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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고양이와 함께하는 명상 [끝]

기자명 법보신문

고양이 울음과 장난이 명상 방해할까

명상의 중요한 요체는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이면서 놓는 것

 

 

▲새끼 고양이가 수미런던 법사의 좌복에 앉아 명상을 방해하고 있다.

 


법보신문에 기고하는 나의 마지막 칼럼은 가벼운 글로 끝을 맺고자 한다. 먼저 그 동안 글을 쓸 수 있도록 지면을 허락해 준 법보신문에 감사를 드린다.


고양이는 마치 아이들처럼 파괴를 일삼는 작은 괴물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홀딱 반할 만큼의 ‘귀여움 덩이’이기도 하다. 우리 집에 있는 두 마리 새끼 고양이는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물을 치어 넘어뜨리고 커튼 위를 할퀴며 올라가는 등 집안을 온통 헤집고 다닌다. 그러다가 다음 순간 내 가슴 위에서 서로 꼭 껴안고 사랑을 구걸하고 으르렁거리면서 그들의 온기를 내 가슴에 전해준다. 하지만 이런 악마이자 천사이기도 한 녀석들과 함께 평정을 찾는 가장 큰 시험은 나의 일일 명상시간에 벌어진다. 매일 오후 2시경 나는 거실에서 명상을 한다. 이 때가 바로 최 저층에 위치한 나의 아파트에 하루 중 햇볕이 가장 강하게 드리우는 시간이다. 어두운 겨울철 동안 나는 특히 이 시간을 좋아한다.


우리는 이 자그마한 새끼 고양이를 9월 초에 사서 데리고 왔다. 아이들은 매우 좋아했지만 사실 그 녀석들은 골치 덩어리였다. 새끼 고양이가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녀석들을 거실 공간에 놓아두어야 했다. 그것은 애완동물용 변기도 거실에 놓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일 오후 나는 명상을 하곤 했다.


“아! 평화의 순간.”


하지만 들리는 소리는 끼익 끼익 끼익, 녀석들이 변기를 발로 긁고 있는 게 아닌가. 다음 순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내게로 풍겨왔다. 나는 위빠사나 수행승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에 따라 그 경험을 다만 알아차리기만 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그 다음은 ‘불쾌하다, 불쾌하다’는 인식만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의지력은 미약했고 몇 분 내에 저주의 말을 내뱉으면서 명상을 할만한 다른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에게 매일의 기쁨이 되었던 그 몇 줄기 햇볕을 포기해야만 했다. 망할놈의 고양이 녀석들.


나는 고양이가 애완용 변기를 실제로 사용했었던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해야만 했다. 어느 날 오후 회색 새끼 고양이가 나의 명상용 좌복 위에서 코를 킁킁거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긁어 파고 잠시 야옹하고 울더니 멈춘뒤 돌아서서 화장실로 달아났다. 바로 내 좌복 위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절대자를 향해 울부짖었다.


“나에게 계시를 주는 건가요?”


또 어떤 때에는 그 새끼 고양이들이 내 몸뚱이를 마치 그들의 장난감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앉아 있을 때, 녀석들이 내 손가락을 덮치는 것을 갑작스레 느끼기도 한다. 마치 내 손가락이 벌레나 생쥐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는 내 손가락을 조금씩 물어뜯으려고도 했다. 그들의 이빨과 발톱이 면도날처럼 날카롭지 않았다면 그런 행위는 훨씬 더 귀여워 보였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또 다른 때에는 나를 타고 올라와서 내 팔과 등을 할퀴어서 상처를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음 일을 겪으면서 그 행동들을 눈감아 주게 되었다. 내가 명상을 하는 동안 회색 새끼 고양이가 내 셔츠를 골똘하게 노려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고양이가 내게 돌진해올까 두려웠다. 이윽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거미 한 마리가 내 셔츠 위를 기어 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거미를 부드럽게 떼어내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런 나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측면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거미를 그 곳에 두었으니 고양이가 분명히 죽이게 될 거야. 거미를 안전한 곳에 놓아주지 않음으로 해서 나는 첫 번째 계율을 깨뜨린 것이 되는게 아닌가? 앉아서 나의 ‘까르마’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동안 정말로 새끼 고양이는 거미를 찰싹 쳐서 잡아챘다. 불쌍한 거미!


어느 순간 이 짜증나게 하는 새끼 고양이와 관계를 맺어가고 있는 나의 방식은 정말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말다툼하는 나의 아이들도 단지 아이들일 뿐이듯 무례한 운전기사도 단지 무례한 운전기사일 뿐이듯, 또 참견하는 친구도 단지 참견하는 친구일 뿐이듯 그들도 단지 새끼 고양이일 뿐인데 말이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왜 이 새끼 고양이와 그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괴롭히고 있는 것인가? 내가 괴롭힘을 당하는 마음 구조 속에 이미 갇혀 있는 것은 아닌가? 이렇게 해서 새끼 고양이는 나의 마음을 바라보는, 또 내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어 가는가를 관찰하는 거울이 되었다. 내가 잠에서 막 깨어나서 아직 옷을 입기도 전인데 고양이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야옹’거리는 걸 보고 “이 멍청한 고양이야 입 닥쳐”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 이제는 “수미, 오늘 심사가 뒤틀렸구만”이라고 스스로 자각하게 된다. 참으로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대해 탓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단지 내 탓일 뿐이다.


새끼 고양이가 자라서 좀 더 정착을 하자 우리는 명상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좀 더 평화로운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다. 명상시간 동안 그들은 졸면서 시간을 보낸다. 때로는 나 역시 졸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평화를 만들어 갔다. 어저께 내가 명상을 시작하자 회색 새끼 고양이가 조용히 ‘야옹’거리면서 내게 다가왔다. 내 무릎 위로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내가 아주 부드럽게 들어올리자 고양이는 발을 내 어깨 위로, 잔털이 덮인 머리를 내 볼에 내려놓았다. 나의 숨쉬기와 고양이의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느끼면서 조심스레 고양이를 어루만졌다. 이윽고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부드럽게 고양이를 내려놓고 명상을 이어갔다. 그러자 그 고양이는 낮잠을 자려고 소파 위에 있는 언니 고양이에게로 다가갔다.


그 순간은 약 16년 전 내가 대학 4학년 때 그렸던 일련의 그림들을 생각나게 했다. 그 그림들에게 ‘평정’(Equanimity)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고등학교 시절 길 잃은 고양이를 데려다가 ‘키티’(Kitty)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길러왔는데 그림 속의 고양이는 바로 그 고양이었다. 그 그림은 어떻게 하여 명상의 요체는 우리 주변의 세상을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 일어나는 그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그 순간을 돌보고 때가 되면 놓아버리고 상황이 바뀌면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했었다.

 

▲수미런던
고양이가 훌륭한 법사가 되리라는 것을 누가 알았으랴. 내가 가르침을 받은 것에 대해 새끼 고양이에게 절을 한다. 동시에 나는 애완용 변기를 화장실로 옮겼다.

 

수미런던 듀크 불교공동체 지도법사

번역=백영일 번역편집위원 yipaik@wooriba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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