스님의 가슴엔 이 광덕사가 어찌 다가왔을까!


고등학교 시절부터 삶과 존재 이유를 사유해 왔던 청년은 대학에 입학해서도 그 의문을 속 시원히 풀지 못했다. 경북대 3학년 당시 고향 영주를 찾은 청년은 지친 심신이라도 추스르고자 봉화 물야면의 오전약수터로 향했다. 선달산과 옥석산 사이에 위치한 오전약수터는 피부병과 위장병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유명 약수터다.


약수터 앞에 서 있는 한 스님이 눈에 띄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지만 뭔가 끌리는 게 있었다. 법연이었을 것이다. 청년은 그 스님에게 아주 단순한 물음 하나를 던졌다. “스님이 되면 뭐가 좋아요?”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처럼, 바람처럼 걸림 없이 삽니다.” 가슴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 요동쳤다. 청년시절부터 고민해 온 문제가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것’이라는 막연함만으로도 족했다. 스님이 되는 길을 물었다. “부모님 허락부터 받아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5남매 중 장남의 출가를 어느 부모가 선뜻 허락한단 말인가. 조용히 집을 나섰다. 지도를 펴니 첫 눈에 강원도의 한 사찰이 들어왔다. 무작정 그곳으로 향했다. 고즈넉할 줄 알았던 산사! 그러나 그가 본 건 스님들이 무엇인가를 놓고 다투는 장면이었다.


‘여기는 아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었다. 이 고장 최고 산사가 어디인지. 누군가 “오세암으로 가보라” 권한다. 지도를 폈으나 오세암은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 공부를 하려면 해인사로 가 보라는 누군가의 권유에 다시 해인사로 향했다. 입산은 허락 받았지만 난제가 있었다. 당시 해인사도 넉넉지 않은 살림. 1년 동안 입을 옷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던 것이다. 옷 때문에 다시 집을 찾을 수는 없었다.

 

 

▲광덕사 전경.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해도 이 절은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사격으로는 가장 큰 사찰이었다.

 


며칠 만에 일주문을 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스님 한 분이 서 있었다. 어디로 가시느냐 물으니 마곡사로 간다 했다. 청년은 그 스님을 따라 마곡사로 향했다. 공주까지 버스로 이동하고, 나머지 길은 걸었다.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마곡사에 도착했다. 이 때가 1966년. 2년간의 행자생활을 한 후 일현 스님을 은사로 1968년 정식 출가했다.


마곡사에서 재무 소임을 보던 철웅 스님은 1972년 겨울 말사 관리차원에서 광덕사를 찾았다. 거사 한 분과 보살 한 분이 대웅전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을 뿐 스님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신도는 고작 10명.


철웅 스님은 차 한 잔 내며 당시를 회고한다.


“대웅전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데 ‘삐그덕’하는 소리가 나더군요. 쓰러지기 직전의 대웅전이 울고 있었던 겁니다. 천불전에는 비가 주룩주룩 샌 흔적이 도처에 있었고요. 89개의 암자에서 울렸던 독경 소리는 다 어디로 가고 ‘울음’소리만 나는가!”


대웅전과 광덕산 자락을 바라보며 한 없이 서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한 겨울의 찬바람만이 철웅 스님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부처님 법도 공간이 있어야 담고 펼 수 있지 않은가!’ 교구본사 소임까지 내 놓은 철웅 스님은 1973년 1월 1000일 기도에 들어갔다.


지금이야 사찰 주지를 맡기 위해 본사 소임 내놓는 게 당연해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사정은 이와 정반대였다. 1970년대 초반이면 가까스로 보릿고개를 넘겼던 때다. 큰 사찰이 아니고는 시주물조차 보기 어려웠던 시기였으니 소임을 놓고 폐사에 가까운 광덕사로 간다는 건 누가 보아도 고생길을 자처하는 것이리라. 더욱이 광덕사 소유의 토지도 이미 다 유실된 상태였다.


‘회향 때까지 일주문을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한 스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 8시간 씩 사분정근을 이어갔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했다. 3년 동안의 기도를 지속할 수 있었던 원천은 어디에 있었는지 말이다.

 

비새는 법당 앞에서 ‘눈물’
‘사기꾼’ 소리 들으며 불사

 

면모 일신 절엔 법향 가득
천안 대표사찰로 자리매김


철웅 스님은 한 때 춘성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망월사 선방에서 두 철을 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화두는 들리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중 될 인연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선객이 될 만한 근기가 제게는 부족하다 싶었습니다. 복을 짓자. 그래야 선근도 심어지지 않겠나!”


