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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울 성북동 길상사

기자명 법보신문

애틋한 연정 승화된 자리, 도량은 맑고 향기로웠다

길상화 보살의 시주로
정권실세 요정 대원각
시민운동도량으로 변신


백석과의 사랑이야기
순백의 추억으로 남아


“누구에게나 열린 도량”
법정 스님 염원 받드는
종교 화합·나눔 정신이
살아있는 도량 만들어

 

 

▲ 모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추하지도 않은 길상사. 쾌락과 술수, 관능과 음모가 술판 위에 질펀했던 밀실은 사자후 같은 법문과 청정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도량으로 바뀌었다. 어두웠던 예전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모처럼 포근했다. 햇살을 앞세우고 서울 성북동 길상사(주지 덕운 스님)를 찾아갔다. 육중한 집들의 위세에 눌려 길상사로 가는 사잇길은 유독 가늘다. 일주문에 걸린 포스터에 법정 스님이 환하게 웃고 있다. 길상사는 스님의 3주기 추모법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느릿느릿 봄걸음으로 경내를 둘러봤다. 모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추하지도 않은 길상사.


길상사에는 아직도 우리 가슴을 덥히는 창건 실화가 스며있다. 술과 노래가 흥건히 고여 있던 유곽이 청정도량으로 바뀐 것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마음속에 들어있음이었다. 현대 한국불교에서 우러난 비범한 이야기이다.


창건 실화 속에는 여인 김영한(1916~1999)이 있다. 시인 백석의 애인이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었다. 그녀의 삶을 더듬어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지만 어느 날 집안이 몰락했다.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조선 권번(券番, 기생조합)에 들어갔다. 정악계의 대부 하규일(1867~1937)을 스승으로 모시고 진향이란 기명을 받았다. 진향은 함흥에서 교사들의 회식장소에 갔다가 시인 백석을 만났다. 첫눈에 반한 스물 여섯 백석이 스물 두 살 기생 진향에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줬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따 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울로 올라왔다. 백석은 자야의 집에 머물며 시를 썼다. 1938년에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와의 사랑을 읊은 시였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슬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이하 생략)”


사랑은 뜨거웠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 출신 자야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가자고 졸랐다. 그러나 자야는 따라 나설 수가 없었다. 백석의 인생길에 걸림돌이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로 떠났다. 해방을 맞아 신의주로 돌아왔지만 다시 한국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동강 난 나라 남과 북에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백석을 그리며 또 기다리며 자야는 치열하게 살았다. 사업을 하고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면서 재물을 모으고 지식을 쌓았다. 모두 백석이 나타나면 그에게 바칠 것들이었다. 골짜기에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 일대를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열었다. 제3공화국에서 대원각은 정권실세들의 단골요정이었다. 삼청각, 청운각과 더불어 3대 요정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허기진 마음은 지식으로도, 돈으로도 채울 수 없었다.

 

 

▲요정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청정도량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한 길상화 보살의 공덕을 기리는 공덕비.

 


격정의 세월은 흘러가고, 어느 날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큰 감명을 받고 돌아보니 살아온 날들이 남루했다. 자신을 비우고 싶었다. 자야 여사는 법정 스님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싶었다. 미국에 머물던 1987년, 자야 여사는 설법을 하러 온 법정 스님을 로스엔젤레스에서 처음 뵈었다. 그리고 대원각 건물과 부지를 법정 스님께 시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당시 1000억원대의 재산이었다. 그러나 ‘무소유’의 법정은 이를 간단히 뿌리쳤다. 이로부터 거의 10년 동안 승강이가 벌어졌다.


“제발 시주를 받아주세요. 스님.”


“시주를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보살님.”


그러다 결국 1995년 법정 스님은 김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주었다. 대신 대원각의 전 재산을 개인 명의가 아닌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록하게 했다. 쾌락과 술수, 관능과 음모가 술상 위에 질펀했던 밀실이 도량으로 바뀌는 대역사가 시작됐다. 대원각은 7000평이 넘는 숲속 부지에 40동의 건물이 있었다. 모든 건물에는 술과 고기 냄새가 배어있었다. 청정 일꾼(스님)들은 이를 가만가만 걷어냈다.


1997년 12월 14일 마침내 길상사가 개원했다. 김 할머니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내려준 법정 스님은 보살 목에 108염주를 걸어주었다. 창건법회서 길상화 보살이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제 소원은 저 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입니다.”

 

 

▲▲요정 대원각 시절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던 팔각정에서 이제는 장엄한 법종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픔과 슬픔을 넘어선 비원이었다. 보살의 소원은 참석자 모두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법회에 참석한 천주교, 개신교, 원불교 등 종교 지도자들이 길상화에게 경배했다. 보살은 그 후에도 시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드려야 큰일인데 있는 것을 드렸으니 내세울 일이 아니네.”


