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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팔공산 거조사(암)

삶의 희로애락 담은 나한의 표정에서 인생을 생각하다

팔공산에 자리한 은해사 말사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 도량


국보 제14호인 영산전 내
500나한·부처님 10대 제자
16나한 등 526 성중 모셔

 

 

▲제각각이다. 웃거나 찡그리고 눈을 치켜뜨거나 소리를 질렀다. 턱을 괴고 몰두하거나 익살맞게 웃었다. 정말 사람 좋은 얼굴로 합장하거나 호방하게 입 벌리고 웃었다. 나한님들이다. 마음속에 한 분 모신다. 좋은 표정으로 합장이다. 영천 팔공산 거조사 영산전.

 

 

거조사 영산전 지붕과 팔공산 산자락에 해가 걸터앉았다. 하루를 열며 숨 가빴던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기 전 쉼일 게다. 그 덕으로 사찰엔 그늘이 졌다. 경내에서 녹아가던 눈도 잠깐 숨을 고른다. 스님은 삽 들고 눈 치우느라 추위에 괜한 고생이시다.


오백나한을 만나러 왔다. 내 고집만 세우느라 상대를 짓눌렀던 몇몇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마음에 생채기가 남았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했다. 거조사 영산전의 오백나한 중 고집스러운 나한의 얼굴이 궁금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상만 가득한 마음을 비워 줄 나한이 필요했다. 철저하게 중생심으로, 간절하게 상대와 화해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 만나러 왔다.


영천 팔공산 거조사(주지 태관 스님)는 조계종 제10교구본사 은해사 말사다. 신라 효성왕 2년(738), 원참 스님 창건설이 전한다. 경덕왕 때 세워졌단 말도 있다. 거조사는 보조국사 지눌 스님이 ‘권수정혜결사문(勤修定慧結社文)’을 천명한 정혜결사 도량이다. 지눌 스님은 고려 명종 12년(1182) 개성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해 뜻을 같이 하는 도반과 함께 정혜결사문을 짓고 후일을 기약했다. 당시 타락한 불교를 엄중하게 비판한 지눌 스님은 경북 예천 하가산 보문사에 은거하며 수행에 전념하다 명종 18년(1188) 봄, 거조사 주지 득재 스님 청으로 거처를 옮긴 뒤 수행결사에 나섰다. 지눌 스님은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천명했다.


 

▲범종각인 영산루를 머리에 이고 영산전으로 향하는 돌계단에 마음 하나씩 올려놓는다.

 

 

“공손히 들으니 땅으로 인해 넘어진 사람은 땅으로 인해 일어나야 한다고 나는 들었다. 그러므로 땅을 떠나 일어서려는 것은 될 수 없는 일이다. 한 마음 미혹해 가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요, 한 마음을 깨달아 가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게 부처다. 미(迷)함과 깨달음은 다르지만 요컨대 모두 한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을 떠나 부처가 되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중략…)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삼가고 조심하여 몸과 마음을 채찍질하고 스스로의 허물을 알아 뉘우쳐 바르게 고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행하여 온갖 고뇌에서 속히 떠나야 할 것이다. (…중략…) 이것은 나 혼자만 해탈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째서 거조사가 정혜결사보다 나한도량으로 유명해졌을까. 거조사 자료에 따르면 진평왕 13년 혜림법사와 법화화상이 영산전을 건립, 오백나한을 모시면서부터 나한도량으로 알려졌단다. 허나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안내 푯말엔 설명이 다르다. 영산전 해체 보수 당시 발견된 묵서명에서는 고려 우왕 원년인 1375년에 영산전이 세워졌단다. 신라와 고려라는 시대적 간극을 메우고자 굳이 번뇌를 일으키긴 싫었다.

