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문정왕후
22. 문정왕후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2.12.3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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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암흑기, 깊은 신심으로 중흥 꾀한 호법신장

경빈·희빈 등쌀에 숨 죽이다
아들 낳은 후 정쟁 본격 개입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초목의 씨앗은 싹을 틔우기 위해 겨우내 땅 속에서 봄이 오길 기다린다. 흙과 양분, 물과 햇빛 등 모든 것이 충족되는 최적의 순간, 씨앗은 비로소 흙을 밀고 올라와 한줄기 싹을 틔운다.


조선시대 수렴청정을 통해 가장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문정왕후의 삶도 이 와 다르지 않았다.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랜 세월 숨죽이며 훗날을 도모해 왔기에 그녀는 비로소 왕권을 넘어선 강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문정왕후 윤씨(1501~1565). 그녀는 18세 꽃다운 나이에 조선 중종의 세 번째 왕비로 입궐했다. 첫 번째 왕비 장경왕후가 원자 이호를 낳고 세상을 뜬지 2년 뒤였다. 이미 중종의 곁에는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가 왕후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궁중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중종은 아들을 많이 낳은 후궁 경빈을 왕후로 삼길 바랐으나 신분이 미천해 적합하지 않았다. 새로운 비를 뽑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청원에 간택된 이가 바로 윤씨였다.


윤씨의 궁궐생활은 살얼음판과 같았다. 중전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빈과 희빈의 암투는 시간이 지날수록 치열해졌고, 윤씨는 암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몇 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생명의 위협마저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윤씨는 훗날을 내다봤다. 그리고 죽은  장경왕후의 원자 이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자신과 같은 이호의 처지에 깊은 측은지심을 느낀데 따른 것이다. 이호는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였지만 모친이 일찍 죽은 까닭에 그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경빈과 희빈에 의해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문정왕후는 훗날 왕이 될 이호를 자식처럼 보호하며, 오직 살기 위해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권력의 흐름이 뒤바뀌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호가 머물던 동궁 후원의 나무에서 앞 뒤 다리가 잘리고 얼굴을 인두로 지진 쥐가 발견된 것. 바로 ‘작서의 변’이다. 이 사건의 배후로 경빈 박씨가 지목됐다. 그녀는 결국 폐서인되어 대궐에서 쫓겨났고 5년 후 아들 복성군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다.


훗날 작서의 변이 경빈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미 죽은 뒤였다. 이처럼 당시의 권력투쟁은 온갖 모략과 암투가 난무했으며 이로 인해 하루 아침에 생사가 뒤바뀔 정도로 치열했다.


그즈음 문정왕후도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다. 극도로 몸을 사리며 살아왔던 그녀였지만 아들을 낳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정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이호가 세자로 책봉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그녀는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들이 세자가 된다면 아무것도 걱정할 일이 없었다. 이는 어린 아들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인 동시에 그동안 숨죽여 살아왔던 과거의 한들을 풀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중종이 죽고 이호(인종)가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본격적으로 권력의지를 드러냈다.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심성이 여렸던 인종은 어린 시절 어머니처럼 자신을 지켜줬던 기억을 잊지 못해 극진히 대했다. 그러나 치열한 궁중암투에 평생을 시달렸기 때문일까. 결국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병환으로 죽음을 맞는다. 죽기 직전 문정왕후의 아들 환에게 왕위를 전위하는 교서를 내린 것은 문정왕후에 대한 고마움과 애틋함의 발로였다.


우여곡절 끝에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비로소 문정왕후는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12세에 불과한 어린 왕의 모후로, 수렴청정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섰다. 그때 나이가 46세다. 열여덟 어린 나이에 입궐해 숱한 암투와 권력다툼 속에서 지난한 인고의 세월을 보낸 끝에 맺은 결실이었다.


문정왕후는 왕권이 얼마나 위태롭고 위험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수렴청정에 나선 즉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을 모조리 척결했다. 한번 마음먹은 것은 거침없이 추진해 나갔다. 신하들의 빗발치는 상소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불교였다. 당시 불교는 중종대의 강경한 숭유억불 정책으로 중심을 잃고 빠르게 쇠락하고 있었다. 문정왕후는 허응당 보우 스님을 중용해 선종과 교종 양종을 복립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본격적인 불교 중흥정책을 펼쳤다.


양민들이 군역을 피해 승려가 되는 폐단을 바로잡고 불교의 퇴폐를 막는다는 명목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그녀의 깊은 불심이 있었다. 본디 불자였지만 당대의 고승 보우 스님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의 사상을 배우고 더욱 깊이 심취했으리라.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가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소중히 여김은 실로 과거에 드물었고 하늘을 섬기고 부처를 공경함 또한 후세에 드물 것”이라며 그녀의 남다른 신심을 치하하기도 했다.


문정왕후의 불심은 개인적인 신앙을 넘어, 배척당하고 핍박받는 불교를 지켜주기 위한 국가정책으로 발현됐다. 당시 불교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을만큼 암울했다. 승과의 폐지로 자질 없는 스님들이 크게 늘어 불교의 가르침이 방향을 잃었고 퇴폐한 불교에 백성들이 등을 돌리면서 전국의 사찰들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불교 중흥을 이끌겠다는 문정왕후의 결단은 암흑 속 희미한 빛에 다름없었다.


