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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조과(鳥窠), 상식을 말하다 [끝]

기자명 성재헌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 어려운게 상식

악 짓지말고 선 받들란 말에
헛웃음만 터뜨리던 백거이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언젠가 사촌동생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형, 불교에서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요?”


서울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님의 질문이니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공연히 시비가 생길까 싶어 염려스러웠다. 그래서 어물쩡 넘길 속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걸 어떻게 간단히 말할 수 있겠니.”


“저처럼 불교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공감할 수 있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한번 말씀해 보세요.”


가볍게 아래로 내리는 눈초리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보아하니, 다행히도 투견의 자세는 아니었다. 그러니, 피하기만 하는 것도 상수는 아니었다. 해서 그가 기독교의 틀을 뛰어 넘어 종교자체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리라 기대하며 이렇게 대답했다.


“불교에서는 사람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


동생이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 않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없던 열의가 샘솟았다. 해서 나도 한번 물어보았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라고 가르쳤니?”


“착하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렷하고 맑은 눈빛으로 진지하게 대답하는 동생의 한 마디에 무척이나 흐뭇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善)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선의 차이는 더 이상 논하지 않았다. 그런 군더더기로 시비를 일으킬 요량이었다면 애당초 그리 공손하게 묻지도 않았으리라. 상대가 주장하는 선(善)의 타당성을 검증하고 자신의 주장과 비교해 우열을 논하는 짓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낌새가 보였다면 애당초 그리 대답하지도 않았으리라.


“착하게 살아라.”


코흘리개 시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선생님과 어른들로부터 끊임없이 들었던 말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착하게 사는 것이냐”고 되묻지 않고 그분들 역시 “이런 것은 착한 짓이고 저런 것은 악한 짓이다”고 설명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알 수 있었다. 남들에게 비난받을 행동은 악이고 남들에게 칭찬받을 행동은 선이란 걸 말이다.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폭력을 휘두르면 사람들이 욕하고, 함께 나누고 진실하게 말하고 약자를 돕고 보호하면 사람들이 칭찬한다는 걸 말이다.


“착하게 살자.”


당연히 그래야하지 않겠냐고 너도 나도 맞장구치는 말이다. 오죽하면 남 등치고 살아가는 깡패까지도 종종 팔뚝에 새긴다 하지 않던가. 서로 양보하고 인내하고 돕고 살아야하지 않겠느냐고 다들 말하지만, 그러기가 참 힘든 게 또 착하게 사는 일이다. ‘전등록’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진망산(秦望山), 가지와 잎이 우산처럼 펼쳐진 멋진 소나무에 까치처럼 둥지를 틀고 사는 스님 한 분이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새 둥지에 사는 스님[鳥窠]’ ‘까치집에 사는 스님[鵲巢]’이라 부른 그의 법명은 도림(道林)이었다. 기이한 그의 행적에 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그 고을 군수로 있던 백거이(白居易)에게까지 전해졌다. 돈독한 불교신자였던 백거이는 스님을 뵈려고 직접 산으로 찾아갔다. 헌데 이 스님, 군수가 왔는데도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올 생각도 않았다. 뻘쭘해진 백거이가 에둘러 말을 건넸다.


“스님, 너무 위험한 곳에서 사시는군요.”


가만히 눈길을 돌린 도림 스님이 잔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수께서 더 위험합니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백거이가 말했다.


“저야 강산(江山)을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데 무슨 위험이 있겠습니까?”


“장작불처럼 타오르는 식(識)의 불꽃이 멈추질 않으니,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권력, 모두가 부러워하고 모두가 탐내는 자리인 만큼 갖가지 권모술수와 암투가 난무하는 살벌한 싸움터이다. 여차하면 목이 달아날 지경이니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속내를 들췄으니, 뜨끔하지 않을 수 없다. 백거이는 공손히 합장하고 정중하게 물었다.


“불법의 대의(大義)는 무엇입니까?”


그러자 도림 스님이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어떤 악도 짓지 말고, 온갖 선행을 받들어 행하십시오.”


예의를 차려야 마땅한 자리지만 터지는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 그런 말은 세 살짜리 어린애도 압니다.”


그러자 도림 스님이 진중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세 살짜리 어린애도 말은 할 수 있지만 80먹은 노인도 실천하기 힘들다오.”


이 말에 백거이가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섬에 비유하셨다. 격랑처럼 휘몰아치는 갖가지 위험을 피해 열반이라는 안전한 섬으로 대피하라고 자주자주 말씀하셨다. 편안하고 행복한 그 섬으로 가는 뗏목은 무엇일까? 그 뗏목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눈물과 공포의 강가를 헤매는 것일까? 아니다. 뗏목이 눈앞에 버젓이 보이는데도 다들 스스로 탈 생각을 하지 않을 뿐이다. 나무토막을 엮은 뗏목 말고 기똥찬 요트가 어디 없냐고 공연히 부산을 떨 뿐이다.


스님에게 회통(會通)이라는 시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하직인사를 하였다. 그래서 스님이 물었다.


“어디 가냐?”


회통이 대답했다.


“저는 불법을 알기 위해 출가하였지만, 화상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자 도림 스님이 싱긋이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런 불법쯤이라면 나에게도 약간은 있다.”


“어떤 것이 화상의 불법입니까?”


스님은 나풀거리는 실오라기를 하나 뽑아 입김으로 후~하고 불었다.


그림의 떡으로는 주린 배를 채울 수 없다. 둘러앉아 주저리주저리 천하제일 산해진미를 논해봤자 허기만 더할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자리에서 쑥~ 빠져나와 씨래기국에 보리밥 한 덩어리를 말아 먹을 것이다.


행복의 섬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착하게 살자. 

 

성재헌 tjdwog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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