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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용산(龍山), 풀어지다

기자명 성재헌

진흙소 바다로 뛰어든 순간 승부 무의미

공의 바다서도 시비와 득실
우열과 승패는 의미를 상실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산산한 바람에 단풍이 곱다. 이맘때면 꼭 혼자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맘이야 네팔도 가고 싶고 칠레도 가고 싶지만, 가장이라는 족쇄에 밥벌이라는 항쇄까지 찬 죄인에게 그만한 자유가 허용될 리 없다. 헛헛한 계절병을 다스릴 요량으로 아쉬운 대로 황악산을 올랐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새삼 가르치고 싶은지 낙엽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처량한 나그네 꼴에 손가락질하듯 비까지 추적거린다. 그래도 아직은 고운 빛깔이 여전하겠지 싶어 애써 나뭇가지사이를 더듬거려보지만, 어찌된 일일까? 고개가 힘없이 자꾸 숙여진다. 곱고 빛나던 인연은 몽땅 추억으로 사라지고 옹이진 심줄만 남아 버스럭거리는 소리, 발밑에서 뭉그러지는 낙엽이 나의 과거인 것만 같아 한편으론 안쓰럽고 한편으론 부끄러워진다.


‘그때 내 뜻대로 되었더라도 꼭 좋지 만은 않았을 거야. 그땐 그 사람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야.’


불편하고 불쾌한 과거와 화해할 요량으로 나름 스스로를 타이르고, 또 억지로나마 꽤 편안한 웃음을 지어보지만 성취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은 여전히 버스럭거리고, 좋지 못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에 대한 원망과 분노의 고갱이는 여전히 뻣뻣하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무언가 희망하던 마음이야 한결 잠잠해졌다지만, 앙팡지게 붙들고 놓지 못하는 심줄이 삭아 대지의 속살로 곱게 스미려면 아직도 된서리를 기다려야 하나보다.


‘경덕전등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동산 양개(洞山良价)선사가 행각(行脚)하던 시절 이야기다. 한번은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어 용산(龍山)에 이르게 되었는데, 산중의 오두막 암자에서 한 노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노스님은 넉넉한 웃음으로 젊은 납자를 반기며 물었다.


“이 산에는 길이 없는데, 스님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지?”
허공도 토막 낼만큼 지혜가 예리했던 동산이 그냥 지나칠 리 없다.
“길이 없다는 것은 그만두고, 화상께서는 그럼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흔하디흔한 일상의 인사치례가 단박에 본분자리를 논하는 거량으로 바뀌었다. 노스님은 느긋하게 대꾸하셨다.
“나는 구름처럼 물처럼 행각한 적이 없다네.”
그러자 동산이 다시 물었다.
“그럼, 화상께서는 이 산에 계신 지가 얼마나 됩니까?”
“세월은 상관해 뭣하겠나.”


흔들리지 않는 담담한 눈빛에 동산의 치기가 발동했나보다. 저 노스님의 깨달음이 몇 근이나 나가는지 잴 요량으로 저울대를 흔들었다.


“이 산이 먼저 머물렀습니까, 화상께서 먼저 머물렀습니까?”
허공을 저울대에 올리면 몇 근이나 나갈까? 시원찮은 저울질을 눈치 챈 노스님은 피식 웃으며 대꾸하셨다.
“몰라.”
그럴싸한 미끼에도 입질이 없으면 낚시꾼이 초조해지는 법이다.
“왜 모르십니까?”
“나는 인간과 하늘을 위해 온 사람이 아니라네.”

 

안좋은 인연에 앙금 남았을때
다 풀어버리고 화해하라 충고 


인간과 하늘을 위해 온 사람, 그는 곧 부처님을 의미한다. 나는 부처님이 아니라는 말은 한번 뒤집으면 ‘내가 그걸 꼭 알아야 되냐?’는 반문이 되고, ‘너에게 존중받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의사표시기도 하다. 종교에 몸담은 많은 사람들이 만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이 되고, 메시아가 되고, 보살이 되고, 선지식이 되기를 희망한다. 희망 정도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강박증에 시달린다. 또 개중에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며 큰소리치는 과대망상증 환자도 있다. 해서 다들 몰라도 아는 척, 조금 알면 다 아는 척, 성인 흉내 내기에 바쁘다. 그런 사람들 틈에서 ‘행복한 바보’를 만났으니, 눈 밝은 동산은 꽤나 반가웠을 게다. 동산은 어설픈 저울질을 거두고 정중히 예를 갖춰 여쭈었다.


“어떤 것이 손님 가운데의 주인입니까?” “오랜 세월 문지방을 나서지 않지.”
“어떤 것이 주인 가운데의 손님입니까?” “푸른 하늘이 흰 구름에 덮인 것이라네.”
“손님과 주인의 거리는 얼마나 됩니까?” “장강(長江)의 물과 파도지.”
“손님과 주인이 만나면 무슨 말을 합니까?”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쓸지.”


암나사와 수나사처럼 이빨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말씀이다. 허나 상대가 전개하는 이론(理論)을 따져 수긍하고 부정하는 데 그칠 동산이 아니었다. 시원찮은 저울대를 꺾어버린 동산은 용산의 본분자리에 동참할 요량으로 이론이 아닌 가슴 속 질문을 던졌다.


“화상께서는 어떤 도리를 보셨기에 이 산에서 사십니까?”

날고기처럼 뻐등뻐등 하지만 완전한 깨달음을 찾아 온 천지를 편력하던 동산에게 이보다 절실한 질문도 없었을 게다. 그러자 용산 스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내가 두 진흙 소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아직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네.”
그리고는 게송을 한 수 읊으셨다.


세 칸 초가집에 예전부터 사노라니/ 한 줄기 신령한 빛이 만 경계에 한가롭네./ 옳고 그름을 가지고 나와 따지려 하지 말게./ 부평초 같은 중생의 천착은 상관하지 않으니.


진흙소가 바다로 뛰어드는 순간, 승부는 의미가 없어진다. 승부는커녕 ‘소’마저도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공(空)의 바다로 뛰어드는 순간, ‘나’와 ‘너’의 관계에서 펼쳐진 갖가지 일들, 시비와 득실, 우열과 승패는 의미를 상실한다. 도대체 그런 일들이 누구에게 일어났단 말인가?


좋지 못한 인연으로 앙금이 남았을 때, 다들 ‘풀어버리고 화해하라’ 충고한다. 어떻게 풀어야 할까? 자신의 부족했던 점을 인정해 참회하고, 타인의 과오를 너그럽게 용서해야 할까? 그 마음을 적절하고 부드럽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 기왕이면 사과라도 한 박스 사들고 가서 손이라도 잡아야 할까? 물론 좋은 말씀이고, 칭찬받을 만한 행동들이다. 허나 용서할 그 사람이 맘속에 어른거린다면 진흙소가 바다에 뛰어들고도 펄펄 뛰어다니는 꼴이고, 화해를 위해 할 말이 남았다면 반야의 불길에도 혓바닥이 마저 타지 않은 꼴이다. 그러니, 공(空)의 바다에서 술술 풀어지는 것만 하겠는가?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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