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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번만번 밟고 다니면서 알지 못해 깜깜하기만 해”

기자명 법보신문

진실한 마음 내기 어렵고
불법은 심오하고도 깊어


홀로 밝은 것 있다 말해도
믿지 못하고 문구에 집착

 

 

▲스스로 향산거사라 칭하며 불법의 세계에서 만년을 보냈던 백낙천의 절 향산사. 지나친 화려함으로 청빈한 정신세계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如有眞正學人이 便喝하야 先拈出一箇膠盆子어든 善知識이 不辨是境하고 便上他境上하야 作模作樣하면 學人이 便喝에 前人이 不肯放하나니 此是膏盲之病이라 不堪醫니 喚作客看主니라
或是善知識이 不拈出物하고 隨學人問處하야 卽奪이라 學人이 被奪에 抵死不放하나니 此是主看客이니라

 

해석) “만약 진정한 학인이 있어서 갑자기 ‘할’을 하며 아교풀을 담은 항아리를 하나 내놓는다. 그런데 선지식이 이것이 경계인 줄 모르고 이내 그 경계에 올라타 이리저리 생각하고 궁리를 한다. 이에 학인이 다시 ‘할’을 하여도 선지식은 이를 놓지 못하니 이것은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다. 이런 경우를 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또 어떤 선지식은 아무 것도 내놓지 않고 학인이 질문하면 그대로 빼앗아 버린다. 학인이 빼앗기고도 죽어도 놓아버리려 하지 않으면 이것을 주인이 손님을 간파한 것이라고 한다.”

 

강의) 지금부터는 스승과 제자가 만났을 때 드러나는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학인이 큰스님을 찾아와서 갑자기 ‘할’하고 고함을 친 것은 스승을 시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여기서 학인이 내 놓았다는 ‘아교풀 담은 항아리’는 함정이나 처치가 곤란한 말이나 행동을 뜻합니다. 아교풀은 끈적끈적해서 처리하기가 힘듭니다. 접착력이 좋아서 약간만 묻어도 그냥 붙어버립니다. 아마 이해하기 어려운 화두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데 큰스님이 그리 밝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아교풀에 딱 붙어버려서 자신을 시험하는 경계인 줄 모르고 궁리하고 또 궁리합니다. 그 말에 집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학인이 다시 고함을 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이 없습니다. 불치의 병인 것입니다. 이 경우 학인은 훌륭한데 스승은 어둡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큰스님은 학인이 왔는데 어떤 가르침도 내리지 않고 조용히 있습니다. 좀이 쑤신 학인이 물어옵니다. 그러면 스승은 이것을 그대로 배격해 버립니다. 그러면 바로 알아들어야 하는데 따지고 들며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스승은 훌륭한데 학인은 어두운 경우가 되겠습니다.

 

或有學人이 應一箇淸淨境하야 出善知識前이어든 善知識이 辨得是境하고 把得抛向坑裏하면 學人이 言, 大好善知識이로다 卽云 咄哉라 不識好惡로다 學人이 便禮拜하나니 此는 喚作主看主니라

 

해석) “혹 어떤 학인이 하나의 청정한 경계로 선지식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선지식은 이것이 경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집어다가 구덩이 속에 던져버린다. 그러자 학인이 ‘참으로 훌륭한 선지식이십니다’라고 말하자 선지식은 곧 ‘이 멍청한 놈아! 좋고 나쁨도 구별하지 못하는 구나’하고 타박한다. 그러면 학인이 절을 하는데 이것을 주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강의) 호주호빈(好主好賓)입니다. 스승도 훌륭하고 학인도 훌륭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청정한 경계라는 것은 여법한 모습, 또는 깨달음의 경지에 있는 모습으로 큰스님에게 다가온 것을 말합니다. 만약 어두운 스승이라면 이것이 또한 경계인 줄 모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눈 밝은 스승은 이것이 경계임을 단박에 알아차리고 그대로 무시해 버립니다. 자신의 경지를 인정해 주지 않는 스승에 대해 화를 낼만도 한데 학인 또한 훌륭합니다. 경계에 걸리지 않고 오히려 스승을 칭찬합니다. 그 칭찬마저 무시하고 또 다시 타박을 합니다. 그러자 이에 학인은 일어나서 예배까지 합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입니다. 서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도 훌륭하고 학인도 뛰어납니다. 스승과 학인 사이에 전혀 우열이 없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주인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주인을 간파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법이 바깥에 없다고 하면
곧 안에 있나 찾아 헤매


좌선한다며 벽보고 앉아
가만히 있는 것 법 아냐

 

或有學人이 披枷帶鎖하야 出善知識前이어든 善知識이 更與 安一重枷鎖라 學人이 歡喜하야 彼此不辨하나니 呼爲客看客이니라 大德아 山僧이 如是所擧는 皆是辨魔揀異하야 知其邪正이니라

 

해석) “혹 어떤 학인이 있어서 목에 칼을 쓰고 발에 족쇄를 찬 채 선지식 앞에 나타났는데 선지식은 그 위에 다시 칼과 족쇄를 한 겹 더 씌워버린다. 그런데 학인은 좋아서 기뻐하고 피차(彼此)를 분간하지 못하면 이것을 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대덕 스님들이여! 산승이 이와 같이 예를 든 것은 모두 마구니를 찾아내고 이단을 가려내어 삿된 것과 올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이다.”

