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상 등지고 홀로 눈감은 보살님

기자명 법보신문

불치의 질병 걸리자 집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칩거
가족과 떨어진 채 임종 맞아

 

행복한 가정에서 성장하는 아이는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잘 드러낸다. 그러나 결핍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의 감정을 억압하고 욕구를 통제한다. 그렇게 진실한 모습을 숨기고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다보면 내면에는 허무함과 고독, 슬픔이 자리 잡는다. 결국 늦가을 잿빛 같은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둬버리고 가슴을 닫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불치의 질병에 걸리고 주변과 멀어지는 환자들은 대부분이 감정과 욕구를 억누른 채 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가족, 사회, 종교 모두를 거부하며 폭발적 분노와 원망 그리고 적개심 속에 휘둘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질병을 끌어안고 가족과 사회로부터 숨어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한평생을 살면서 건강하고 평안하길 바라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렇지만 누구나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불치의 질병을 얻게 되는 원인은 다양할 수 있다. 다만 지금 나의 몸과 마음의 상태가 현대문명의 오물과 탐·진·치에 오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행여 질병에 노출돼 치료가 필요한 상황에 있더라도 당당한 자신감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 나 역시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던 8년 전, 생사의 벼랑 끝에 서서 2년간 투병해본 경험이 있다. 질병으로 죽어간다는 것은 태풍이 덮친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침몰의 순간, 나는 부처님 가피 속에 있음을 굳게 믿으며 몸과 마음을 따사로운 햇빛처럼 평화롭게 놓아두었다. 결국 2년의 투병여정은 환자들의 힘겨움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동행할 수 있는 가슴을 키워나가는 계기가 됐다.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소중한 인연이 세상을 떠났다. 평소 어떤 불평도 없던 사람이었다. 화를 낼만한 일도 그저 웃음을 지으며 지나가곤 했다. 그리고 그 흔한 자식자랑 한번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고단했던 결혼생활과 고부갈등에 시달렸지만 그 누구에게 하소연하지 않았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가슴에 꼭꼭 묻으며 절에서 기도하는 즐거움 하나로 15년간 절집일 도와가며 삶을 살아냈던 보살님이었다. 가끔 돈이 생기면 정토마을 다녀가는 것이 나들이의 전부였을 만큼 내성적인 분이었다. 차라도 한 잔 내드리면 많이도 쑥스러워하셨던 고운 보살님…. 보살님 주변은 늘 편안했고 불화나 갈등이 없었다.


하지만 57세의 나이에 불치의 질병을 얻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가족, 도반, 사회, 의학적 치료 그리고 15년간 몸담았던 사찰과 스님에게도 연락을 단절하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버렸다. 가끔 내게 전화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마다 목소리를 통해 안부를 확인할 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꼈다. 치료를 권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부끄럽다’, ‘수치스럽다’, ‘내가 죄인인 것 같다’ 보살님의 말에는 분노, 절망, 슬픔과 후회가 가득할 뿐이었다.


“절집에서 15년간 기도하고 부처님 시봉하며 살았는데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어요. 내가 도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해 이런 병이 걸린 것일까요. 죄인이 된 것 같아요. 수치스럽고요.”


긴 통화로 마음을 나눠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보살님은 투병기간 동안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필요 없다는 말 속에서 깊은 원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을 지내다가 결국 병원 응급실에서 숨을 거뒀다. 가족과 도반들에게 더욱 깊은 죄책감만을 남겨두고 그렇게 세상을 등졌다. 유리처럼 차가운 육체만이 안치실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모습을 보며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 차가운 시신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능행 스님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늘 한줌 재가 되어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채 벗어나고 싶다고 말하곤 했는데…. 시월 마지막 날, 가족들의 일방적 결정으로 차가운 땅에 누워야 했다. 비록 한 줌 재가 되진 못했지만 다음 생에는 불국토에서 태어나기를 발원해본다.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 jungtoh7@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