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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장예(張掖) 마티스(馬蹄寺)석굴군-下

붉은 절벽 아래 진리 감추고 난세를 묵묵히도 견뎌냈구나

치롄산맥 가장 깊숙한 곳

웅크리듯 조성된 ‘진타스’

 

군력·정복욕 몰아친 시대

속진도 접근 못한 수행처

 

▲마티산의 유래가 된 바위 위의 말발굽 흔적.

말발굽 절(馬蹄寺)이라는 독특한 명칭의 유래는 이곳 베이마티스(北馬蹄寺)에서 만날 수 있다. 베이마티스에는 마제전(馬蹄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다. 내부에는 세 명의 티베트 라마상이 봉안돼 있고(안내인은 이 라마상이 총카파와 달라이라마 판첸라마라고 설명한다) 그 아래 작은 유리 상자가 네모반듯하게 잘라놓은 돌 하나를 덮고 있다. 말발굽 흔적이 남아있는 돌이다. 안내인은 이 말발자국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가수스와 같은 천마가 이곳 마티산(馬蹄山)에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갈 때 남긴 흔적이라고 자랑한다. 그런데 천마가 이곳에 내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시원스런 답변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이 흔적이 말발굽 모양과 매우 흡사한 것만은 사실이다.

 

원래 이 말발굽 자국은 마티산 정상 부근에 있었는데 언제쯤인가 돌을 통째로 잘라다가 이곳 법당에 옮겨놓았다고 한다. 이 흔적 덕분에 산 이름도, 석굴 이름도 모두 ‘말발굽’이 됐으니 잘 보호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싹둑 잘라다가 법당 안에 덩그러니 놓아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질 않는다. 그저 우리 정서와의 차이인가 싶다.


베이마티스의 중심 석굴인 삼십삼천석굴 우측에는 장불전이라는 큰 석굴이 하나 더 있다. 삼십삼천석굴이 아래에서 위로 바위를 뚫고 올라가며 조성한 석굴이라면 장불전은 자연석굴을 이용해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간 형태다. 그 규모도 엄청나다. 석굴의 입구 격인 전실은 가로 폭이 10m쯤 돼 넓은 강당 같아 보인다. 석굴 중앙에는 괘불을 모신 커다란 석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석굴이 조성돼 있는데 석실 뒤로 연결돼 있다. 석실을 중심주 삼아 돌아 나올 수 있는 ∩자형 구조로 길이가 족히 20m여에 달할 듯하다. 석굴을 따라 좌우로 나란히 감실을 파고 불보살좌상을 봉안했는데 대부분 심하게 훼손돼 있다. 일부는 보수나 복원을 한 듯 채색이 돼 있기도 하지만 형태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존하고 있는 것은 대략 4분의1에 불과하다.

 

 

▲베이마티스의 장불전. 자연 석굴을 이용했다.

 


장불전 전실의 좌측에는 커다란 무쇠 솥 세 개가 아궁이에 걸려있다. 이 솥은 청나라 건륭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란다. 이렇게 큰 솥에 밥을 해야 할 만큼 마티스에는 많은 스님들이 모여 수행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곳 장불전의 전실이 처음부터 공양간은 아니었을 듯하다. 전실 좌우를 비롯해 석굴 곳곳에 커다란 감실의 흔적이 여러 개 남아있다. 비록 감실은 텅 비어있고 훼손도 심하지만 분명 불보살상을 봉안했을 자리다. 자연석굴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천장에는 벽화를 조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다. 석굴 중앙의 석실 전면에도 비교적 규모가 큰 불보살상을 봉안했을 좌대와 작은 불보살상이 있었음직한 감실들이 여러 개 남아있다. 이러한 흔적들로 미루어 보면 이 석굴 또한 대중들이 함께 모여 예불을 하거나 수행하는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다만 어느 시점부터인가 이곳이 공양간의 역할을 겸하게 되었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왼쪽 석굴 끝 지점에 남아있는 오래된 우물이다. 베이마티스의 고도가 해발 2500m에 달하고, 이 석굴이 바위 절벽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물, 그것도 석굴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우물은 참으로 의외가 아닐 수 없다. 비록 우물 입구는 나무판자로 덮여 있어 안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 우물이 있어 수많은 스님들이 이 황량한 산 중턱에서도 예불하고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곳 베이마티스는 마티스석굴군 가운데서도 비교적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곳이다. 입구의 넓은 주차장과 관광객들을 위한 상가 지역도 꽤 규모있게 형성돼 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이곳도 제법 북적이는 관광지로 변신한다.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이곳 수난위구족(肅南裕固族)자치현의 원주민이자 소수민족인 위구족들이 자신들의 전통 무용을 보여주거나 음식을 판매한다.


