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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 외면에 쓸쓸하게 세상 떠난 거사님

기자명 법보신문

‘못 배운’ 소외감 속에서

가정을 위해 헌신했지만

외로운 병실서 홀로 임종

 

자재병원 앞산 마루에 눈처럼 쌓인 구름이 눈비 되어 내린다. 고헌산은 눈물 나게 아름답고 그리움은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따뜻한 마음 담은 시를 내 손에 꼭 쥐어주시던 거사님. 낙엽 가득한 정토마을 숲길을 걸으며 어머니 품속 같은 흙에 묻히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거사님의 그림자가 산마루에 드리웠다.

 

거사님은 8살이 되던 해에 해방을 맞았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 이북에서 내려와 전라남도 해남에 자리를 잡았다. 허기질 때마다 밥 대신 물로 배를 채워야 할 만큼 어려웠고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거사님은 16살에 서울로 올라와 일을 시작했다. 돈을 벌어 가게를 내고 어머니를 서울에 모시려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곧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지인의 소개로 공부를 많이 한 아내를 만났고 슬하에 3남1녀를 뒀다.

 

거사님은 많이 배운 아내와 대학을 졸업한 자식들 사이에서 늘 주눅들고 외로웠다고 했다. 후에 정토마을 숲속을 거닐고 오실 때마다 시를 적어 내 손에 건네주셨는데, 공부를 했다면 시인이 됐을 거라는 말씀을 자주하셨을 정도로 배움에 대한 목마름이 컸다.

 

“돈도 많이 버셨고 아들, 딸, 아내까지 다 있는데 서울에 계시지 않구요.”

 

“가족 있으면 뭐하나요. 몸이 아프고 나서는 간병인이나 파출부가 해주는 밥을 먹어왔어요.”

 

서러움이 전해졌다. 남편의 투병을, 아버지의 투병을 타인에게 맡겨놓고 자신들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느라 분주했던 것 같다. 거사님은 정토마을에 3개월 정도 계셨지만 큰아들만 몇 번 들렀을 뿐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외로움을 많이 타셨던 거사님. 눈빛만 마주쳐도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주시던 거사님은 떠나시기 5일전, 전할 편지가 있다며 나를 부르셨다.

 

‘스님, 나는 일평생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항상 아내를, 자식들을, 가정을 지키려고 애쓴 기억밖에는 없어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내 분수에 맞는 아내를 얻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다음 생이 없다면 너무 억울합니다. 날마다 돈을 바라보며 살았는데, 병드니 그 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네요. 스님이라도 일찍 만났다면 나눠드렸을 텐데 자식들에게 모두 나눠주고 내 수중에 한 푼도 없어 죄송할 뿐입니다. 스님, 이제 곧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내 부모님 만나러 가는 길이지만 외롭게 혼자서 죽는다고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스님께서 꼭 제 곁에 있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싸늘한 병실에서 혼자 죽을까봐 정토마을에 왔습니다. 나 떠난 후에는 해남 땅 바다가 보이는 어머니 무덤 곁에 묻어달라고, 스님께서 우리 애들에게 당부해주세요. 애들은 서울서 멀다는 이유로 안 된다 했지만 저는 그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죽어서는 어머니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다음 생에는 돈만 벌 줄 아는 남편, 아비노릇 하지 않겠습니다. 시인이 될 겁니다. 이곳은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거사님의 외로움이 서늘한 빗물이 되어 편지 곳곳에 흘러내렸다. 그것을 읽으니 아릿한 슬픔이 목까지 차올랐다. 병실로 올라가 손을 잡아드렸다.

 

‘자상하고 따뜻한 시인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곁에 꼭 있어드리겠습니다.’

 

눈빛으로 마음을 전했다. 거사님 눈가에 굵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내렸다. 큰아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내려오라고 연락했다. 거사님께서 떠나시기 3일전 밤, 큰아들이 병상에서 하룻밤을 보냈지만 부자간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위독하면 연락해달라는 부탁만을 남긴 채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아버지가 저렇게 앙상하게 죽어가고 계신데,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단 말인가…. 거사님의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은 곁에 없었다.

 

▲능행 스님

요즘 늙고 병든 남편, 아버지가 갈 곳을 잃고 배회하는 사례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우리사회, 우리들의 가정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버지는 돈을 버는 기계가 아니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숨죽여 울고 있는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일수도 있다.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 jungtoh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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