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극 펭귄의 기다림

  • 사설
  • 입력 2013.01.14 15:39
  • 댓글 0

대선이 끝났다. 희비는 분명하게 갈렸고 이제 돌이킬 수 없다. 우리는 2월이면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에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걸어야 한다. 다만 우려스러운 건 환경단체를 비롯한 시민종교 재야단체들의 활동이 미약해지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벌써 ‘동력을 잃었다’는 절규도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하지만 기다려야 한다. 어떤 기다림인가!


기다림은 홀로 서 있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닐 듯싶다. 견디(堪)고 참(忍)지 않으면 기다림(待)은 어느 순간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감인대(堪忍待)’는 세 자로 이뤄진 모양이다. 남극 황제펭귄의 기다림은 너무도 혹독하다. 남극 여름이 끝나갈 무렵, 암컷은 알을 낳는다. 섭씨 영하 20도 추위 속에 암컷은 수컷에게 알을 넘겨주고 160Km 떨어진 해안가를 향해 길을 떠난다. 이 알을 부화시킬 의무는 오직 수컷에게 있다. 남극 겨울은 섭씨 영하 60도에서 70도를 오간다. 기간만도 4개월.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 겨울을 버티지 못하면 수컷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펭귄은 혹한과 눈보라와의 한판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단, 홀로 싸우지 않는다.


펭귄들은 자신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서로의 어깨를 맞댄다. 어느 새 둥근 대형 스크럼(Scrum) 진영이 짜여 진다. 이것만으로는 남극 겨울을 이겨낼 수 없다. 이 진영대로라면 스크럼 안쪽에 있는 펭귄은 생명을 다소 연장할 수 있겠지만, 강한 눈보라를 온 몸으로 막고 서 있는 바깥쪽 펭귄은 며칠 만에 동사할 것이다. 바깥쪽 대형이 무너지면 결국 안쪽에 있던 대형마저 무너질 터. 전멸은 명약관화 하다.


허들링(Huddling)! 스크럼 무리의 바깥에 있는 펭귄은 동료와 자리를 바꿔가며 점점 안으로 들어오고, 안에 있던 펭귄은 동료와 자리를 바꿔가며 바깥으로 나간다. 그 어느 펭귄도 안쪽에만 있겠다고 고집하지 않는다. 앞 동료를 밀치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려는 펭귄도 없다. 이 와중에도 스크럼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허들링! 펭귄의 지혜로움이 번뜩이는 대목이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 알이 부회된다. 갓 태어난 새끼, 당장 먹지 못한다면 어미를 보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 때 수컷의 위대함이 빛을 발한다. 지난 4개월 동안 입안에 간직하고 있던 먹이 ‘하나’를 새끼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4개월 동안 굶은 수컷! 자신의 입 속에 있는 먹이를, 자신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결코 삼키지 않는다.


하지만, 먹이 하나로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새끼의 연명 시간은 단 며칠. 4개월 동안 굶주림에 허덕였던 수컷 역시 먹지 못하면 죽는다. 이 때 어미가 돌아온다. 해안가에서 잡은 먹이를 배 안에 가득 넣고 말이다. 수컷 펭귄의 기다림이 빚은 생명의 기적이다.


새 정부가 들어서도 시민 종교단체들이 활약할 수 있는 환경 여건은 여전히 척박할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에 비해 좋을 리 없을 것이라는 건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짧은 남극의 여름을 만끽할 틈도 없이 겨울의 혹독함이 또 다시 5년 동안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견디고 참으며 기다려야 한다. 펭귄이 눈보라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원동력은 연대다. 동료를 믿으며 자신의 생존만 고집하는 않는 펭귄 연대처럼, 시민종교 단체들은 서로의 신의를 다져 가며 기존 연대를 더욱 굳건히 해야 한다.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우리 사회 저변에는 행동하는 양심과 지성을 가진 시민종교인들이 있다. 그들은 견디고 참으며 기다리고 있는 시민종교 단체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보수진영의 연속 집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 역할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가슴을 펴고 더욱 당당하게 제 역할을 도모해야 한다.


동력은 고갈되지 않았다. 우리 사회, 그 언제라도 양심과 지성이 사라진 적이 있었는가.


채한기 상임 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