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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김천 비봉산 봉곡사

기자명 법보신문
  • 집중취재
  • 입력 2012.11.21 11:16
  • 수정 2012.11.21 11:18
  • 댓글 0

땀과 눈물 신심 모아 가난 속에서 천년고찰 일구다

폐허로 변한 절 쌀 한줌도 없어
형님·동생 두 비구니 스님
영양실조와 싸워가며 노동

 

 

추수 끝난 김천 대덕면 조룡 2리 봉곡사 앞의 빈 논은 누워 있었다. 그러나 불손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어서 충만했다.

 


길은 냇물을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을 산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도 가도 산이 따라왔다. 김천 시내를 벗어나 한 시간 쯤 달려 봉곡사(주지 성주 스님)를 찾아갔다. 김천시 대덕면 조룡 2리. 봉곡사는 마을 속에 있었다. 절 앞은 바로 논이었다. 추수가 끝난 빈 논은 누워 있었지만 결코 불손하지 않았다. 비어 있어 오히려 충만했다. 일주문 옆에서 커다란 감나무가 키 작은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봉곡사는 신라시대 자장대덕이 창건한 천년사찰이다.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중수했다. 방방곡곡을 답사하며 숱한 비사(秘史)를 뿌렸던 도선국사의 얘기가 이곳에도 전해진다. 도선국사가 산 너머에 절터를 발견하고 절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들이 날아와 자귓밥을 물고 산을 넘어갔다. 괴이해서 따라가 보니 까마귀들이 지금의 봉곡사 자리에 자귓밥을 떨어뜨렸다. 그 자리에서 지세를 살피니 과연 명당이었다. 땅의 생김새를 깊이 따졌던 천하제일의 풍수사상가였지만 그 안목이 까마귀보다 하찮았다. 국사는 탄식하며 그 곳에 절을 지었다. 임진왜란 때 모든 전각이 불에 타버렸고 다시 1707년(숙종 33) 대웅전을 중수했다. 봉곡사 사적에는 1700년대 18전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절 앞의 논과 밭, 그리고 인근의 마을은 그 옛날 경내였을 것이다. 지금은 대웅전, 명부전 그리고 동상실과 2동의 요사가 서 있다.

 

 

성주 주지스님(왼쪽)과 형님인 지우 스님.

 


봉곡사는 비구니 사찰이다. 정갈하고 정겨운 그 속에는 지우 스님과 성주 스님이 있다. 두 스님은 학승인 일광(一光) 스님을 은사로 섬겼던 사형사제였다. 지우 스님은 독실한 불교 집안에서 자라 23세에, 성주 스님은 18세에 출가했다. 성주 스님은 갓을 쓴 비구니의 깨끗한 모습에 반해서 속가를 떠나왔다. 선방에서 용맹정진하던 두 스님에게 고된 시간들이 밀려왔다. 바로 은사 일광 스님 때문이었다.


은사스님은 신·구학문에 능통했고 사서오경에도 해박했다. 하지만 세월은 선방에도 찾아들었다. 은사스님은 몸이 불편했고 선방을 나와야했다. 선방은 대중처소이기에 머물 수가 없었다. 법문이 하늘같고, 가르침이 곧고 깊었지만 정작 병에 걸리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자비문중이라지만 절간에서도 병 든 선객은 갈 곳이 많지 않았다. 대개 독살이 절에서 뒷방이나 하나 차지하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일찍이 지허 스님은 ‘선방일기’에 이렇게 썼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맨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이 되고 만다.’


두 비구니 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시고 선방을 나왔다. 그러나 마땅히 의탁할 곳이 없었다. 또 선방생활에만 익숙했던 두 스님은 모든 게 어설펐다. 그러던 중 김천 지방 깊은 산 중에 빈 절이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봉곡사 대웅전 앞에 작은 탑 웅크리고 앉았다.