 

강의) 가쇄(枷鎖)에서 가(枷)는 옛날 죄수들의 목에 씌우는 칼을 말하고 쇄(鎖)는 수갑이나 족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가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경계나 언어 혹은 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그마나 특정한 사상에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줄 알고 잔뜩 가쇄를 둘러 쓴 학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큰스님이 이를 바로 잡지 못하고 오히려 칭찬하며 부추기고 있습니다. 족쇄를 한 겹 더 씌워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학인은 아둔해서 이것이 칭찬인지 족쇄인지를 알지 못하고 좋아서 날뛰고 있습니다. 스승과 학인이 함께 아둔하면 이런 결과가 생기게 됩니다. 스승도 어둡고 학인도 어두운 경우입니다.

 

道流야 寔情은 大難이요 不法은 幽玄하니 解得하면 可可地니라 山僧이 竟日에 與他說破나 學者總不在意하고 千徧萬徧을 脚底踏過하야 黑沒焌地로다 無一箇形段하야 歷歷孤明이언만 學人이 信不及하고 便向名句上生解하야 年登半百토록 祇管傍家負死屍行하며 擔却擔子天下走하나니 索草鞋錢有日在로다

 

해석) “여러분! 진실한 마음을 내기는 어렵고 불법은 심오하고 깊어 어렵다. 그래도 해득하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산승은 하루 종일 그대들을 위해 불법을 설하지만 수행자들은 도무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천번만번 밟고 다니면서도 깜깜해서 어둡기만 하다.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없지만 뚜렷하게 홀로 밝은 것이 있다. 그러나 학인들은 믿지 못하고 말이나 문구로 이해하려 한다. 나이가 50세가 되도록 오로지 옆길로 빠져서 죽은 송장을 짊어지고 다니고 있구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천하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신발값을 물어내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강의) 진실한 마음은 보리심, 또는 진리를 향한 마음일 것입니다. 보리심이나 진리의 마음을 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항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불법은 심오하고 깊어 항상 가물거립니다. 알음알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음식 맛을 설명하기 힘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맛을 느낀 사람들은 말로 해도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분들의 대화는 이심전심(以心傳心)입니다. 그러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맛은 모르면서 말에 집착해서 도그마를 지어 전혀 다르게 이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불법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인 것은 내가 항상 진리와 함께하고 있고, 진리의 당체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법을 해득하는 일이 한편으로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천번만번 밟고 다니면서도 깜깜하다는 임제 스님의 말씀이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리는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고 지금 숨 쉬고 말하고 있는 이 순간도 진리의 당체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를 뿐입니다. 마치 자극적인 반찬의 맛에 정신이 팔려 정작 매일 먹는 밥의 맛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평생이 되도록 이를 모르고 지수화풍 사대로 구성된 송장 같은 육체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송장은 옛사람들이 남긴 말의 찌꺼기에 집착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종국에는 염라대왕 앞으로 불려가 신발값을 추궁당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大德아 山僧이 說向外無法하면 學人이 不會하고 便卽向裏作解하야 便卽倚壁坐하야 舌拄上齶하야 湛然不動하야 取此爲是祖門佛法也하나니 大錯이로다 是儞若取不動淸淨境하야 爲是면 儞卽認他無明爲郞主라 古人이 云, 湛湛黑暗深坑이 實可怖畏라하니 此之是也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산승이 바깥에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학인들은 알아듣지 못하고 곧 안에 법이 있나 하고 이해하려 든다. 그리고는 이내 벽을 향해 앉아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조사문중의 불법이라 집착한다. 그러나 이는 정말로 잘못 아는 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움직임이 없는 청정한 경계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대들은 무명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고인이 말하기를 ‘깊고 깊은 캄캄한 구덩이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강의) 바깥이 아니라고 하면 안을 집착하고 안이 아니라고 하면 바깥을 집착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차별과 분별의 세계에 빠진 범부들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바깥에 법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좌선을 한다면 벽을 보고 앉아서 안을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조사문중의 불법이라고 집착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무명(無明)을 주인으로 삼는 일이 됩니다. 옛 스님들의 말에 악취공(惡取空), 무기공(無記空)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텅빈 공을 자주 이야기하다보니까, 공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있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써 공을 말하고 있는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텅 비어 있음만을 진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생각이 없이 멍하게 있는 것을 공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악취공이며 무기공입니다. 공은 집착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물질적으로 혹은 생각으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그런 상태가 아닙니다. 참선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벽을 보고 가만히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참선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지금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임제 스님의 크나큰 경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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