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밥할머니
25. 밥할머니
  • 송지희 기자
  • 승인 2013.03.28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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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고통의 아수라를 자비로 뛰어넘은 호국 보살

지친 조선군 위해 밥 보시
행주대첩서 의병으로 활약
말년엔 재산 사찰에 희사

 

 

▲ 일러스트레이터=이승윤

 


비릿한 피 내음이 북한산 자락을 휘감았다. 곳곳에 쓰러져 있는 병사들에게 패전의 흔적이 역력했다.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진영을 온통 뒤덮었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까.” 퇴로조차 막혀버린 패잔병들에겐 일말의 희망조차 없어 보였다.


선조 26년(1593) 1월, 명나라와 조선 연합군은 왜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1년이 돼가던 시점이었다. 그동안 왜군의 기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조선군은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원군과 연합, 평양성을 탈환하는 쾌거를 이뤘지만 한양을 눈앞에 둔 벽제관 전투에서 왜군의 계략에 휘말려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승리에 도취돼 방심했던 것이 패배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황급히 개성으로 후퇴하려 했으나 왜군은 순식간에 북한산을 에워싸고 모든 퇴로를 차단했다.


패잔병들은 다시 무기를 들 여력조차 없었다. 병사의 대부분이 심각한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 퇴각을 위한 전투는 몰살을 앞당기는 구실이 될 뿐이었다. 더욱이 이곳 고양 벽제는 한양을 코앞에 둔 지역으로, 그동안에도 하루가 멀다하고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던 곳이다. 때문에 이미 군량미도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다.


군대를 이끈 도원수 김원명은 고민이 깊어졌다.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북한산을 벗어나 본대와 합류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왜군의 포위망을 뚫고 후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부상자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잃어갔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막막한 상황, 병사들은 산속에 숨 죽인 채 동료들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삶에 대한 의지는 사라져 갔다.


이때 한 아낙이 등장한다. 남평 문씨 집안의 며느리, 문옥형의 아내였다. 이름이 전해지진 않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를 밥할머니 혹은 밥보시할머니라 부른다. 밥할머니는 비록 여성이지만 배포가 크고 지혜로워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그녀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전쟁 통에 피난가려는 사람들을 설득해 남편을 중심으로 한 의병 활동을 독려하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벽제관 전투의 패전 소식을 들은 것이다.


밥할머니는 창고의 쌀을 꺼내 주먹밥을 만들었다. 그리고 깊은 밤, 왜군들의 눈을 피해 주먹밥을 한 아름 안고 북한산에 올랐다. 밥할머니의 주먹밥은 죽음만을 기다리던 병사들에게 한줄기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일개 아낙이 장군을 뵙길 청하옵니다.” 그녀는 이어 병사들을 이끄는 책임자를 만나길 청했다. 도원수 김원명과 장군들도 목숨을 걸고 병사들을 위한 식량을 가지고 온 밥할머니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밥할머니를 통해 마을의 지원을 받을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것이 분명했다. 장군들과 만난 밥할머니는 한 가지 방책을 전했다. 병사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고 무사히 퇴각하면서도 왜군을 무찌를 수 있는 묘책이었다. 귓속말을 들은 장군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다음날 밤, 부상자를 제외한 병사들이 북한산 노적봉에 올랐다. 그리고 볏짚을 넓게 펼쳐 노적봉을 감싸기 시작했다. 작업은 매일 밤 이어졌다. 밥할머니의 지시를 받은 마을 사람들이 어둠을 이용해 병사들에게 짚과 음식을 전달했다.


며칠 후, 밥할머니는 광주리 하나를 곁에 낀 채 북한산에 올랐다. 평소와는 달리 환한 대낮이었다. 왜군들이 북한산을 오르는 밥할머니를 감시의 눈길로 살폈지만 평범한 행색의 아낙이었던 터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런데 잠시 후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밥할머니를 본 왜군들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광주리에 흰 쌀이 소복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왜군들이 밥할머니를 막아섰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산 속에 병사들이 군량미를 나눠준다고 해서 다녀오는 길입니다.”


왜군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밥할머니는 당당히 손가락을 들어 노적봉을 가리켰다.


“저기 보이는 누런색 짚더미가 전부 노적가리(쌓아 둔 곡식더미)요. 군량미는 남아나고 우리 백성들은 굶어 죽어가니까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으라고 합디다. 내참 그렇게 쌓여있는 쌀은 내 평생 또 처음 보니, 전쟁통엔 병사들 팔자가 좋긴 좋은가 봅니다.”


짚더미에 둘러쌓인 누런 노적봉은 멀리서 보기에 정말 그럴싸한 곡식더미처럼 보였다. 한참 넋을 잃은 채 노적봉을 바라보던 왜군이 다시 물었다.


“그럼 강물 색깔은 왜 이리 뿌옇소?”
아닌게 아니라 항상 맑은 물이 흐르던 창릉천이 어느새 탁한 물로 변해 있었다. 밥할머니는 눈썹 하나 꿈쩍 않고 태연스레 입을 열었다.


“아, 끼니때가 됐으니 밥을 먹어야 할 것이 아니오. 그 많은 병사들을 먹이려면 쌀을 한두가마 씻겠소? 강에 쌀 씻은 물이 흘러 내려오는 게지.”


왜군이 넋 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저 산 뒤편에서 올라오는 연기는 밥 짓는 연기인가?”