 


두 스님이 눈길을 걸어 절을 찾아갔다. 1980년 새해, 설날을 며칠 앞두고 있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쳐 절에 다다랐지만 눈앞의 절은 도저히 절이라고 할 수 없었다. 대웅전 앞에는 나무들이 빽빽이 서있었고, 무엄하게 법당을 기어오르던 등나무 줄기가 말라붙어 있었다. 법당 문을 열어보니 한낮인데도 깜깜했다. 부처님은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었다. 도저히 부처님 모실 자신이 없었다.


“부처님 죄송합니다. 저희가 힘이 없고 돈이 없습니다.”


세 번 절하고 이십 리 길을 걸어서 나왔다. 그러나 멀어질수록 부처님이 눈에 어른거렸다. 생각할수록 죄송했다. 김천시내로 나와 아는 보살의 가게로 들어가 절 이야기를 했다. 그랬더니 대뜸 보살이 석유곤로를 내밀었다.

 

시줏돈 모으고 모아 10년마다 불사
끊임없는 사경수행이 기적의 원천


다음 날 석유곤로를 들고 다시 절로 돌아왔다. 천천히 둘러보니 한숨만 나왔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명부전 문을 여니 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계셨다. 바닥에는 염소똥이 널려 있었고, 군데군데 마룻장이 꺼져있었다. 문을 열 때마다 건물 전체가 흔들거렸다. 부처님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할 수 없이 밖에서 예불을 드렸다.


고목 두 그루에는 온통 총구멍 자국이었다. 6·25전쟁 때 국군과 인민군이 사격 연습을 하던 나무가 그대로 방치되어 을씨년스러웠다. 들여다보니 소름이 돋았다. 대낮에도 짐승이 튀어나올까봐 마을 청년들도 법당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했다. 하루하루 폐사지로 변해가는 절을 바라보며 마을 사람들은 혀를 찼다.


“부처를 업어가든지, 스님을 업어오던지 해야지 원……”


더욱 난감한 것은 절에 남은 양식이 하나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김천시내에서 사온 다섯 개의 양재기와 숟가락 뿐이었다.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말 그대로 숟가락만 빨아야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섣달그믐날 마을 사람들이 쌀 한 말을 가져왔다. 동제(洞祭)를 지내려고 마련한 것이었다. 절에 스님이 들자 마을 사람들이 안도했다. 쌀 한 말에 두 스님은 세상을 얻은 듯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함박만한 웃음을 물었다.


“중이 좋긴 좋구나.”


철 없는 두 스님은 그중 닷 되로 가래떡을 했다. 부처님께 떡국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또 쌀이 떨어져 갔다. 두 홉 정도 남은 쌀로 밥을 하는데 도대체 밥이 되지 않았다. 이상하다 싶어 솥을 살펴보니 구멍이 나 있었다. 두 스님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 한참을 웃었다. 선방 스님에게 절 살림은 낯설고도 어려웠다. 청년 하나가 두 스님을 도우려 절에 들었다. 불심이 두터운 아버지가 아들에게 두 스님을 도우라고 했다. 청년은 부지런히 나무를 해 날랐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청년이 밥을 너무 먹는 것이었다. 고봉밥을 퍼주어도 뚝딱 먹어치웠다. 며칠 후 청년이 홀연 절을 나서겠다고 했다. 스님들이 의아해했다. 청년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을 나무랬다. 청년이 말했다.


“제가 절에 있으면 두 스님이 굶어 죽을 것 같아 내려왔습니다.”


설날이 지나자 쌀 시주가 들어왔다. 두 스님은 본격적으로 청소를 했다. 쌓인 낙엽은 치우고 치워도 끝이 없었다.

 

경내의 돌과 기와 파편은 주워도 주워도 끝없이 나왔다. 석 달을 그렇게 열심히 치웠다. 성주 스님은 낙엽 밑에 숨어있던 간이해우소에 빠져 똥독이 오르기도 했다. 지우 스님은 대웅전 계단을 내려오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선방에서 책장을 넘기던 손에 괭이가 박히고, 얼굴은 새카맣게 그을렸다. 천년 고찰의 면모는 아니더라도 절 꼴이 묻어났다.