복을 짓는 첫 걸음이 광덕사 불사였던 것이다. 1000일 기도가 회향되는 즈음에 인연이 닿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그려보지 못했던 엄청난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천안 명찰 순례차 광덕사를 찾은 한 불자가 쇠락한 산사를 보고 마음을 냈다. 부산으로 돌아간 그 불자는 부산불심을 모아 광덕사 불사에 힘을 보탰다. 가진 게 없어 보시는 할 수 없지만 화주 원력은 낼 수 있다며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5개월 동안의 기도를 올린 후 인연 따라 화주를 받아 온 불자도 있었다. 불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중장비가 없었던 당시로서는 기둥은 물론 대들보도 사람이 옮겨야 했습니다. 절에 머물며 일하는 사람만도 50여 명. 이들을 위한 세 끼 공양도 벅찰 정도였지요.”


때로는 제 때 임금을 주지 못 해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심지어 ‘사기꾼 중’이라는 소리도 들어야 했다. 난관에 봉착하면 기도에 들어갈 뿐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그 때마다 희한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당장, 불을 끌 수 있는 만큼만 생기더군요. 넘치거나 모자람 없이 딱 필요한 그 만큼의 시주가 들어오는 겁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광덕사는 변해 갔다. 대웅전과 천불전, 적선당, 육화당, 보화루, 명부전, 산신각, 범종각 등의 전각과 요사채가 제 자리에 들어섰다. 원력을 세운 지 10여 년이 지난 1984년 광덕사 불사는 회향됐다.

 

 

▲광덕사에 있는 원조 호두나무 자손. 천안에서 생산되는 전체 호두나무 생산량의 60%가 이곳 광덕에서 생산된다.

 


“불자님들의 원력과 부처님의 가피가 한데 모아져 이룩한 불사입니다.”


광덕사 뒤편의 땅 12만평을 매입한 장본인도 철웅 스님이다. 철웅 스님의 원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광덕사는 우리 앞에 나투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불사가 아니었다면 노사나불괘불탱화(보물 제1261호)를 비롯한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20호), 금니은니묘법연화경(보물 제269호), 감역교지(보물 제1246호. 세조가 광덕사 부처님 치아사리를 친견한 후 광덕사와 개천사의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위토전을 하사한다는 친서), 조선시대 사경(보물 제1247호) 등은 남아있지 않았을 것이다.


광덕사 중창불사를 끝낸 스님은 곧바로 갑사, 마곡사, 고산사 주지를 맡으며 사격을 변모시켰다. 마곡사만 해도 본사라 하지만 철웅 스님이 주지를 맡기 전 빚만 17억을 안고 있었다고 한다. 철웅 스님은 4년의 임기동안 그 빚을 모두 청산했음은 물론 46억원대의 불사도 일으켰다. 광덕사로 돌아온 건 지난 2010년이다.


궁금했다. 혹, 후회는 없는지. 불사에 매진해 온 스님 중 간혹 ‘공부를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토로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 생에서 이 정도 해 온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 가피가 없었으면 제 능력으로는 안 될 일들입니다.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어지럽게 걷지는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어지럽게 걷지 않았다’는 한마디에 많은 의미가 함축돼 있는 듯싶었다. 서산 대산의 시 한 수를 가슴에 담고 있었을 것이다. ‘눈 내린 들판을 걸어 갈 때는/ 모름지기 어지럽게 걷지 말라/ 오늘 내가 걷는 발자국은/ 훗날 뒷사람의 이정표 되리니.’


철웅 스님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다고 강조했다.


“그 옛날 유창신이 광덕사에 호두나무 묘목 한 그루를 심었기에 25만8000 그루의 호두나무가 광덕 들판에 펼쳐져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씨앗을 심어야만 훗날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냥, 인연이 닿으면 되겠지, 나도 언젠가 복을 받겠지 하는 생각은 요행만 바라는 망상일 뿐입니다. 그 무엇이든 바라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세요. 훗날 누군가는 당신이 남겨 놓은 열매 하나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철웅 스님에게 청년 때 품었던 의문은 모두 풀렸는지 여쭈어 보았다.


“일주문을 지나 삼천불전으로 오르는 길이 참 좋습니다.”


한적하게 오솔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존재이유는 충분하다는 의미이리라. 철웅 스님이 남긴 꼿꼿한 발자국 하나로 광덕사는 새로운 전기를 다시 맞이할 것이다. 

 

채한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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