명종 5년(1550) 12월15일, 문정왕후는 불교 중흥을 위한 첫발을 내디뎠다. 바로 선교 양종의 부활이었다.


“승도들을 통솔하는 이가 없으면 잡승을 금단하기가 어렵다. 봉은사와 봉선사를 선종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아서 ‘경국대전’에 따라 승려가 될 수 있도록 하라.”


신하들의 반대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전교가 내려진 다음날부터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대부분이 “양종과 선과(승과)를 복립하라는 명을 거둘 것을 청했으나 불허하다”일 정도였다. 한 신하는 “대왕대비의 광명정대(光明正大)함은 요순임금에 버금가나 불교를 숭상하는 한 가지 일에 현혹됨을 면치 못하신다”는 직설적인 비난까지 불사했다. 말 그대로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셈이다.


급기야 문정왕후는 1월16일과 19일 다시 전교를 내린다. “양종을 설치하게 한 것은 임금과 상관없는 일이며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 “내 뜻이 이미 결정되어 어떤 경우라 해도 고칠 수 없기에 오늘 굳이 내 뜻을 조정에 말한다.” 양종의 복립은 왕의 의사와 별개로 직접 추진하는 일이니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명을 거둘 뜻이 없음을 확고히 한 셈이다.


그럼에도 신하들의 반발은 사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일 적게는 6개, 많게는 10개의 상소가 올라왔고 명종과 문정왕후는 하루 종일 불교를 비난하는 신하들을 상대하며 몸살을 앓아야 했다. 오죽했으면 명종이 “이는 임금인 나를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탄했을까.

 

명종 즉위 후 불교 중흥 나서
선교 양종·승과 복립 박차


그럼에도 문정왕후는 한치의 흔들림 없이 뜻한 바를 추진해 나갔다. 보우 스님을 봉은사 주지로, 수진 스님을 봉선사 주지로 임명한데 이어 승과를 부활시켜 선종과 교종의 스님을 각각 발탁했다. 또 선종과 교종을 통틀어 300여개의 사찰을 지정하는 등 본격적인 중흥불사에 돌입했다. 명종대 도첩제를 발급받은 스님만 4000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당시 그녀가 인재양성을 통해 불교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려 했음을 방증한다.


1553년 명종이 20살이 되자 문정왕후는 만 9년의 수렴청정을 접고 물러난다. 그러나 그녀의 입지는 여전히 굳건했다. 또한 그녀는 오히려 수렴청정이 끝난 후 더욱 적극적으로 불사를 통해 불심을 표출하며 불교에 관한한 옹호 입장을 분명히 했다.


문정왕후가 발원한 불사들은 곧 단절됐던 불교문화를 다시 꽃피우는 계기였다. 그녀가 나라의 평안과 임금의 무병장수를 발원하며 향림사에 봉안한 오백나한도를 비롯해 순금 약사여래도 등 불화 일부가 지금까지 전해져 조선 불교문화의 일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문정왕후는 세월이 흐를수록 권력보다는 불교에 더욱더 심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불교공부가 깊어질수록 권력의 무상함을 깨닫고 과거 권력에 집착했던 과오를 참회하고 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권력의 중심에서 당당하게 불교중흥을 이끌던 그녀는 1563년에 이르러, 생애 마지막으로 회암사 중창불사에 돌입한다. 당시 왕실은 세자의 사망으로 비탄에 잠겨 있었다.


문정왕후는 이 회암사 불사에 조선왕실의 안녕을 발원하는 마음과 불교중흥을 위한 한평생의 신념을 모두 담아냈다.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육식을 일체 금하고 몸을 정갈히 하는 등 각별한 마음을 쏟았으며, 회암사 중수에 맞춰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아미타·약사여래부처님의 모습을 담은 불화 400점을 제작해 봉안하기도 했다.


이토록 원력을 쏟았음에도 정작 문정왕후는 회암사 회향법석에 동참하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문정왕후는 불사 회향 무차대회를 4일 앞두고 목욕재계를 한 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죽는 날까지도 문정왕후는 불교의 미래를 걱정했다고 한다. 그 간절함이 그녀가 임종 직전 발표한 언문교서에 남아 전해진다.


“조정에 말하기가 매우 미안하나 평소 품고 있던 생각이므로 말한다. 불교가 이단이긴 하지만 과거부터 있어왔고 교종과 선종 또한 승려들을 통솔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승려들이 비록 쓸모없다 하여도 조정에서는 꼭 내 뜻을 받들어 옛날 그대로 보존해 주길 바란다. 설혹 주상이 금지하고 억제하더라도 조정에서는 반드시 내 뜻을 따라 달라.”


문정왕후의 우려가 적중한 것일까. 그녀의 죽음 이후 불교는 곧바로 핍박 받던 과거의 신세로 전락했다.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보우 스님을 주살해야 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결국 그는 제주도로 쫓겨난 채 제주목사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바로 세운 선교 양종과 승과마저 그녀가 죽은 지 1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스러져가는 불교를 다시 재건하려 했던 문정왕후의 노력은 결국 일시적인 불꽃으로 사그러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 원력마저 허무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명종대 승과에서 서산대사, 사명대사와 같은 특출한 고승이 탄생해 불교의 명맥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당시 그녀가 꽃피웠던 불교문화 역시 지금까지 전해져 조선 불교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암흑기, 차돌 같은 신심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불교를 외호했던 그녀의 행보는 50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의 재가불자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전한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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