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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파조타(破竈墮), 톡 톡 두드리다

기자명 성재헌

본래 성품 제대로 알면 누구나 깨달아

산 생명 제물로 받는 조왕신에

본성이 찰흙임 알게 해 깨우쳐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찬비에 후드득 지는 낙엽이 낯설질 않다. 봄이면 싹트고, 여름이면 무성하고, 가을이면 낙엽지고, 겨울이면 말쑥한 일기(一期)의 순환, 어느 생명체도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그 언저리에서 봄·여름보단 가을·겨울이 더 익숙한 걸 보면, 나도 이제 삶의 쓸쓸함을 알 나이가 되었나보다. 그래서일까? 이젠 웃음보다 눈물이, 만남보다 헤어짐이 익숙하다.

 

모든 건 인연 따라 모였다 인연 따라 흩어진다 하신 붓다의 말씀, 역사와 문화의 장벽을 넘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만고의 진리이다. 그 한 구절에서 ‘모임’ 보다 ‘흩어짐’에 눈길이 쏠리는 걸 보면, 나도 이제 삶의 쓰라림을 알 나이가 되었나보다. 그래서일까? 이젠 가슴 속에 담고 싶은 것보다 가슴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 많아진다.

 

인연의 모임과 흩어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인생의 전반부는 덧셈과 비슷하고 인생의 후반부는 뺄셈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덧셈과 뺄셈, 연필심을 쪽쪽 빠는 어린아이도 술술 푸는 수학의 기초이다. 허나 삶에서는 더하기도 빼기도 그리 수월치가 않다.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인 법인데도, 삶의 수학에서는 셋이나 넷 아니 다섯이어야 마땅하다고 욕심을 부린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그렇게 더하려 들었으니, 그런 욕망의 셈법이 실상(實相)과 맞아 떨어질 리 없다. 해서 다들 원하는 걸 뚝딱! 성취하고 싶어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만, 도깨비방망이와 알라딘의 램프는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다.

 

둘 빼기 하나는 하나인 법이다. 하지만 삶의 수학에서는 다들 여전히 둘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아무리 막아도 강물은 흐르고, 아무리 꽉 쥐어도 모래는 손가락 틈새로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나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아니 그럴 수 없다며 실낱같은 인연의 끝자락을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진다. 하지만 그런 집착의 셈법을 하늘이 용납하실 리 없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저만 모를 뿐, 이미 그에게는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덧셈을 제대로 해야 욕심쟁이 혹부리 영감 소리를 면하고, 뺄셈을 제대로 해야 부끄러움도 모르는 임금님 소리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건 삶에서 덧셈과 뺄셈을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지 싶다. 삶의 후반부로 접어들었으니, 덧셈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과실이야 이왕지사로 돌려도 별탈이 없지 싶다. 이젠 뺄셈이라도 제대로 배워야 할 땐데…, 그게 참 쉽질 않다.

 

놓아버리고 돌려주어야 할 때라는 것, 머리로야 백번 지당하다며 수긍한다. 하지만 “이걸 내가 어떻게 얻었는데” 싶어 콩 한쪽도 선뜻 양보하질 못하고, “내가 왕년에 말이야~”로 시작되는 낡아빠진 감투의 추억은 좀체 잠잠해지질 않는다. 이런 집착과 교만의 동아줄을 술술 풀어버리고, 슬픔과 번민의 짐을 퍽퍽 덜어낼 묘수가 어디 없을까?

 

‘벽암록’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숭악(嵩嶽), 깊은 산중턱에 이름 모를 한 노스님이 살고 있었다. 그 산 아래 길목에는 조왕신(竈王神)을 모신 유명한 사당이 하나 있었다. 그 사당의 부뚜막에 솥을 걸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올리면 신통하게도 소원이 척 척 이루어졌다고 한다. 욕심이 드글드글한 사람이 온 세상에 버글버글하였으니, 그 사당엔 소와 돼지, 양과 닭의 목 따는 소리와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었다. 마을로 화주를 다닐 때마다 그 잔인하고 무지한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스님이 어느 조용한 날 시자 둘을 데리고 사당을 찾았다.

 

구부정한 허리를 지팡이로 지탱하고서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사당을 둘러본 스님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쯧! 그대는 본래 찰흙으로 빚어진 것이다. 신령함이 어디에서 오고, 성스러움이 어디에서 왔기에 이리 숱한 생명들을 죽인단 말인가?”

 

그리고는 짚고 있던 지팡이로 사람들이 신으로 받드는 부뚜막과 옹기를 톡, 톡, 톡 가볍게 세 번을 두드렸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깨져라, 무너져라.”

 

가르침 달라 투정부린 제자엔

머리를 세번 두드려 깨닫게 해

 

그러자 옹기며 부뚜막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리고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푸른 옷에 높은 관을 쓴 사람이 나타나 스님에게 공손히 절을 올렸다.

 

스님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저는 이 묘당의 조왕신입니다. 오랫동안 업보를 받아왔는데 오늘에야 스님으로부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설법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이곳을 벗어나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깜짝 놀라 뒤로 넘어진 사람들 틈에서 노스님은 태연한 표정으로 조왕신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의 본래 성품이 그런 것이지, 내가 억지로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조왕신은 재차 절을 올리고 이내 사라졌다. 잠시 후, 뜻밖의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던 시자가 정신을 차리고 노스님에게 여쭈었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스님을 모셨지만 아직껏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는데, 부엌신은 왜 대뜸 깨달음을 얻어 곧바로 하늘나라에 태어났습니까?”

 

노스님이 도리어 의아하단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희도 보았지 않았느냐. 본래 찰흙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뿐, 그를 위해 특별한 도리를 가르쳐 준 것이 없다.”

 

뚱한 표정으로 시자가 말이 없자 노스님이 되물었다.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알고 싶거든 너도 조왕신처럼 절을 해 보거라.”

 

두 시자 공손히 절을 올리자 노스님이 지팡이로 머리를 똑, 똑, 똑 가볍게 세 번을 두드렸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씀하셨다. “깨져라, 깨져라. 무너져라, 무너져라.”

 

이 한 마디에 두 시자가 홀연히 크게 깨쳤다고 한다. 나중에 의풍(義豊)선사가 이 이야기를 장안의 혜안국사(慧安國師)에게 전하자, 국사가 탄복하며 소리쳤다고 한다.

 

“이분은 물아일여(物我一如)를 완전히 깨달았구나.”

 

이후 세상 사람들은 그를 조왕신을 때려 부순 선사라는 의미로 파조타(破竈墮) 선사라 불렀다. 파조타 선사의 지팡이가 탐난다. 집착의 사실에 묶여 슬픔과 번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의 머리를 그 지팡이로 톡톡 두드려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타이르고 싶다.

 

“쯧쯧! 그대는 본래 사대(四大)와 오온(五蘊)이 잠시 모인 것일 뿐이다. 그대의 사랑과 명예가 어디에서 오고, 행복과 불행이 어디에서 왔기에 이리 악착같이 붙들고 놓칠 못하는가!”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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