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여시오어(汝屍吾魚)’라는 화두
22. ‘여시오어(汝屍吾魚)’라는 화두
  • 김상현 교수
  • 승인 2012.12.11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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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한 마리에 담긴 도인의 삶과 죽음의 미학

오어사는 ‘내 물고기’ 라는 뜻
절의 본래 이름은 항사사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했던
신라 고승 혜공 스님이 주석


원효 스님에게 큰 영향
‘여시오어’의 설화 남겨


“너는 똥을 누었지만
나는 물고기 누었다”  의미

 

 

▲신라 고승인 혜공 스님이 주석했던 오어사. 절 이름인 오어사는 ‘내 물고기’란 의미로 혜공 스님과 원효 스님의 설화가 화두처럼 전해진다.  문화재청 제공

 


포항의 운제산 동쪽 항사동에는 천 수백 년 오랜 세월 등불을 밝혀오는 절 하나가 있다. 곧 오어사(吾魚寺)다. ‘내 고기’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절이다. 이 절의 본래 이름은 항사사(恒沙寺), 항하사 모래처럼 많은 출세자가 배출되기를 바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절이 오어사로 불리게 된 것은 사연이 있었다.


7세기 전반 항사사에는 당대의 고승 혜공(惠空)이 살고 있었다. 원효도 운제산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산 중턱의 원효암이 그가 살았던 절이다. 젊은 원효가 만년의 혜공을 예방했던 시기는 진덕여왕대(647-653) 무렵이었다. 30대 중반 무렵의 원효는 혜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언제나 혜공에게 나아가 질의했다는 기록이 이를 알려준다.
혜공은 귀족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 하던 노파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비출신이었던 것이다. 어릴 때의 이름은 우조(憂助), 그는 일곱 살 때 거의 죽게 되었던 주인의 병을 고쳐 줄 정도로 총명하고 신이했다. 성장하면서는 매를 기르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은 주인이 그의 동생에게 주었던 매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아차려 주인이 말하기 전에 그 매를 가져다 줄 정도로 그는 지혜로웠다. 이에 주인은 보살이 자기 집에 의탁하고 있는 것이라고 절을 할 정도였다. 그는 주인의 권고로 출가했고, 법명이 혜공(惠空)이었다.


혜공의 행동은 아무 거침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작은 절에 살았고, 미친 듯이 크게 취해서는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또한 언제나 삼태기를 걸머지고 다녔다. 이 때문에 그의 별명은 부궤화상(負和尙)이었고, 그가 사는 절은 부개사(夫蓋寺)로 불렀다. 부궤는 삼태기라는 방언, 삼태기를 걸머지고 다니는 스님이라는 호칭이 그를 따라 다녔던 것이다. 화랑 구참공이 어느 날 산길을 가다가 혜공스님이 길에 쓰러진 채 죽어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시체는 썩어서 구더기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이를 본 구참공은 한참 동안이나 슬픈 마음에 젖었다. 그런데 그가 성(城)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혜공을 보았다. 대단히 취해서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모습의 혜공을. 죽음과 삶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 셈이다. 혜공의 무애행을 일연은 화광동진(和光同塵)으로 이해했다. 그가 갖가지 자유로운 모습으로 시중에 나타난 것은 대중 교화를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는 미친 듯이 행동하면서도 신이한 도력을 가진 고승이었다. 절의 우물 속에 들어가 몇 달씩이나 나오지 않는 독특한 수행을 하기도 했다. 우물에서 나올 때가 되면 매양 푸른 옷의 신동이 먼저 솟아나왔기에 절의 스님들은 혜공이 우물에서 나올 시각을 알 수 있었고, 우물에서 나온 그의 옷은 젖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우물은 스님의 이름을 따서 혜공정(惠空井)이라고 했다.


혜공은 지귀설화와도 관련이 있었다. 어느 날 혜공은 영묘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풀로 꼬은 새끼를 금당(金堂)과 좌우의 경루(經樓), 그리고 남문(南門)의 낭무(廊)에 둘러쳤다. 일종의 금줄을 친 셈이었다. 그 절의 승려들에게 당부했다. 이 새끼줄을 3일 뒤에 풀도록 하라고. 과연 3일 후 이 절에 불이 났지만 새끼줄을 쳐둔 곳에서는 화재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귀(志鬼)의 가슴속에서 타고 있던 사랑의 불꽃이 영묘사로 번져 붙을 것까지도 그는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혜공은 만년에 항사사에 살았다. 원효가 혜공을 찾은 것은 이 무렵이다. 원효는 혜공에게 자주 질의를 했다. 그는 혜공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것 같다. 그러나 성품이 활달하고 행동이 무애하던 이 노승은 젊은 원효에게 교리만을 점잖게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젊은 원효와 함께 희롱하며 소일하기도 하였다.