 

범종각인 영산루를 머리에 이고 영산전으로 향하는 돌계단에 마음 하나 하나 올렸다. 돌계단에 그늘이 졌다. 정오 무렵 영산전 지붕에 앉아 게으름 피우는 해가 얄밉다. 영산전 앞 삼층석탑(경북 문화재 제104호) 상층부와 영산전(靈山殿) 편액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늘 밟고 올라서자 밝은 곳으로 마음이 옮아갔다.

 

 

▲국보 14호인 영산전. 한 불자가 영산전 526 나한 품에 든다.

 


거조사 영산전은 열네 번째 국보였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고려시대 목조건축물로 부석사 무량수전, 예산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그리고 거조사 영산전 등 4곳 뿐이다. 그 소중함 가늠하고도 남았다. 단청이나 어떤 무늬도 없었다. 나무도 벽에 바른 흙도 그냥 자연색이었다. 소박하고 간결했다.

 

영산전은 영축산에서 묘법연화경 설하는 부처님 모습을 극적으로 표현한 영산회상도의 법당이다. 거조사 영산전은 상언이 그린 영산회상도와 청화화상이 자연석을 이용해 조성한 석가모니, 문수, 보현보살이 상주하고 있다. 게다가 오백나한과 부처님 10대 제자, 16나한 등 526분의 나한성중이 봉안됐다.


흔히 거조사는 은해사 산내암자라며 거조암이라 부른다. 흥미롭게도 당초 거조암은 거조사(居祖寺)라 불렸다.

 

‘조(祖)’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낸 수행자를 일컫는다. ‘거(居)’는 받든다는 뜻이고 ‘사(寺)’는 절이니 해탈한 수행자를 받드는 도량이 거조사다. 바로 나한이다. 나한은 범어 아라한(阿羅漢, Arhat)의 줄임말이다. 오백나한은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로 부처님 멸도 뒤 1차 결집 시에 모인 가섭존자를 비롯한 스님 500여명을 일컫기도 한다. 나한은 부처님이 열반했을 때 법을 전수받아 보호하고 지키는 수행자다. 홀로 선정을 닦으며 미륵불을 기다리는 존재이기도 하다. ‘살적(殺賊)’, ‘응공(應供)’이나 ‘응진(應眞)’으로 읽히기도 한다. 수행의 적인 번뇌를 항복받았으니(살적), 공양 받아 마땅한 분(응공)이며, 진실에 응하는 분(응진)이란 얘기다.


영산전 앞엔 삼층석탑 하나 덩그러니 놓였다. 눈 사이로 놓인 길이 가지런했다. 어느 보살의 무거워 보이는 걸음을 따라 영산전으로 재촉했다. 계단 오르며 굽힌 등과 무릎이 아프도록 시렸다. 마음속에 자란 ‘나’는 겨울날씨를 닮았었다. 뻣뻣했고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굽히니 아프고 시렸다.

 

영산전에서 자신을 닮은 나한 1명을 골라 마음속에 깊이 담고 기도를 올려야 한댔다. 10년 동안 거조사서 기도하다 1년 전 영산전 법당 화주가 된 정혜심 보살이 말을 붙였다. 한 분씩 찬찬히 살폈다. 거만한 나한 찾아 천천히 걸음을 뗐다. 고개 뻣뻣이 세운 모습을 찾다 그만 피식 웃음이 나고 말았다. 순간, 교만했던 마음에만 골몰했던 그 무엇이 달아났다.

 

 

▲부처님 10대 제자들.

 


영산전 나한은 모습이 해학적이었다. 차라리 서민적이었다. 세속의 갖가지 표정들을 총망라했다. 모두 제각각이었다. 한 사람도 같은 얼굴이 없었다. 웃거나 찡그리고 눈을 치켜뜨거나 소리를 질렀다. 턱을 괴고 몰두하거나 익살맞게 웃었다. 정말 사람 좋은 얼굴로 합장하거나 호방하게 입 벌리고 웃었다. 뭔가 궁금한 듯한 표정을 짓거나 매서운 눈빛을 쏘아붙였다. 수많은 인등이 나한성중을 떠받들고 있었고 공양 올릴 발우가 발밑에 줄지어 놓였다.

