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을 들어설 때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거나 길거리에서 스님이나 법우를 만날 때 불자들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댄다. 만일 한 손에 무엇을 들었다면 다소곳이 한 쪽에 놓는다. 때로는 급한 마음에 한 손만을 올리며 인사를 하기도 한다. 합장을 한다는 것은 어떤 손에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텅 빈 손이 되었을 때야 가능하다.
합장은 단순히 처음 만나는 인사에서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법회의식을 행할 때 법문을 들을 때도 언제나 합장하고 경청한다. 마치 설법인이 부처님의 수인이라면 합장인은 제자의 수인이라고 할 만큼 불자의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합장게송은 합장의 의미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두 손 모아 한 송이 꽃이 피니
(合掌以爲花)
이 몸은 공양하는 그릇이로세.
(身爲供養具)
정성스런 그 맘의 진실한 향
(誠心眞實香)
향 연기 두루 퍼짐을 찬탄하도다.
(讚歎香烟覆)
두 손을 합장하는 순간, 두 손은 이제 두 손이 아닌 한 송이 향기 나는 꽃으로 피어난다. 그러니 내 몸은 꽃을 바치는 그릇이 된다. 합장으로 피운 꽃에서 나온, 불자의 마음이 담긴 향기는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이 멀리 멀리 나아가고 삼천세계를 다 덮고 두루 계시는 한량없는 부처님께 우리의 신심을 전하고 공양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게송의 셋째 구 마지막 글자 향(香)이 20세기 이후 판본에서 상(相)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로 인해 전후 맥락보다 독립된 구절로 이해되기도 한다. 가령 “모두워진 이 손을 연꽃인 양 여기오면 몸 또한 님의 뜻 받드옵는 공양구이옵니다. 정성스런 이 마음 진실된 모습으로”이라고 하여 합장은 꽃이고 몸은 공양구로 인식하는 것이다.
공양구라는 인식은 필자의 인식과 다르지 않지만 일상과 별상으로 달라진다. “님의 뜻 받드옵는 공양구”의 의미로 확대되고 다양해지지만 필자가 말하는 ‘공양구’는 합장이라는 꽃이 핀, 꽃을 담은 공양구에 한정된다.
영산회(재) 때, 이 게송은 향과 등불과 꽃으로 찬탄하고 삼보에 귀의하고 난 뒤 법회가 열린다는 것을 부처님들께 알리는 ‘고향게(告香偈)’ 이전에 외운다. 그런데 삼귀의를 마치고 바라를 울린 후 행하는 고향게송의 향연은 법회를 열 때 처음 하는 할향의 연향(향 사름)과 달리, ‘성심의 진실향연’인 합장게송의 향연이라고 필자는 이해한다. 할향은 연향을 하고 하는 찬탄과 외침이라면 고향의 향연은 합장의 꽃에서 나오는 정성스런 진실향의 향연이라는 것이다.
또 이 게송은 예불 때 올리는 오분향과 의미와 기능은 비슷하지만 형식은 차이가 있다. 오분향은 한 줄기 향을 사르고 읊고 관상하는 데 비해, 이 게송은 향이나 꽃과 같은 일체의 공양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몸의 두 손이 유일한 공양물이다. 두 손이 꽃이고 이 몸이 합장이라는 꽃을 바치는 법구이자 불기이다. 여기에 오로지 하나 정성스럽고 진실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그 마음을 합장이라는 꽃의 향으로 가장 진실한 공양물로 전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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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운 동국대 강사 jabidj@korea.com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