하루는 젊은 수행자와 나이 많은 고승이 어울려 항사동 시냇물에서 고기를 잡아먹었다. 그리고는 돌 위에 걸터앉아 대변을 보았다. 혜공이 변을 가리키며 ‘여시오어(汝屎吾魚)’라고 희롱했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지만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는 해석이 이 설화의 구조상 적절할 것이다. 물고기를 잡아먹고 물속에 똥을 누었더니 그 물고기가 문득 살아났기에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내 고기라고 했다는 설화가 조선 초기까지도 세상에 전해지고 있던 것과도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여시오어’라는 말을 혜공이 아니라 원효가 했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연은 원효가 여시오어라고 했다는 설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 원효의 비인 서당화상비에도 항사광언(恒沙狂言)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앞뒤가 끊어졌기에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기에 얽힌 항사사설화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원효가 항사사에서 미친 듯한 말을 했다는 비문의 구절에 유의하면, 원효가 ‘여시오어’라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독사가 풀을 먹으면 독이 되지만 젖소가 풀을 먹으면 우유가 된다. 같은 물고기를 먹고도 도가 낮은 사람은 구린내 나는 똥만 배설하고, 도가 높은 이는 다시 살아 있는 고기를 낳을 수 있다.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다. 혜공은 희롱조의 말 속에 깊은 의미를 담아 젊은 원효를 일깨워 주고 있었던 것이다. 잡아먹은 고기를 어찌 다시 살릴 수 있는가? 칼릴 지브란의 시를 보자.


“그대 이빨로 사과를 깨물 때면 마음속으로부터 속삭이리라./ 그대 씨앗은 나의 몸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그대 미래의 싹은 나의 심장 속에서 꽃 피리/ 그리하여 그대 향기는 내 숨결이 되어 우리 함께 온 계절을 누리리라.”


우리가 먹는 사과 하나, 그것의 씨와 싹과 향기가 우리의 몸을 통해 다시 살아나기를 기원하는 시인의 마음과 잡아먹은 고기를 다시 살려놓았다는 혜공의 도력은 같은 문맥이다. 우리가 먹은 사과 하나, 그 사과가 어떻게 내 몸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인가? 우리가 잡아서 먹은 물고기 한 마리, 그 물고기를 무슨 도력으로 살려놓을 수 있단 말인가?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사실 그것이 문제다. 진정한 살림꾼은 그와 만나는 모든 것을 잘 살려가는 사람이다. 도력이 있는 사람은 살릴 수 있지만, 도력이 없는 사람은 자꾸만 죽인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삶이 있고, 집안 살림이 있으며, 또 나라의 살림도 있다. 우리들 인생의 삶은 홀로이면서 동시에 더불어 사는 것, 그러기에 ‘살다’라는 자동사도 있고, 또한 ‘살리다’라는 타동사도 필요한 것이다. ‘살다’의 명사형이 삶이며, 살림은 ‘살리다’의 명사형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집안이나 국가의 살림을 살아야 한다.


삶의 반대편은 죽음이다. 또한 ‘살리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죽이다’라는 단어도 있다. 이 두 단어를 함께 묶어 놓으면 죽고 살기가 되고 생사(生死)가 된다. 살다 혹은 죽다. 그리고 삶이나 죽음 등의 단어는 기본적으로 생물의 목숨과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생명체의 생사에만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연탄불이 죽었다고도 하고, 불을 살린다고도 한다. 기가 죽을 수도 있고, 기를 살릴 수도 있다. 시간을 금 쪽 같이 쪼개면서 잘 쓰면 시간이 살고, 시간을 낭비하면 시간은 죽는다. 의미 없는 글은 죽은 글이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는 글도 있다. 분위기 살리자고 말할 때도 있다. 이처럼 분위기에도 죽음이 있고 삶이 있다. 성을 잘 내는 사람은 자주 주위의 분위기를 죽인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언짢게 만든다. 환한 꽃으로 피어나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진정 살릴 줄 아는 사람이다.


살림을 잘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도 살려가고 집안 살림도 살려간다. 살림꾼은 가족의 건강을 보살피고, 집안의 분위기를 살려간다. 나라 살림도 마찬가지다. 욕심으로 나라 일을 맡는다면, 자신의 능력도 헤아리지 않고 국정을 맡는다면, 나라 살림은 흔들린다. 죽여서는 안 된다. 죽이지 말라. 화를 내어 주위의 분위기를 죽여서도 안 되고, 능력 없는 사람이 요직에 앉아서, 그 집단 전체의 살림을 거덜 내어서도 안 된다. 자기 자신과 만나는 그 어떤 것도, 그것이 집안의 작은 일이든, 나라의 중대사이든, 혹은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일지언정, 그 모든 것을 살려 가는 사람은 진정한 살림꾼이다. 마음에 사랑이 있고 자비로움이 있으며, 진정 성실하고 알뜰한 사람은 그와 만나는 그 어떤 것도 살려간다. 자심불살(慈心不殺)이기에. 불살생은 죽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다 적극적으로는 살려가는 것이다. 살려가는 것을 우리는 살림이라고 한다.


여시오어, 너는 똥이고 나는 고기다. 그대가 배설한 것은 똥이지만 나는 다시 고기를 살려놓았소. 혜공과 원효 사이에 있었다는 이 말은 두고두고 풀어야할 화두다. 두 스님이 함께 고기를 잡아먹고도 한 사람은 냄새나는 똥이나 싸지만, 한 사람은 다시 그 고기를 살렸다는 이야기는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하루 세 끼 밥을 먹고도 어떤 사람은 냄새를 풍기며 살고 어떤 사람은 진정한 살림꾼으로 산다.

 

▲김상현 교수

살림꾼은 그가 만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죽이지 않고 살려가는 사람이다. 불살생, 생명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 죽이지 않는 것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살려가고 살려내는 살림살이야말로 더 중요하다. 우리가 먹은 하나의 사과가 우리들 인생의 향기로 되살아나고 우리가 먹은 한 마리의 물고기가 다시 우리들의 멋진 삶의 활력으로 되살아나기를 빌어보자.


김상현 교수 sanghyun@dongguk.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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