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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오백세’의 한국불교

  • 법보시론
  • 입력 2013.01.14 15:28
  • 수정 2013.01.15 18:31
  • 댓글 1

한국불교는 지금 어디메쯤 있는가. 누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가. 혹시 지금이 ‘금강경’이 말하는 ‘후오백세(後五百歲)’가 아닐까. “여래는 오지 않는다”는 역설의 가르침에 놀란 수보리에게, 붓다는 캄캄한 ‘후오백세’에도 바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佛告須菩提, 莫作是說. 如來滅後, 後五百歲, 有持戒修福者,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후오백세는 ‘마지막(後)’ 500년이란 말이다. 즉 다섯 번째의 500년을 가리킨다. 제행무상(諸行無常), 붓다의 위대한 가르침도 이 진리를 피해갈 수 없다. “붓다 멸후, 첫 500년은 1) 수행을 통해 궁극의 열반을 얻을 수 있지만(解脫牢固), 2) 두 번째 500년은 다운그레이드, 좌선이 깨달음을 대신하게 된다. 3) 세 번째 500년은 학식과 담론이 지배하고(多聞牢固), 4) 네번째 500년은 경전도 죽고, 절간과 탑만 덩그러니 남는다(塔寺牢固). 마지막 500년, 즉 후오백세는 사찰의 소유권을 놓고 막가는 싸움이 벌어지는 풍경이 일상화된다(諍牢固).”


지금이 붓다 입멸 후 2500년, 계산기를 두드려 보면, 딱 ‘후오백세’의 끝자락에 해당한다. 그래서 그런가. 작년만 해도 온갖 추문이 불자들을 낯 뜨겁게 했다. 도박과 룸살롱 등은 5) “다투고 막가는 드잡이”의 말세 풍경을 그대로 내보인다. 바수반두(世親)의 음울한 예언을 기억한다. “그런 때가 오리라. 무지의 파도가 범람하고, 붓다의 가르침이 마지막 숨을 내쉬는 그 날이…”


그렇지만 절망하기는 이르다. 물은 다 흘러내려도 콩나물은 자라는 법! 4) 그래도 절간을 찾아 탑을 도는 대중들의 발걸음은 늘어나고 있고, 3) 아카데믹 서클 안에서는 경전의 지식을 두고 학술적 토론이 활발하다. 2) 산중의 깊은 토굴에는 눈푸른 납자들의 명상과 화두 참구가 뜨겁지 아니한가. 이렇게 보면 오백세들(?)은 강물처럼 하나가 하나를 밀어냈다기보다, 나이테처럼 켜켜이 중층으로 쌓여 있는 듯하다. 21세기 한국불교는 다섯 오백세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북적이고 있는 중이다.


‘후오백세’의 어둠을 다시 1)의 ‘해탈’의 시대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러자면 나머지 넷을 동시에 다루는 도룡(屠龍)의 기술이 필요하다. 5) 소유와 이권을 둘러싼 다툼은 칼로 쳐서, 시퍼런 서슬부터 세울 것. 감시와 규율을 강화하고, 수행과 재정을 분리하는 것이 해결이다.


이 제어 위에서 4) 재가 불자들의 관심과, 3) 학자들의 지식, 그리고 2) 출가 수행자들의 훈련을 적극 ‘소통’시키는 것이 다급하다.


불교 학회에 가끔 가는 편이다. 늘 느끼는 것인데, 세 그룹의 화법이 엇갈린다. 3부 대중이 각자 독백을 하고 있다면 지나칠까. 학자들은 ‘전문’의 불교를 논설하고 있고, 스님들은 화두를 둘러싼 근본 실참에 주 관심이 있다.

 

객석의 일반 청중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스님들의 화두는 너무 험준하고, 전문적 학자들의 불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탄식이다.


이 불통, 혹은 동상이몽을 소통시키는 곳에 한국불교의 활로가 있다. 헤르메스(Hermes), 새로운 ‘번역자’가 필요하다. 사회활동도 필요하고, 종단의 개혁도 다급하지만, 한국불교는, 진정 ‘불교’부터 바로 세워야 하지 않을까.

 

스님들은 참선과 화두 일변도를 지나 지적(知的)인 불교를 본격 고민하기를 권한다. 대중들은 기복을 넘어 불교로 ‘성숙’해지기를 발심(發心)하자. 힐링이 대세라 하나, 위로는 치유가 아니다.

 

▲한형조 교수

어느 목사의 조크처럼, 그러다가 자칫 ‘영혼의 당뇨병’에 걸릴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학자들은 ‘전공’의 관행과 어법을 타파해야 한다. 팔만 장경의 지식을 삶의 일상과 밀착시키는 절실하고 과감한 모험을 미룰 수 없다. ‘금강경’이 일찍이 말했다.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내 귀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들린다. “각자, 매트릭스를 타파하고, 박스 밖에서 사고하는 법을 익히는 곳에서 새 불교가 열릴 것이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idi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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