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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간다라 불교 사원 제대로 알기

기자명 법보신문

간다라의 그리스 영향은 낙서일뿐

 

▲ 1. 벽체 장식판 시무외인 불상 조각.

 

 

동아시아 실크로드로의 불교 전파 길목이었던 간다라의 사원을 보기로 하자. 역사, 미술 교과서에 간다라 미술이라 잘 알려진 이 지역은 현재 파키스탄 북부, 동쪽 탁실라에서 서쪽 아프가니스탄 국경의 페샤와르 그리고 중간의 마단, 또 북쪽 말라칸드 고개 넘어 인더스 강의 발원지 스와트 계곡 등 네 지역이다. 지금은 정치정세가 불안하여 가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예배의 중심이 아닌 불상

 

 

▲ 2. 스투파 기단의 불상 조각.

 

 

넓은 지역 간다라의 오랜 역사의 누적을 “간다라 식”이라고 좁은 지면에 뭉뚱그리기는 불가능하다. 간다라는 서방 여러 세력들이 인도로 쳐들어가는 주 통로였고 또 인도 불교 문명이 밖으로 퍼져나가는 병목에 해당된다. 그 중 20대 청년 그리스의 알렉산더 왕이 B.C.4세기 페르샤에 이어 인더스 강 유역 간다라까지 침공하여 대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 직후 불교 전파의 왕 아소카가 서진하여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 후 박트리아, 쿠샨 왕조들이 여러 차례 각축을 벌였다.

 

 

▲ 3. 스투파 중심 탑원과 좌측의 승원. 탁실라 다르마라지카 사원.

 


제한된 지면에서 우리가 아는 교과서적 상식과는 다른 간다라를 말하고자 한다. 인도에서는 석굴이 일렬로 죽 배치되었었지만 간다라 사원에서는 예배 스투파 탑원과 독방 수행처 승원 두 영역이 1대 1로 확연하게 대응하는 양원식 배치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래도 간다라 불교사원은 여전히 스투파 탑원이 중심이다. 기존 미술사학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간다라 하면 불상에 집착한다. 그리스 신상으로부터 인도의 불상이 시작되었다면서 말이다. 식민시대 서양 선진문명이 후진 동양문명을 깨우쳐주러 왔다고 과거 역사를 동원한다. 마치 식민 침략 일본인들이 과거 자기네가 우리보다 앞선 문명이었다는 역사왜곡을 해왔듯이. 인도에는 굳이 마투라의 불상을 들지 않더라도 고대로부터 토착 신상을 많이 만들어왔다.

 

 

▲ 4. 다르마라지카 스투파와 주위 빙 두른 불상방.

 

 

서양학자들이 흐뭇해하듯 간다라는 그리스 영향을 받았지만 인도 전체 국면에서 보면 좁은 지역 짧은 시간의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간다라 불상은 우리 절의 대웅전에 모신 중심 불상과는 거리가 멀다. 발굴된 간다라 조각에는 부처상도 있지만 오히려 보살상들이 더 많고 불전도 상의 여러 인물 상들이다(그림1). 불상은 예배의 중심이 아니라 부차적 들러리였다. 스투파 아래 기단에 또는 탑 주위 외부를 빙 둘러 보좌하는 것이 불상이다(그림2). 사원에서 중심 위치를 차지하는 불상 전각은 없다. 불상을 중심으로 간다라 미술을 말함은 서양 식민주의와 일본인 학자들의 불상 과잉주의의 결과다.

 

 

▲ 5. 스투파와 주위 불상방의 원형 탑원. 젝켈의 승원 지칭 오류 현장 자말가르히.