마침내 봉곡사에 봄이 찾아왔다. 두 스님은 은사스님을 모셔왔다. 스님은 두 스님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5년 동안 머물다 돌아가셨다. 일광 스님은 마지막에 “봉곡사 5년이 지난 30년보다 더 귀하다”고 했다. 입적하기 닷새 전 두 스님을 불렀다. 한 손은 지우, 또 한 손은 성주의 손을 잡았다.


“나를 보살펴 줘서 고맙다. 그걸로 되었으니, 내가 죽거든 염불도 하지 말거라. 나는 그냥 떠나겠다.”
그리고 마침 몸이 불편한 지우 스님을 보며 말했다.
“모든 병은 내가 가져가겠다.”
은사스님을 떠나보내고 두 스님만 남았다. 두 스님은 서로의 욕심을 없애주는 스승이었다.
“우리 형님은 솔직하고 담백하며 정확하시다.”
“우리 아우님은 마음이 맑고 고와서 내가 부끄럽다.”


두 스님은 천년 고찰의 향기를 찾도록 불사를 하고 싶다고 기도했다. 기도의 마지막은 한결같았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게 해 주십시오.”

 

 

사경을 하고 있는 주지 성주 스님.

 


들어온 시주 돈은 아끼고 아꼈다. 신도들도 적고 찾는 이도 드문 작은 절이었지만 쓰지 않으니 돈이 모였다. 우선 명부전을 새로 지어야 했다. 문만 열면 명부전 전체가 흔들렸고, 기울어진 부처님이 쓰러질까봐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그것이 또 죄송했다. 두 스님은 인연이 있는 곳은 모두 찾아갔다. 도반들은 헌신적으로 도왔다. 마침내 튼튼한 명부전을 지었다. 부처님을 단정히 모시고 상량을 하려는데 그 옛날 상량문이 나왔다. 숙종 16년(1690년) 4월19일 오전 11시에 창건했다는 내용이었다. 상량식을 올리는 시각이 바로 1985년 음력 4월19일 오전 11시였다. 295년을 사이에 둔 똑 같은 시각이었다. 인연이 무서웠다. 두 스님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명부전을 새로 짓고도 돈이 남았다. 그걸로 일주문을 세웠다. 비로소 대문을 만들었으니, 이제 그만 되었으니 이름을 걸라는 부처의 뜻이 아닌가. 이후 대웅전을 새로 짓고 단청을 했다. 거의 10년 만에 한번 꼴의 불사였다. 원을 세우고 세워서, 아끼고 아껴서 이루었다. 늘 아슬아슬했지만 부처님이 채워주셨다.


봉곡사는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나 두 스님은 여전히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한다. 두 스님도 상좌들을 두고 있다. 상좌들은 외국으로 공부하러 떠났다. 이제 두 스님은 자식들을 객지로 떠나보내고 옛집을 지키는 어머니 같다. 두 스님에게 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수행하다가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읽다가 세상을 뜨고 싶습니다.”

 

 

인쇄물처럼 반듯한 스님의 사경.

 


형님인 지우 스님은 지금 몸무게가 37kg에 불과하다. 2년 전에 지독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장 일찍 일어나 쉼 없이 일하고 있다. 두 스님이 머무는 방에는 묵향이 그윽하다. 끊임없이 사경을 하기 때문이다. 글씨가 반듯하여 인쇄를 해 놓은 듯하다.


45년을 함께 지내며 딱 세 번 싸웠다는 두 스님. 가난한 절 봉곡사에는 절보다 더 마음이 가난한 두 비구니, 형님과 동생이 있다. 지우, 성주 스님이 있어 천년 고찰 봉곡사가 새로 일어섰다. 봉곡사에 가면 부처님만 보고 나올 일이 아니다. 두 스님에게도 절을 올릴 일이다.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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