 

정강이에 두 손 올려놓고 호방하게 웃는 나한 앞에 섰다. 함께 웃었다. 정혜심 보살에게 이 나한 앞에 인등을 켜겠노라 했다. 허나 이미 자린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문(多聞) 제일 아난다존자였다. 이쪽에 놓인 나한은 부처님 10대 제자들이었다. 두타제일 대가섭, 지혜제일 사리불, 지율제일 우바리, 지계제일 라후라, 논의제일 가전연, 다문제일 아난다, 천안제일 아나율, 신통제일 목건련, 공혜제일 수보리, 설법제일 부루나존자였다.

 

차선을 택해야 했다. 나한을 찾아 한 바퀴 더 순례했다. 경건하게 합장하며 미묘하게 미소를 띄운 나한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오백나한 가운데 84번째인 명요선존자였다. 정혜심이 지극히 삼배를 올리라고 했다. 함께 삼배를 해주던 정혜심은 다시 본래 자리로 가 마침 시작한 예불에 동참했다. 노스님 한 분이 목탁을 두드리며 오후 3시 정각, 예불을 진행했다.


희로애락이 잘 나타난 영산전 나한. 이곳을 참배하는 이들 누구나 자기를 꼭 닮은 상을 찾아낼 수 있단다. 그리고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면 분명히 긍정적인 일들이 벌어진다고 한다. 조 3개 꺾어버린 인과 탓에 소로 모습을 바꾸고 조밭 농부의 일을 도왔던 스님. 그 소를 차지하고자 획책 부리던 근처 산적 500여명이 스님을 따라 거조사에 들어 수행하다 아라한과를 증득했다는 전설도 있다. 누구나 진실하게 기도하고 수행하면 성불할 수 있다는 방증일까.


거조사 영산전 나한의 영험은 신심 있는 객들 몫이었다. 50대 중반의 한 거사는 새벽예불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기도 올렸다. 혼자 키웠던 아들의 공무원 시험을 위해서였고, 아들은 당당히 합격했다. 세무사 시험을 준비 중이던 자식의 어머니는 매일 포항에서 영천 거조사까지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식은 1차 시험 합격 뒤 3개월 후 치러진 2차 시험을 보란 듯이 붙었고, 어머니는 사찰 대중공양으로 회향했다.

 

등휘(60) 거사는 지극한 신심으로 거조사에서 이름 꽤나 알려졌다. 보살들이 등휘의 신심에 감화돼 재발심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종무실장 자운 보살 귀띔이다. 등휘는 금속 관련 사업을 하면서도 시간만 나면 영산전서 철야기도를 올린다. 한 가정에 한 분씩 모시는 나한대재 때 꼭 최소한 16나한을 모신다. 인등이나 연등도 마찬가지다. “인드라망처럼 인연을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혼자만 잘 먹고 사는 건 불자가 아니다”라면서 거래처 것도 모시는 거란다. 부처님 법따라 살려는 마음씀씀이 덕일까. 등휘 거사 사업은 아직 건재하다고.


영산전에서 슬며시 발을 뺐다. 마음을 1초라도 더 두려하니 발 빼는 동작이 굼떴다. 저렇게 많은 나한 가운데 한 분을 올려다본다. 수많은 나한 가운데 나한 하나 날 바라본다. 중생인 우리네, 기도하고 빈다. 부처님이나 나한님은 귀찮을 지도 모른다. 계속 뭔가 해달라고 비니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게다. 종은 비워야 그 소리를 낸다. 절절한 마음도 탐욕 한 터럭 자리한다면 사치리라.


영산전에 걸터앉았던 해가 게으름 거두고 제 갈길을 간다. 거조사 나서는 영산루 돌계단에 다시 빛이 든다. 

 

최호승 기자 tim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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