 


탁실라의 다르마라지카 사원도 역시 대스투파가 한 가운데 모셔져 있고(그림3) 그 주변을 불상을 모신 방들이 빙 둘러 옹위한다(그림4). 물론 그 사이는 탑돌이길이다. 국내 미술사학계에 영향력이 큰 ‘불교미술’의 저자 독일 석학, 일본에도 10년간 머물렀던 디트리히 젝켈이(1910~2007) 실족을 했다. 그가 원형 승원, 즉 가운데 스투파 주위를 원형으로 빙 둘러 수행 독방이 있다고 쓴 것이 알고 보니 가짜였다. 가보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도면만 보고 지레짐작한 것이다. 필자가 죄다 다녀보고 단언컨대 인도에 원형 승원은 없다. 문제의 산꼭대기 자말가르히 사원은 평면 그림에서와 같이 중심 스투파를 빙 둘러 승방이 아니라 불상방이 있다(그림5). 독방 속에 불상을 모셨다. 현재는 빈 방의 조각상은 일부 페샤와르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서양 학자 주장을 무조건 믿는 우리 후진 학문이 문제다.

 

스투파 주위엔 수행 독방 없어

 

 

▲ 6. 정형화 된 탁트이바히 사원. 탑원에서 내려다본 승원. 왼쪽에 주방, 식당, 강당, 창고 등의 부속시설.

 

 

여러 차례 이슬람 침공에 의해 한 동안 번성했던 불교 사원은 철저히 방화와 학살과 더불어 파괴되고 유적으로서만 존재한다. 현재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거의 버려진 불교 폐허 유적을 찾아가는 자체가 쉽지 않다. 다만 일부 유적에는 일찍이 일본인들이 원조 발굴하여 일본말 안내판이 있기도 하다. 마단 지역 산꼭대기의 탁트이바히 사원 유적은 동아시아의 불교 사원 모습을 갖춘 정형사원으로 유명하다(그림6). 탑원과 승원 두 영역과는 별도로 탁발 중심 초기불교에서 불필요했던 취사, 식당, 강당, 창고의 부속 영역이 함께 사원을 구성한다.

 

 

▲ 7. 탁트이바히 탑원 스투파 복원 상상도.

 

 

지금은 스투파는 사라지고 바닥 기단만 남아있다. 건축역사학자 퍼시 브라운이 전에 상상 복원도를 그렸다(그림7). 누군가가 불교도래 성지 영광 법성포에 실물로 지어놓았다(그림8). 건축학 전공 필자 판단으로 그런 스투파는 있을 수 없다. 돌로 된 불안전 가분수 구조물 양산은 일시적으로는 견딜 수 있지만 얼마 못가서 자연에 의해 파괴되고 만다. 우리 수많은 석탑 상부가 온전히 남아있는 곳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탑상부가 벼락 맞아 파괴된 역사 기록이 숱하게 많이 나온다. 돌은 쌓아야 견고한데 이처럼 큰 얇은 석판을 양산대에 꽂아 넣어서는 소형 봉헌탑으로서는 몰라도 오랜 세월 견딜 수 없다.

 

 

▲ 8. 영광 법성포에 재현해놓은 탁트이바히 탑원 스투파.

 


간다라 지역이 불교 전파상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틀림없으나 상당히 왜곡되어있다. 서양 그리스의 미술 영향으로 불상이 태어났다는 것은 서양 식민주의의 과장이다. 또 중요한 것은 불상이 우리처럼 사원의 예배 중심에 있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었다는 점이다. 또 불교가 중국을 통하여 동아시아로 전파되는 경로는 육로 못지않게 실크로드 해로 또한 중요한데 해로를 통한 전파에서 간다라의 중요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간다라 사원의 탑원과 승원의 양원식 배치는 동아시아 중국, 한국, 일본 사찰에서 형상 숭배 불당이 중심에 오고 스님 수행처 승원이 중심에서 밀려나게 변화된다.


▲이희봉 교수

다음호에서는 인도 종교의 만신전 엘로라 석굴에서 인도 불교의 끝 무렵을 보도록 한다.


이희봉 중앙대 건축학부 교수 hblee@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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