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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에는 진실로 이러저러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번뇌·망상 굳은 덩어리
얼음으로 비유 한다면 
해소된 후엔 물과 같아


진리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말 자체가 진리될 수는 없어


선방서 깨달음 얻지 못한채
안거 횟수만 따지는 풍토에
임제 스님의 탄식 들리는 듯

 

 

▲이조 혜가 스님은 달마 스님에게서 법을 얻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부처임을 체득한 것이다. 법은 본래 얻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중국 소림사 인근에 위치해 있는 이조사. 혜가 스님이 주석한 사찰이다.

 

 

問, 如何是西來意오 師云, 若有意하면 自救不了니라 云, 旣無意인댄 云何二祖得法고 師云, 得者는 是不得이니라 云, 旣若不得인댄 云何是不得底意오 師云, 爲儞向一切處하야 馳求心 不能歇일새 所以로 祖師言, 咄哉라 丈夫여 將頭覓頭라하니라 儞言下에 便自回光返照하야 更不別求하고 知身心與祖佛不別하야 當下無事하면 方名得法이니라

 

해석) 물었다.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만약 무슨 의도가 있었다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 물었다. “이미 무슨 의도가 없었는데 2조께서는 어떻게 법을 얻었습니까?” 임제 스님이 대답했다. “얻었다는 것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만약 얻지 못했다면 얻지 못했다는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그대들은 사방의 도처로 치달리면서 불법을 구하려는 마음을 쉬지 못한다. 그래서 조사께서 말하기를 ‘이 한심한 장부들아! 자기 머리를 두고서 또 머리를 찾는구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대들은 이 말 끝에서 곧 스스로를 되돌려 비춰보고 다시는 바깥에서 달리 불법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몸과 마음이 조사나 부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당장 달리 할 일이 없게 되고 이때 법을 얻었다 고 하는 것이다.”

 

강의) 달마 스님께서 서쪽에서 오신 까닭은? 이라는 질문은 너무나 유명한 말입니다. 불법의 근본을 묻거나, 혹은 선의 본질, 깨달음의 요체를 묻는 정형화된 화두의 일종입니다. 앞서도 임제 스님은 불법을 밖에서 찾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부처와 중생은 물과 얼음처럼 형태로는 구분이 되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번뇌와 망상으로 굳은 것을 얼음이라고 한다면 번뇌와 망상이 해소된 것은 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와 중생의 본질은 같습니다. 그래서 모양이나 모습에서 부처를 찾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달마 스님께서 어떤 의도를 갖고 밖에서 법을 구하려했다면 결코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조금은 이해 될 것입니다. 법은 없는 것이 생기거나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조인 혜가 스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달마 스님에게서 법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부처임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달마 스님께서는 만약 얻었다고 한다면 얻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얼음인 내가 본래 물임을 깨달았다고 해서, 밖에서 따로 물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얻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거짓입니다. 밖으로 온갖 이론과 성스러운 것들을 쫓아 법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머리를 두고서 머리를 찾는 격이 됩니다. 법을 얻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리하여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고 할 일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법을 얻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법은 본래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大德아 山僧今時에 事不獲已하야 話度說出許多不才淨하니 儞且莫錯하라 據我見處하면 實無許多般道理요 要用便用하고 不用便休니라 祇如諸方이 說六度萬行하야 以爲佛法하나 我道是莊嚴門佛事門이요 非是佛法이니라 乃至持齋持戒하며 擎油不㴸하야도 道眼不明하면 盡須抵債하야 索飯錢有日在니라 何故如此오 入道不通理하면 復身還信施하나니 長者八十一에 其樹不生耳라하니라

 

해석) “대덕 스님들이여! 산승이 오늘 부득이 지혜롭지 못한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착각하지 말라. 내가 보기에는 진실로 이런저런 허다한 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쓰고 싶은 사람은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쉬어라. 다만 제방에서 육도만행이 불법이라고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이것은 장엄이고 불사이지 불법은 아니다. 나아가 몸을 정갈하게 하고 계율을 잘 지키며 기름이 가득 찬 그릇을 들고 가도 흘리지 않는 정도의 경지라도 도를 보는 안목이 밝지 못하면 모두 빚을 지게 되는 것이니 밥값을 갚아야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불도에 들어와서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몸을 바꾸어 신도들의 보시를 갚아야 한다. 그래서 보시를 했던 장자가 81살이 됐을 때 나무에서 비로소 버섯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강의) 불법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말로는 본질을 찌를 수 없습니다. 사과라고 말을 하지만, 말로 형상화된 개념일 뿐이지 실제 사과가 아닙니다. 그럼으로 향기를 맡을 수도, 먹을 수도 없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아무리 설명 한다 한들 그 말이 진리 그 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임제 스님께서는 설명 또한 결국은 쓸데없는 말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말과 글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불법에는 많은 도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설명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려니 그것도 각각의 중생들 근기에 맡게 설명하려니 번잡스러워졌을 뿐입니다.


