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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실상사의 민회

지리산 실상사의 가을은 아름다웠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더 흘러 다시 찾은 실상사는 여전히 아무런 꾸밈이 없었고 의연했다. 실상사 경내의 넓은 마당에선 ‘민회’가 열렸다. 2012생명평화대행진(대행진)이 주최한 자리였다.


대행진은 ‘개천절’ 바로 다음날 제주에서 출발했다. 개천절은 두루 알다시피 ‘하늘이 열린 날’이다. 대행진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제주강정마을 주민, 용산참사 유족들과 관련된 대책기구들이 각각 영문 앞 문자(쌍용의 S, 강정의K, 용산의 Y)를 따와 출범한 ‘SKY 공동행동’을 중심으로 기획됐다. 억울하고 쫓겨나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 스카이(SKY) 곧 ‘하늘’로 섬기자는 ‘깃발’을 내걸었다.


대행진은 제주 강정마을을 원점으로 영남과 호남 곳곳에서 생존권 투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을 두루 돌아 11월3일 서울광장에서 막을 내렸다. 지리산 실상사에서 벌어진 민회는 이를테면 대행진의 중간 지점, 또는 정점이었다. 그곳은 영호남 사람들이 더불어 모이기 가장 적실한 공간이기도 했다.


민회는 말 그대로 민의 모임이다. 대행진을 주최한 쪽에서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민회’라는 말은 우리 사회 내부에서 형성됐다. ‘국회’나 ‘대통령’처럼 서양에서 들어온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다. ‘민회’라는 말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시점은 조선 후기다. 중세 신분체제가 엄존하고 있던 시기, 권력이 불교를 억압하던 그 시기에 아래로부터 올라오던 움직임이 민회였다. 사료를 찾아보면 마을의 ‘대소민인’이 함께 모여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마당을 민회로 설명하고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지리산 민회가 열린 이유는 분명하다 여야의 대통령 후보가 결정되고 무소속 후보까지 3파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후보들 마다 경제민주화를 공약하고 있지만 정작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이 의제로 설정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리산 민회의 백미는 전국 골골샅샅에서 참여한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원하는 세상, 내가 믿는 상식”이었다.

 

참석자들에게 140칸의 큰 원고지를 나눠주고 적게 했다. 이어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불교인들의 행사는 아니었지만, 그 140자 가운데는 불교적 가르침이 녹아든 이야기가 많았다. 가령 “비우고 비우면 기쁨 있네”라거나 “모두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 내 안의 욕심을 내려놓고 너를 살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라고 쓴 분이 있다. “자본이 우리 안에 심은 욕망에 마음을 팔지 않으면 마음은 근본의 자리를 돌아본다”는 성찰도 눈부시다.


어떤 시민은 “나누라는 대로 나누었는가? 나누어야 하는 만큼 나누었는가? 나누고 싶은 만큼 나누었는가?” 묻고 “나눌 수 있는 것부터 나누자”고 제안했다. 어느 여성은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걱정 안하고 결혼해 건강한 아기들을 낳고 살기를 원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핵과, 전쟁 없는 평화로운 세상. 직장과 삶터에서 쫓겨나지 않으며 약자의 인권이 보장되고 건강한 밥상을 차릴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라고 140칸을 채웠다.


기실, 그 상식적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통한다면 굳이 대행진도, 민회도 없었을 터다. 대행진을 기획한 인권운동가 박래군도 빈칸을 메웠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고 우리가 스스로 주인임을 알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능력이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라고 호소했다.

 

▲손석춘
그 호소와 맞물려 인상에 남은 것은 어느 시민이 짧게 쓴 글이다. “부처님. 민주주의 찾게 하소서. 꼭 우리들에게 힘을 주소서.” 전문이다. 민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내내 화두처럼 맴돌았다. 그 분이 쓴 ‘부처님’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그 부처님 아닐까.

 

손석춘 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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