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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귀의 딸 이예순 스님

유교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목숨을 바쳐 불법 구하다

남편 죽은 후 오언관과 교우
사회적잣대 넘어선 도반 돼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산속에서 체포한 자들의 신원이 매우 미심쩍다. 신분을 숨기고 거짓으로 친족행세를 하더니, 각자 결혼할 때의 사적과 집안 노비들에 대해 매우 자세히 말한다. 그러나 간간이 사실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 괴이하게 여긴다.”


광해군 6년, 조정에 수상한 자들에 대한 보고가 올라왔다. 안음현(지금의 경남 함양)의 덕유산 자락에서 체포된 세 사람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자 한명과 여자 둘이었는데 남자와 여자는 스님의 행색이고 나머지 한 여성은 그들을 따르는 신도라 했다. 이들을 체포한 안음현 방백(감찰사)은 “지난해 도적질을 하고 도망한 자로 의심하여 체포했으나 조사해 보니 수상쩍은 부분이 많다”고 알려왔다.


조정은 의금부도사를 파견해 세 사람을 궁으로 이송했다. 남녀가 신분을 속이고 서로 뒤섞여 입산생활을 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특이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들이 스스로 주장하는 진짜 신분이 일반 서민의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스님의 행색을 한 여성은 이귀의 맏딸이자 김자겸의 아내 이예순, 남자는 찬성 오겸의 서자 오언관이라 했다. 나머지 한명은 무인 나정언의 첩이었던 정이였다.


이 가운데 이예순의 신분이 특히 놀라웠다. 남편 김자겸은 조정의 중신 김자점의 동생이고 아버지 이귀는 강릉 참봉을 거쳐 형조좌랑, 안산군수를 거친 지역 중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면 이예순은 어엿한 사대부집 아낙으로서 가정을 버리고 남편이 아닌 외간남성과 간통한 셈이다. 명확히 따지면 남편 김자겸이 이미 죽어 과부의 처지지만, 그렇다고 죄질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편이 죽은 뒤 정절을 지키지 않고 다른 남성과 생활하며 집안을 돌보지 않았으니 유교적 이념에 상반됨은 물론이고 사회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추문이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당시 이 사건은 조정 안팎으로 적지 않은 관심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이 친히 서청에 나가 국문했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라의 안위를 위협할 법한 중대한 혐의나 개인적인 인연이 없음에도 임금이 직접 심문에 나섰다는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있었음을 방증한다.
광해군과 대면한 자리에서 세 사람은 “단지 불교를 따르는 도반일 뿐 부정함은 없었다”고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유학자들의 비난과 따가운 눈총 뿐이었다. 여염집의 여성이 외간남자와 함께 산천을 떠돈 것도 모자라, 그 이유가 불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유학을 숭상하던 당시 조선에서 불교는 허황된 말로 백성을 미혹하는 혹세무민의 종교였기에 개인적인 신앙이야 어떻든 간에 배불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더욱이 유학자들의 사고에서 이는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대목이었다.


반면 세 사람의 입장에서는 신분이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뚜렷한 혐의 없이 체포돼 최상위기관에 넘겨진 셈이니 억울할 법도 하다. 게다가 간통과 간음이라는 부정한 행실로 임금에게 직접 국문을 받고 거센 사회적 비판에 직면해야 했으니 당사자로서는 몹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에 유례없는 추문의 기록을 남긴 이 세 사람. 오언관과 이예순, 그리고 정이는 과연 어떤 관계였을까. 정말 유학자들의 비난처럼 부정한 관계였을까. 아니면 당사자들의 주장대로 정말 불법을 따르는 도반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후자다. 정사의 기록이 그들의 결백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는 동시에 조선시대 한 여성의 남다른 불심과 비범함이 후대에 전해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왕실여성이 아닌 일반 여성의 불심이 조성왕조실록에 기록된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광해군일기’의 사건 기록에는 바로 이귀의 딸 이예순의 남다른 면모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예순의 남편 김자겸과 오언관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함께 불법에 심취해 자주 만나 도를 논했으며 마찬가지로 불심이 깊었던 아내 이예순도 이 만남에 적극 동참해 서로의 공부를 도왔다고 한다.
특히 이예순은 열다섯에 시집을 갔으나 일찍이 불법에 뜻을 두어 부부 생활과 아이 낳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다행히 남편 자겸도 그 뜻과 기상이 범상치 않아 여인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덕분에 그녀의 공부는 남편과 더불어 나날이 깊어질 수 있었다. 남편 자겸은 오언관과도 도반을 삼아 불법을 논했는데, 세 사람은 종일 불도에 심취해 어떤 때는 밤이 으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김자겸의 병환으로 세 사람의 만남은 위기에 처했다. 조금의 혈연관계도 없는 오언관이 이예순의 집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남편 김자겸과의 인연 덕이었다. 남편이 없다면 이예순에게 오언관도 한낱 외간남자에 불과할 뿐이어서,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사회에서는 따가운 눈총은 당연지사기 때문이다.


이를 미리 짐작한 김자겸은 죽을 때 오언관에게 특별한 당부를 전한다.


“내 아내가 나보다 나으니 내가 있는 것과 다름 없다. 자네는 내가 있을 때처럼 서로 찾아 불교를 논해주길 바란다.”


