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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일본 이시야마데라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

기자명 법보신문

베일에 싸인 발해불교, 일본 천년고찰서 만나다

861년, 발해사신 이거정이
일본 왕 선물로 준비했으나
전달 못하고 결국 사찰로
“발해불교 연구의 1차 자료”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는 붓따빠리(佛陀波利)가 번역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에 내용을 좀 더 첨가한 것으로, 글자가 첨가된 인연을 설명하고 불정존승다라니를 지니고 염송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험공덕을 설한 것이다.

 

 

1997년 12월, 발해 건국 1300년을 앞두고 네 명의 젊은이들이 발해 당시의 방법으로 뗏목을 건조하여 발해 항로 복원에 나섰다. 뗏목 이름은 ‘발해1300호’. 이들은 옛 발해의 땅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해 해상항로를 따라 바람과 해류에만 의지해서 항해를 시작했다. 혹한 속에서도 24일간의 항해는 성공적인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23일 오후 일본의 오키섬을 눈앞에 두고 뗏목은 난파되었으며, 4명의 대원은 모두 고인이 되고 말았다. 경상남도 통영시에서는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침묵의 영웅’이란 기념조형물을 통영수산과학관 부지에 세워 놓았다.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4명의 젊은이들이 항해를 시작한 것은 발해 항로를 증명함으로써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고 이곳을 왕래하던 발해인의 웅혼한 기상을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발해는 건국 이후부터 당, 일본, 신라 등 주변 국가들과 긴밀한 교류관계를 유지했다. 그 중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두 나라는 727년부터 약 200년간 공식적으로 50여회에 걸쳐 서로 사신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였다.


두 나라의 교류를 통해 발해는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고, 일본은 대륙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발해로부터 일본에 전해진 문물 중 최고의 인기 품목은 모피였다. 그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920년 여름, 발해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에 참석한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은 당시 가장 비싼 물건이었던 담비 가죽옷을 8벌이나 겹쳐 입고 있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헤이안시대 중기 일본에서 편찬된 법령집 ‘엔기시키(延喜式)’에는 “담비 가죽은 참의 이상만 착용하도록 한다”는 기록이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모피에 대한 부자들의 욕구는 별로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외에도 일본의 궁중에서 연주하던 궁정악, 달력의 일종인 선명력 등이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특히 선명력은 1년을 365.2446일로 계산한 역법인데, 859년 발해 대사 오효신이 일본에 전해준 이래 1684년까지 무려 823년간 사용하기도 하였다.


불교문화 또한 양국 승려 또는 승려와 사신들 간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전달되었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던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교류관계에 대해 두 나라 연구자들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연구원으로 참여한 나는 발해시대에 일본에 전해진 유물이나 관련 유적을 조사하는데 관심을 집중하였으나, 기록만큼 유물이 남아있지는 않았다. 다만 현재 일본 시가켄 오쯔시 이시야마데라(滋賀縣 大津市 石山寺)에 소장되어 있는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加句靈驗佛頂尊勝陀羅尼記)’를 실제로 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전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한국 학계에 알려져 있었지만 경전의 내용이 모두 조사된 적은 없었고, ‘발해사신 이거정(渤海使臣 李居正)’이 전해주었다는 내용이 있는 발문(跋文) 몇 줄 만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경전으로 인해 현재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은 발해 불교신앙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으며, 사이쵸(最澄)와 쿠카이(空海)가 전래했던 중기밀교와는 또 다른 성격을 가진 잡부밀교의 일본 유입경로를 새롭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시야마데라는 진언종 토오지(東寺)파의 별격본산(別格本山)으로 꽤 유서 깊은 사찰이다. 761년경 창건되었으며, 초기에는 밀교사원이었으나 후기에는 관음영험소로서 신앙되어져 오고 있다. 이시야마데라는 창건초기인 762년 2월부터 12월까지 사경소에서 팔만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일체경을 서사했다고 한다. 현재 이시야마데라에는 일체경을 비롯해서 다수의 불교 경전이 소장되어져 있는데, 이 경전들은 양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매우 가치가 높은 것들이다.