이곳 하서회랑 중에서도 우웨이(武威)를 중심으로 이곳 장예(張掖)와 주취안(酒泉), 둔황(敦煌) 등을 아울러 양주라 통칭한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여러 소수민족들의 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서진(265~316)시기 전국을 분할 해 다스리던 여덟 왕들이 황제의 자리를 놓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여 결국 국력을 쇠하게 만들었던 ‘팔왕의 난(290~306)’ 이후 서진이 몰락하면서 소수민족들의 군웅할거는 절정에 달했다. 팔왕의 난을 벌였던 왕들이 용병처럼 끌어들였던 소수민족들이 중국 각지에 정착하며 세력을 형성한 결과가 바로 5호16국의 시대였다. 이 시기 전국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하지만 양주 지역만은 와중에도 비교적 편안했다. 일찌감치 장궤(張軌)라는 지역 토호가 지배권을 단단히 구축했기 때문이다. 장궤는 후일 왕을 자청하며 전량(前凉)으로 기록되는 독자정권을 수립했다. 장씨는 혼란의 시기에도 양주 지역의 정치와 경제를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문인들을 아끼고 불교를 외호해 많은 인재들이 이곳으로 모여들게 했다. 이후 저족의 여광, 선비족의 독발오고, 흉노족의 저거몽손 등 여러 민족들이 후량, 남량, 북량 등의 이름으로 양주 지역을 지배하지만 불교는 꾸준히 뿌리내리고 흥성하게 된다. 서역불교, 즉 수많은 경전의 유입로에 인재까지 모여들었으니 양주 지역에서 수많은 역경승이 배출된 것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역경승들이 장안으로 불교를 전파하고 결국 중원 전체에 불교가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시대 상황의 산물이었다. 특히 북량(397~439)의 지배자였던 저거몽손은 그의 아우가 출가했을 만큼 불교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쏟기도 했다. 마티스석굴군 역시 이 북량시기에 개착이 시작되었으며 그 가운데서도 진타스(金塔寺)석굴은 이곳 마티스석굴군의 여러 석굴 가운데서도 가장 조성시기가 앞서는 석굴 가운데 하나다.

 

 

▲치롄산맥의 속살, 진타스는 마티스석굴군 가운데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수직의 절벽 아래 몸을 감춘채 고개만 내밀고 숨죽이 듯 숨어있는 석굴이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더 궁금하다.

 


진타스석굴은 베이마티스에서 약1시간가량 떨어져 있다. 거리는 10km도 안 되지만 워낙 길이 험하다. 천불동에서 베이마티스에 이르는 길보다 더 굽이진 길을 따라 더 깊숙한 계곡으로 들어간다. 치롄산맥의 속살로 파고들어가는 것이다.


길이 점점 더 험해지더니 기어코 진타스석굴 입구의 문물관리국에서 차량 출입을 막는다. “얼마 전 내린 폭설로 석굴을 개방하지 않는다”며 “석굴 출입문 열쇠도 관리국에서 회수해간 상태”라며 난색을 표한다. 물러설 수 없다. 관리국 직원을 한참이나 설득해 이곳부터 도보로 이동하는 조건으로 출입이 허용됐다. 약 1.5km의 눈 덮인 산길은 완만하지만 쌓인 눈과 곳곳에 얼어붙은 빙판으로 인해 차나 사람이 이동하기에는 분명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발들이기 어려운 만큼 주변 산세는 절경이다. 풀 한포기 없는 바위산이나 고작해야 양떼를 풀어놓을만한 초지가 녹색의 전부인줄 알았던 치롄산맥에서 전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숲길을 만난 것이다. 간만에 나무들이 내뿜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30분 가량 숲길을 걸었다. 갑자기 숲이 끝나고 거짓말처럼 거대한 절벽이 우뚝 드러난다. 높은 성벽처럼 보이는 단애 아래로 몸을 콕 박아 넣고 고개만 내민듯 한 석굴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진타스다.


수직에 가까운 계단을 기어가듯 올라 석굴 입구에 서니 아래는 그야말로 까마득한 낭떠러지. 난간이나 안전장치도 없는데 석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창문은 키를 훌쩍 넘길 만큼 높은 시멘트 벽 위에 뚫려있다. 석굴을 들여다보는 대신 눈을 허공에 던진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진타스석굴 내부. 답사에 동행한 금강불교신문 남동우 기자가 창문 난간에 매달려 촬영했다. 지면으로 감사함을 전한다.

 


뒤에 찾아보니 진타스의 두 석굴은 각각 동쪽과 서쪽 석굴로 불린다. 동쪽 굴은 높이 6.09m, 폭 9.70m로 서쪽 굴보다 조금 크다. 석굴 중앙에는 각종 불보살상과 비구, 비천상 등이 화려하게 조각돼 있는 중심 기둥이 있어 불교미술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서쪽 굴은 동쪽 굴과 같은 형식이나 석굴의 네 벽에 벽화가 남아있어 역시나 연구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특히 진타스석굴에는 아름다운 보살상과 비천상이 유명한데 대략 6~7종류나 된다고 한다. 그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키보다 높은 벽을 기어올라 창문 난간에 까치발로 선채 창살을 붙잡고 매달려 안을 들여다봐야 한다. 심약한 탓을 하는 대신 그저 아직은 불보살님을 친견할 인연이 무르익지 않았으려니. 언젠가 다시 한 번 이곳을 찾을 핑계가 생긴 셈이니 그리 나쁘지 않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출입이 허용되지 않은 진타스 동쪽 석굴의 보살상과 비천상을 책에서 찾아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사진출처 ‘감숙석굴예술’.

 


내려오는 길 의문이 계속된다. 옛 사람들은 왜 이렇게 험준한 산속에 석굴을 개착했을까. 지금도 접근이 쉽지 않은 오지인데, 그 옛날 이곳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을 터다. 왕실의 지원을 받았다면 수행과 생활 환경이 편리한 곳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민중들의 보시로만 생활해야 했다면 이곳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석굴 개착의 난이도나 불보살상의 수준으로 미루어 왕실이나 권문세가의 경제적 지원 없이는 석굴 조성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외진 곳을 선택한 이유는 그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권력을 다투며 피를 뿌리고, 이민족들이 서로를 지배하려하던 혼란의 시대, 그야말로 속세를 떠나 수행과 경전 공부에 전념하고자 했던 스님들에게 이곳 치롄산맥 자락 깊숙한 곳의 석굴들은 몸을 의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은둔처였을 것이다. 석굴이 조성된 이후로도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몸을 일으켰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하지만 진타스는 절벽 아래 웅크리고 앉아 그 오랜 세월을 무사히 견뎌냈으니 더 무슨 증거가 필요하랴. 그냥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재촉해 산을 내려오니 뉘엿뉘엿 해가 기운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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