“당연한 걸 알면서 왜 묻소”


밥할머니가 총총 걸음으로 마을을 향해 사라지자 왜군들은 부리나케 진지로 달려가 듣고 본 일들을 모두 보고했다. 왜군들은 혼비백산했다. 사실 지치고 굶주리기는 왜군들도 매한가지였다. 모르긴 몰라도 산속의 조·명 연합군은 더욱더 참혹한 상황일 것이라 예측했기에 그럴만도 했다. 적군 진영에 쌀이 넘쳐난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기가 급격히 저하된 것은 당연지사다. 거기다 왜군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강가로 몰려들어 뿌옇게 변한 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쌀 씻은 물이라도 마셔 배고픔을 달래려는 것이었다.

 

고양 지역서 보살로 추앙
주요 문헌 기록 없이 구전
석상은 향토문화재 지정도


그리고 다음날,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조·명 연합군이 갑작스레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왜군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나가떨어졌다. 낮에 마신 강물 때문에 왜군의 대부분은 배탈 때문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사실 뿌연 강물은 쌀 씻은 물이 아니라 횟가루를 섞은 물로, 이 모든 것이 바로 밥할머니의 지혜에서 비롯된 계략이었다. 번득이는 지혜로 위기에 처한 아군을 구해냄은 물론, 승리까지 이끈 셈이다.


밥할머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녀자들로 구성된 여성의병대를 조직, 행주산성으로 들어갔다. 행주산성은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권율 장군의 고군분투로 왜군의 공세를 근근이 막아내고는 있었지만 이미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성벽을 타고오르는 왜군들을 막기에도 급급한 순간에, 부녀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딱히 없었다. 그러나 여성의병대는 웬만한 병사들만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모두 밥할머니의 덕분이었다. 성안으로 들어간 밥할머니는 부녀자들을 동원해 하루 1만인분씩 주먹밥을 만들어 병사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는가 하면, 치마에 치마를 덧댄 ‘행주치마’를 개발해 부녀자들이 손쉽게 무기용 돌멩이를 옮겨 전투에 힘을 보태도록 했다.

부녀자들이 돌을 나르고 뜨거운 물을 붓는 등 의병활동에 나선 것으로 유명한 ‘행주대첩’. 그 일화의 중심에 바로 밥할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활약상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밥할머니는 이후에도 비밀창고의 곡식을 모두 개방해 전쟁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긍휼했으며, 인조반정 때에는 아들 문천립을 시켜 위기에 빠진 임금을 보필토록 했다. 이에 인조는 밥할머니에게 정경부인의 칭호를 내려 공을 기렸다고 한다. 또한 밥할머니는 불심도 깊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북한산 일대의 사찰을 재건하기 위해 남은 재산을 희사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어찌보면 흔들림 없는 호국신념과 측은지심에서 비롯된 자비심의 이면에 바로 불심이 있었던 셈이다.


여성의 몸으로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낸 밥할머니지만 사실 그녀가 실존인물인지 여부는 확신하기 힘들다. 우선 조선시대 주요 문헌상에서 그녀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밥할머니가 실존인물로서 조명되기 시작한 것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오랜 세월 해주 오씨로 믿어졌으나 근래에는 밀양 박씨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풀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현재로써는 밥할머니의 실존여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남편 문옥형의 집안인 남평문씨 충양공파 족보의 일부 기록, 그리고 지금은 화장해 사라졌지만 1965년까지 존재했다는 묘소 등이다. 사실상 밥할머니는 오랜세월 동안 실존인물이라기 보다 고양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던 설화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미 4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밥할머니 이야기의 진실 여부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밥할머니의 존재는 실존 여부를 떠나 이미 지역 사람들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오랜세월 아버지와 할아버지, 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밥할머니의 삶을 구전으로 보존해 왔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김형만 밥할머니보존위원장은 “이 지역 사람들은 밥할머니 이야기를 어려서부터 당연한 듯 들으며 자라왔다”며 “밥할머니가 역사적으로 본격 연구되기 시작한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의 한 여성 이야기가 이토록 오래도록 구전돼 온 것만으로도 지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짐작할 수 있다”고 전했다.


고양시 모퉁이 공원에 자리한 밥할머니석상이 밥할머니에 대한 지역민들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밥할머니 석상은 2006년 고양시 향토문화재 46호로 지정됐으며, 매년 지역민과 남평문씨 문중에서 그뜻을 기리는 추향제를 열어오고 있다.


석상의 머리는 없다. 일제강점기 석상의 유래를 안 일본군이 목을 잘랐다고 전해진다. 후에 머리를 만들기도 했지만 지역민들은 억지로 머리를 만들면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고 생각해 지금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키로 뜻을 모았다. 석상의 몸통은 약사여래의 수인을 하고 있어 불상에 가깝다. 밥할머니의 호국정신과 자비심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만들었다고도 하고, 밥할머니에게 도움 받은 민초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의 불심을 반영한 보살상으로 만들어 기렸다는 설도 있다.


진실이야 어찌됐건, 분명한 사실은 기나긴 세월동안 밥할머니 석상은 지역민들의 삶을 지탱하는 의지처가 돼 왔다는 사실이다. 힘들고 배 고픈 시절 막막한 상황에 당면한 누군가는 밥할머니의 지혜와 자비에 기대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신앙의 대상이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망국의 위기, 지혜로 나라를 지키고 자비로 사람들의 목숨을 구제했던 밥할머니. 400년이 넘는 세월동안 구전되며 지역민들의 마음 속에 ‘보살’로 기억되는 자체 만으로도, 그녀의 삶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송지희 기자 jh35@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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