현재 이시야마데라가 수집해 놓은 불교경전 중에는 정관(貞觀)3년(861) 발해사신 이거정이 가져 왔다는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가 소장되어 있다.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는 붓따빠리(佛陀波利)가 번역한 ‘불정존승다라니경(佛頂尊勝陀羅尼經)’에 내용을 좀 더 첨가한 것으로, 글자가 첨가된 인연을 설명하고, 불정존승다라니를 지니고 염송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험공덕을 설한 것이다. 기존의 붓따빠리가 번역한 다라니로는 윤회의 고통을 끊을 수 없었으나 문장 수도 더 많고, 발음도 다른 새로운 다라니를 지송하자 일체의 고통을 받지 않게 되었고, 다른 이의 고통도 구제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시야마데라는 진언종 토오지(東寺)파의 별격본산(別格本山)이다.

 


이시야마데라 소장본은 먹으로 쓴 일본 인세이기(院政期, 11세기 후반~12세기)의 필사본이다. 해충의 피해와 열화로 인해 상당히 훼손이 심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는 보존처리가 끝난 상태라 책의 현상을 파악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발해 사신이 등장하는 발문의 내용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大唐大中六年十月二八日弟子
殷喪施貞觀三年四月十四日
渤海國使英大夫政堂
省春部正三位上中將
□谷枉縣開李居正持
來之

 

大唐 大中 6년(852) 10월28일에 제자 殷喪이 시주하였다.
貞觀 3年(861) 4월 14일에 발해 사신 吳秩大夫, 政堂省 春部卿,
正三位, 上中郎將, □谷枉縣 開國男 李居正이 가지고 왔다.

 

이 경전에 등장하는 이거정은 누구일까? 그는 역사서에 의하면 833년에 당에서 유학하고 귀국했던 인물로, 861년 이미 70세가 넘은 고령이었지만 장관의 자리에 있으면서 일행 105명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한 인물이다. 그들의 방일목적은 몬토쿠(文德)천황의 상에 조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천황은 영객사와 지방관에게 “발해사신이 예(例)를 어기고, 조문하러 왔으므로 마땅히 돌려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지시하였다. 그러면서도 일본 천황은 이거정에 대해서만은 직위가 매우 높고, 재주가 아주 뛰어나다고 말하며 많은 선물을 하사한다. 결국 입경은 허락되지 않았고, 발해에서 갖고 온 선물 또한 전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분명히 왕실로 전해졌어야 될 경전이 어떤 연고로 이시야마데라에 소장되게 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이 경전이 사경되었던 시기에 나라(奈良)에 위치한 토다이지(奈良 東大寺)의 승려 카쿠쥬(覺樹)가 찌꾸시(筑紫)의 다자이후(大宰府)까지 가서 사경을 했다는 기록은 눈여겨 볼만하다. 카쿠쥬는 1120년경 대륙으로부터 수입된 문물, 특히 경전·성교를 입수하기 위해 다자이후나 그 외항이자 당시 대륙 교섭의 창구였던 하카다(博多)까지 가서 관음사라는 절까지 지어 놓고 왕성한 경전 수집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시야마데라 역시 나라시대 이후 일체경을 제작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경전수집을 해온 사찰이므로 이시야마데라의 승려들이 경전수집을 위해 9세기 당시 대륙 교섭의 창구였고, 발해인들이 100명 이상 머물고 있던 시마네군(島根郡)까지 왔었던 것은 아닐까?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를 처음 일본에 소개한 사람을 일본에서는 대체로 진언종 승려 슈에이(宗叡)라고 여기고 있다. 그런데 슈에이(809~884)는 사이쵸(最澄)·쿠카이(空海) 등과 함께 당나라 유학승 중 한 사람으로, 그가 당으로 건너간 것은 862년의 일이고 일본으로 귀국한 것은 865년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대정신수대장경’에 포함되어 있는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가 슈에이의 사본이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일본에 최초로 전해진 본은 861년 발해의 이거정이 전해준 이시야마데라의 ‘가구영험불정존승다라니기’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사이쵸와 쿠카이의 귀국과 함께 밀교가 대유행을 하게 되는데 이들의 중기밀교와는 별도로 대중들은 현세이익적인 잡밀에 대해서도 꾸준히 신앙을 가져왔다. 특히 불정존승다라니는 아직도 열렬히 신앙되어지고 있다. 현재 일본의 진언종에서 상용되고 있는 다라니가 가자구족본이고, 매년 12월에 진언종 사찰에서 개최하는 코우교다이시(興敎大師)다라니회에서 염송하는 다라니 또한 불정존승다라니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임석규 실장

그리고 이시야마데라본은 자료가 전무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발해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1차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성격이나 신앙적 배경에 대해 연구가 미진한 불교미술 분야에는 작지만 아주 밝은 등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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