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삶의 종착역 앞둔 이들이 나누는 회상

기자명 법보신문

정토마을의 설날 풍경

떡을 빚고 나물을 볶으며
가족·고향 이야기 나누던
훈훈했던 ‘설날의 기억’

 

설날을 앞두고 청원군에 있는 호스피스센터 정토마을에 다녀왔다. 그동안 언양 자재병원 불사에 매진하느라 정토마을을 자주 방문하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병실을 둘러보며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증상이 깊어져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에서 언양 자재병원에 갈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는 환자까지 다양한 삶과 죽음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정토마을은 여전히 삶과 소멸이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시린 바람 불어오는 뜨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눈이 허리만큼 쌓였던 어느 설날이 생각난다. 그때 우리는 모두 모여 찰떡을 만들었다. 환자들의 고향과 추억은 물론 상태와 증상 등은 차이가 있었지만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느 가족보다 더 친밀하게 서로를 의지하며 소통할 수 있었다.


늙으신 노모를 고향에 홀로 두고 작별인사도 못한 채 정토마을을 찾은 문 거사님의 병상에는 언제나 말끔한 양복 한 벌이 걸려 있었다. 12년 전 아내를 먼저 보내고 두 딸을 키워왔으나 사업은 실패하고 암까지 얻었다고 했다. 문 거사님은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는 몸을 끌고 법당을 찾아 부처님께 발원했다. 조상님들께 마지막 차례를 올리고 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설날 하루 전, 간호사와 봉사자, 환자들이 모두 거실에 모였다. 밤은 이렇게 깎아야 한다, 고임음식은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 나물은 이렇게 볶아야 한다….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때 문 거사님은 벽을 기대고 앉아 말이 없이 밤을 깎았다.


저녁부터는 찰떡을 만들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절구를 몇 개 놓고 봉사자들과 함께 찰떡을 만들었으며 밤이 깊도록 서로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문 거사님은 말없이 가장 먼저 만든 떡을 접시에 담았다. 내일 차례를 위해 챙겨두는 것이었다. 저마다 다른 세상을 살다 모인 사람들이 종착역에서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며 살아온 기억을 회상하고 삶의 의미, 고귀한 가치를 찾고 있었다.


목포에서 오신 윤 거사님이 고향의 설날풍경을 이야기했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 것일까…. 74살 홍 할머니는 먹을 것이 없어도 차례에 쓸 쌀은 꺼내 쓰지 않았다는 일제 강점기 이야기를 해 주신다. 모두가 옛 추억에 공감하고 그리워하면서 정성스럽게 설날 음식을 준비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밥톨이 듬성듬성 배어있는 찰떡을 꿀에 발라서 함께 먹으며 함박눈을 바라보던 그 어느 겨울 설날의 풍경이 가슴 저미게 그립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 우린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물안개 같은 그리움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지금, 모든 것이 더욱 소중하게만 느껴진다.


문 거사님은 그날 저녁, 차례 준비를 모두 해놓으시고 정월 초하루 설날 아침 8시에 혼수상태에 빠졌다. 병상에 걸려 있던 양복은 아마 꿈속에서 입었을 것이다. 호흡이 약해져가는 거사님에게 차례를 지내러 법당에 같이 가자고 속삭였다. 거사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불공과 제사를 지내고 이틀 후 영영 길을 떠나셨다.


우리네 삶이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고 우주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육체와 그것에 깃든 생명 또한 허망하게 무너져 버린다. 정토마을 설날…. 그날 우리는 허리까지 덮이는 눈을 바라보고 가족들을 그리워하면서 도란도란 시간을 보냈다. 정토마을은 인생과 추억을 몽땅 담아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특별한 곳이다. 언양 자재병원이 완공되면 나는 다시 한 번 우리 가족들과 함께 인생과 추억을 몽땅 털어 떡을 만들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능행 스님

사람 따라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소리는 가슴 시리도록 파란물빛으로 스며든다. 햇볕이 병동 뜨락에 살포시 내려앉는 것을 보며 서둘러 언양으로 발길을 옮긴다. 죽어가는 그분들과 함께할 수 있는 귀한 인연과 고귀한 소임에 깊이 감사하며 걸음걸음마다 하얀 눈발이 앞날을 축복하고 있다.


능행 스님 정토마을 이사장 jungtoh7@hanmail.net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