덕분에 이예순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오언관과 불교를 논하고 불교서적을 탐독할 수 있었다. 이예순의 아버지 이귀도 딸을 단속하기보다 그녀의 불심을 격려하고 공부를 지원했다. 덕분에 이예순의 공부는 나날이 높아져 어느 순간에는 ‘생불’이라는 호칭으로 널리 알려지기에 이른다. 조선 중기의 문장가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 따르면 이예순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법은 얻었으며 몸에서는 기이한 향내가 나고 영묘한 광채가 방에 가득했다고 한다.

 

공부 깊어진 후엔 ‘생불’호칭
출가 수행 중 체포돼 곤욕도


그럼에도 둘의 만남에 대한 주위의 시선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둘의 만남에 대한 자못 더러운 말이 나라 안팎으로 퍼져 오언관과 교제하던 이들이 모두 발길을 끊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실상은 불심 깊은 한 여성을 깨달음의 길로 이끌었던 특별한 인연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용인될 수 없는 관계였던 셈이다.


세속의 잣대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관계가 간통 여부를 따지는 추문으로 불거진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출가’에 있었다.


이예순은 어느 날 가족에게 서한만을 남긴 채 오언관을 따라 머리를 깎고 안음의 덕유산으로 출가했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출가행을 택했는지가 광해군일기에 소상히 드러나 있다. 오언관이 광해군에게 진술한 내용이다.
“신이 영남의 산수가 좋음을 듣고 떠나고자 했는데 자겸의 아내가 함께하길 바라 거절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길 ‘광대한 불법 가운데 어찌 그런 구별이 있겠는가. 불도를 위해 나가는데 이 몸이 부서진들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하여 함께 안음의 덕유산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불법을 구하고자 발원한 이예순의 굳은 결심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그녀는 세간의 시선을 뛰어넘은 크나큰 진리의 길에 뜻을 두고 있었건 것이다.


두 사람과 함께 잡혀온 정이의 진술이 이예순의 뜻한 바를 더욱 소상히 전해준다.


“지아비가 죽은 뒤 천한 절개를 온전히 하기 위해 그의 큰집에 몸을 의탁하던 중 김자겸의 아내 이씨를 많은 사람들이 귀히 여긴다는 소문을 듣고 정성을 다해 만났습니다. 이씨를 따르던 중 ‘속세에서는 수도를 전일하게 하지 못하므로 비구니가 많다는 오대산에 가기로 마음먹은지 오래다’며 오언관과 떠나 출가하려 하기에 소녀도 따랐습니다. 이씨는 제때 밥을 먹지 않았고 더러 20일 동안이나 물도 마시지 않았지만 조금도 주리거나 피곤한 모습이 없었으며 한 달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온몸에 향기가 풍겼으며 깜깜한 밤에도 대낮처럼 광채가 발산됐고 3년을 함께 했으나 끝까지 한결같아 조금의 더러운 일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이예순은 이미 출가 당시 높은 경지에 올랐으며 그 명성이 멀리까지 퍼져나가 세간의 여성이 그녀를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역시 이들의 진술에 대해 간음의 문제는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언관은 국문 중 죽었지만 이예순과 정이는 가두었다가 죄를 사했으며, 후일 딸을 단속하지 않은 이귀를 처단하라는 상소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반면 사관의 평가는 달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삼강(三綱)이 끊어졌다. 그러고도 나라가 되겠는가.” 사관의 탄식은 이 사건이 유학자들에게 어떻게 비추어 졌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유교적 관점에서 이예순의 남다른 행보는 조선의 기강을 흔드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야사에 따르면 광해군의 애첩 김개시(김상궁)도 이예순에 깊이 감화되어 물심양면으로 그녀를 도왔다고도 전해진다. 이예순과 김개시와의 인연은 정사에 기록된 바는 없다. 그러나 훗날 이예순이 정업원으로 들어갔다는 기록,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김개시가 정업원에서 불공을 드리다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 등이 둘의 연관성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아마도 이예순과 김개시는 왕실 여성들의 불교신행을 이끄는 구심점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은 유교적 이념이 굳건한 정치적 기반이자 사회적 지표였던 시대였다. 여성에게는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으로 수동적인 삶을 강요하는 불평등 사회였으며, 불교에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허황된 종교라는 유학자들의 비난과 천대로 그늘에 가려져야 했던 암흑기였다.


이예순의 삶은 바로 이 같은 시대상에 비추어 한층 비범한 광채를 띤다. 그녀는 당시 여성과 불교가 처했던 수많은 한계를 넘어, 스스로 삶을 개척해 나간 선구자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어려움에 봉착한 순간에도 확고한 불심과 추진력으로 깨달음을 향한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결혼도, 남편의 죽음도, 또한 출가로 인한 사회적 비난과 문초도 그녀는 뜻을 굽힐 수 없었다.


죄인의 신분으로 왕을 대면한 그녀의 일갈이 그 삶의 여적에 담긴 드높은 가치를 명료히 전하고 있다.


“나는 여자의 몸으로 태어나 유학을 배우고자 해도 끝내 임금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돕는 지극한 이치를 이룰 수가 없다. 그러나 불학은 타고난 불성을 돈오(頓悟)하여 절로 본성이 청정해지는 길로, 점차 두루 통하여 자유자재한 가운데 번뇌가 저절로 청정해지고 윤회의 길이 끊어지며 지옥이 영원히 멸한다. 이에 불도를 배워 터득하고자 했으나 이제 대죄 가운데 떨어져 죽을 날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생사의 이치는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과 같다. 이에 여한이 없다.”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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