육바라밀을 비롯해서 계행을 지키고, 몸과 행동을 정갈하게 하고 열심히 예불을 하더라도 도를 보는 눈을 밝혀, 깨닫지 못하면 모든 노력들은 장식이나 치장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되면 후생에서 이생에 받았던 신도들의 보시를 다시 갚아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육바라밀을 비롯한 수행과 만행이 결코 헛된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노력들은 분명히 필요하고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육바라밀이나 만행은 깨달음으로 가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 자체를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이를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이들이 많습니다. 임제 스님께서는 이를 경계한 것입니다. 육바라밀은 고해의 바다를 건너 깨달음으로 가는 배입니다.


그런데 고해의 바다를 건널 생각은 하지 않고 배만 만지작거리거나, 고해의 바다를 건넜는데도 배를 머리에 이고 다닌다면 결코 열반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됩니다. 헤엄을 치든 배를 타고 건너든 바다를 건너 피안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보면 요즘 조계종에서는 선방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안거를 했느냐를 가지고 법의 우열을 논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 안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안거 횟수를 가지고 법의 높낮이를 논하니, 임제 스님의 탄식이 들리는 듯합니다.


장자가 81살이 됐을 때 나무에서 비로소 버섯이 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제 15조 가나제바 존자의 게송입니다. 존자가 인도의 한 장자 집에 갔을 때 79세의 한 장자와 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집의 정원에 있는 고목에서 맛있는 나무버섯이 나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무버섯은 전생에 이들 부자의 보시를 받은 비구로, 깨닫지 못하고 죽은 까닭에 그 과보로 이 생애에서 장자가 81세가 될 때까지 나무버섯으로 시주의 빚을 갚게 됐다는 것입니다. 인과와 과보는 이렇게 무거운 것입니다.

 

乃至孤峯獨宿하며 一食卯齋하며 長坐不臥하며 六時行道하여도 皆是造業底人이요 乃至頭目髓腦와 國城妻子와 象馬七珍을 盡皆捨施하야도 如是等見은 皆是苦身心故로 還招苦果하나니 不如無事하야 純一無雜이니라 乃至十地滿心菩薩도 皆求此道流蹤跡하나 了不可得이니 所以로 諸天이 歡喜하며 地神이 捧足하야 十方諸佛이 無不稱歎하나니 緣何如此오 爲今聽法道人이 用處無蹤跡일새니라

 

해석) 또 나아가 “홀로 솟은 산봉우리에 살며 아침 한 끼만 먹고 눕지도 않고 앉아서 하루에 여섯 번 도를 닦는다 하여도 다 업을 짓는 사람들일 뿐이다.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와 나라와 성곽과 아내와 자식을 보시하고 코끼리와 말과 칠보의 보물들을 남김없이 모두 다 보시하더라도 이와 같은 견해는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까닭에 고통스런 과보만을 초래하게 된다. 아무 일 없이 순일하여 잡스런 것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하다. 나아가 십지를 원만하게 성취한 보살들이 이 수행자의 종적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천신들이 기뻐하고 지신들도 발을 받들어 올리니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도 칭찬하고 찬탄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그대들의 본질인 도인은 작용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강의) 임제 스님은 대소승(大小乘)의 모든 수행을 치열하게 하고 온갖 보시를 한다고 해도 고통스런 과보만을 초래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깨닫겠다는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마음으로 수행하고 보시를 하게 되면 오히려 역효과만을 낼 뿐입니다. 아무 일 없이 순수하고 잡티가 하나도 없는 허공처럼 텅 빈 마음을 유지하는 것만 못합니다. 만약 순수하여 잡티가 하나도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십지에 오른 보살도 흔적을 찾을 수 없고 시방의 부처님들도 모두 칭찬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노력들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노력이나 과정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수행과 보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자체가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에든 마음에든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이만큼 수행을 했는데, 내가 이렇게 보시를 했는데, 이런 마음을 가질 것 같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의 본질인 부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정리=김형규 기자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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