“내 모든 재산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 못해.”


길상화 보살은 자신이 죽거든 눈 오는 날 자신의 유해를 길상사 뒤뜰에 뿌려달라고 당부했다. 연인 백석의 시처럼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백석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이다.


길상화 보살은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하루 전날 절에 와서 참배하고 길상헌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비를 마친 유골은 유언대로 첫눈이 오는 날 길상사 뒤쪽 언덕에 뿌려졌다. 그날 길상사 도량이 순백으로 장엄됐다. 그것은 어지럽고도 아픈 과거를 덮는, 영혼이 재탄생하는 순백의 의식이었다. 태어나 부모에게 김영한이란 이름을, 기방 스승에게 진향이라는 기명을, 애인 백석에게는 자야라는 아호를, 그리고 법정스님으로부터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비록 김영한, 진향, 자야였으나 결국 길상화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법정 스님은 왜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였을까. 스님이 불일암을 등지고 강원도 오두막에 들었을 때였다.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라는 모임을 발족시켰다. “삭막하고 살벌한 현실에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취지의 시민운동이었다. 1994년 3월 출범한 모임은 소리 없이 번져나갔다. 전국에서, 각계에서 ‘맑고 향기롭게’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회원들은 모일 장소조차 없어 이 절 저 절을 전전했다. 그러자 주변에서 김영한 할머니의 청을 받아들이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법정 스님이 결심했다.


“시절인연이니 할 수 없구나.”


법정 스님은 개원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면서도 맑고 향기로운 도량이 되었으면 합니다. 불자들만이 아니라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들며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합니다.”


개원식에 참석한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어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해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가 탄생했다. 그것은 “누구나 들어와 고뇌의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 달라는 길상화 보살의 염원이기도 했다. 스님은 창건 11주년에 이런 법문을 했다.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몸과 마음에 전율 같은 것을 느낍니다. 과연 제 자신이 맑고 향기롭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묻게 됩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합니다.”


법정 스님도 지상에서 마지막 밤을 길상사에서 보냈다. 투병 중이던 병원에서 제자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길상사로 옮겨달라고 했다. 떠날 때가 된 것이었다. 스님은 한 번도 길상사에서는 자신의 몸을 뉘지 않았다. 법문이 있는 날에도 법회를 마치면 곧장 돌아갔다. 그런데 스님이 길상사를 찾았다. 스님은 길상사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입적했다. ‘덕’자가 들어간 문도들이 이를 지켜봤다.


길상사 설법전 앞에는 가녀린 모습의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다. 성모상 조각가 최종태 교수가 빚은 것이다. 또 기독교 신자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이 7층 석탑을 기증했다. 석탑은 법정 스님과 길상화 보살의 깊은 뜻을, 그리고 길상사가 종교화합의 상징적 공간임을 기리고 있다. 길상사 경내에는 수녀들과 목사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해마다 부활절에는 ‘작은형제 수도회’와 ‘성북동 성당’ 사람들이 달걀을 들고 나타난다. 12월이면 길상사에는 성탄절을 경축하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길상사를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자원봉사자들이다. 날마다 수백, 수천 명의 공양을 준비하는 보현회, 안내와 정랑 청소를 맡아하는 문수회, 죽은이를 돌보고 유족을 보듬는 지장회 등이 있다. 또 매주 목, 금요일에 결식 이웃을 위해 반찬을 만드는 귀한 손들이 있다. 봉사자들의 노란 앞치마가 꽃보다 곱다. 그들이 있어 길상사는 살아 움직인다. 맑고 향기롭다.


법정 스님이 떠나고 한 때 길상사에는 ‘욕심’ 논쟁이 일었다. 이를 일소하기 위해 2011년 2월 덕운 스님이 주지로 부임했다. 은사 스님처럼 은둔하며 선방을 지키던 덕운 스님에게는 느닷없는 감투였다. 이것 또한 시절인연이었다. 스님은 길상사에 드리워진 욕심과 의혹들을 걷어냈다. 스님은 모든 것이 법정 스님을 빼닮았다. 은사 스님의 말씀대로 길상사를 ‘맑고 향기롭게’ 가꿔가고 있다. 아직도 주지 자리가 어색하다. 하루 빨리 선방으로 돌아가고 싶다.

 

 

▲ 선방을 지키던 덕운 스님은 주지 자리가 여전히 어색하다.

 


“딴 짓 말고 중노릇 열심히 하라하셨습니다. 늙어서 후회한다고요.”


덕운 스님은 은사 스님이 보고 싶다. 요즘 부쩍 큰 스님의 빈자리가 커 보인다. 오는 11일은 법정 스님 3주기이다. 큰스님이 입적하신 진영각에 유품들을 모아놓았다.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라는 무소유의 가르침을 모셔놓았다. 

 

김택근 wtk22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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