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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남산감실상과 낭산마애삼존상

기자명 법보신문

신라의 산악신앙, 불교를 만나 조화로운 혼합을 일구다

신라, 산신을 호국신으로 여겨
7~8세기 불교 영향 커지면서
신상에서 불상으로 모습 변모

 

 

▲7세기에 조성된 경주 남산 불곡감실좌상(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여신상인 마쯔오타이샤여신좌상(아래)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때문에 불곡감실좌상을 불상이 아닌 여신상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고대 한국인들의 산악에 대한 신앙심은 단군의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환웅이나 신라 육촌의 시조들이 모두 산위에 강림한 일이나, 단군이 왕위를 물려준 뒤 산으로 들어가 아사달의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매우 열렬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강화도의 마니산은 환웅강림의 땅으로서 정상에 제단이 차려져 있고, 전국체전 등 중요한 국가행사를 개최할 때 성화가 채화되는 곳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또한 산악을 경배하고 신앙했다. 삼국시대 국도 경주를 중심으로 했던 삼산사상(三山思想)이나, 통일이후 국력의 팽창과 함께 더욱 확대되었던 오악사상(五嶽思想)은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체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문화발전에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국가적인 제사를 대·중·소 삼사(三祀)로 나누어 지냈으며, 그 중 대사(大祀)는 삼산신(三山神)이라고 하는 호국신에게 국왕이 올리는 신라 최고의 제사다. ‘삼국사기’에는 삼산이 나력산(奈歷山), 골화산(骨火山), 혈례산(穴禮山)으로 되어 있는데, 대체로 나력산은 현재 경주의 낭산(狼山), 골화산은 경북 영천의 금강산, 혈례산은 경북 청도의 오례산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인들은 이런 삼산신을 호국신으로 생각했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북행할 때 낭자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었는데 그들이 나림, 혈례, 골화 세 곳의 호국신이었다는 기사가 있다. 즉, 삼산신은 호국신이며 여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삼산신 뿐 아니라 다른 산악신들도 호국신이었다고 볼 수 있는 사료가 있다. ‘삼국유사’ 선도성모(仙挑聖母)조를 보면 소사(小祀)의 산신이 “신모(神母)가 이 산에 오래 살고 계시며 나라를 진우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서악 산신인 신모도 호국여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치술령신인 치술신모, 영축산신인 변재천녀, 지리산신인 성모천왕(로고할멈), 가야산신인 정현모주 등은 모두 여신이다.


삼산 중 유일하게 수도 경주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산이라 할 수 있는 낭산은 ‘삼국사기’ 실성왕(402~417)조에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니는 신유림’으로 신앙되어온 영산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21 경주부 산천조에는 낭산은 경주의 진산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낭산의 신은 김유신을 구할 때 아가씨(娘)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등 호국신의 성격을 갖는 여신이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 한국 고대 산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 모습이 명확하게 전해지는 것은 아직 없지만 2005년 발표된 일본 무사시노미술대학 박형국 교수의 논문은 매우 독창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대한국의 여신신앙과 현존여신상에 대해(古代韓の女神信仰と現存女神像について), 불교예술(芸術) 278호) 그는 논문에서 당시까지 두건을 쓰고 있는 피모지장보살로 여겨지던 경주 남산의 불곡감실불과 경주 낭산 마애삼존불의 본존을 불상이 아닌 여신상으로 보았으며, 특히 남산불곡감실상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여신상인 교토 마쯔오타이샤(松尾大社)의 목조여신좌상과 같은 도상을 가진 신상으로 보았다. 마쯔오타이샤의 여신상이 9세기에 제작된 것이고, 남산 불곡감실상이 7세기에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 최고(最古)의 여신상은 신라 여신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겠지만 양국의 고대 신앙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우선 7세기 중엽에 조성되었다고 생각되는 남산 감실상(이 상은 현재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이란 명칭으로 보물 제198호로 지정되어 있다)을 살펴보면 헤어스타일부터 일반적인 불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상처럼 육계가 솟아있거나 보살상처럼 보관을 쓰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나한상이나 보통의 지장보살처럼 삭발을 하고 있지도 않고 얼핏 보면 두건을 쓴 듯도 하다. 그래서 억지춘양격이지만 피모지장보살상으로 추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주 남산에 새겨진 상이 모두 불상이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본다면 이 상을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머리 꼭대기가 약간 올라와 있는 것은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것이고, 머리카락은 양 갈래로 나뉘어 어깨를 지나 아래로 길게 내려오고 있다. 양 손은 배 앞에 모으고 있으나 옷에 가려 볼 수 없다. 사각형 대좌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데 오른쪽 발바닥이 보인다. 불상을 상징하는 광배나 백호,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이 상은 남산 최초의 불상, 특수한 형태의 불상, 자비심 깊고 여성스러운 상 등의 수식어를 지닌 불상으로 여겨져 왔으나 여러 면에서 불상이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일본 마쓰오타이샤의 여신좌상과 형태면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남산의 여신상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을까?


남산 불곡감실상이 최초의 여신상이라면 이 상을 뒤따르는 상이 역시 같은 경주 낭산에 한 분 모셔져 있다.


경주의 진산이기도 한 낭산에는 많은 유적이 흩어져 있다. 낭산의 남단에는 문무왕19년(679)에 완성되어 명랑법사의 비법에 의해 당군을 격파했던 호국사찰 사천왕사가 있다. 그리고 낭산의 동쪽 기슭에는 의상대사가 출가한 명찰이며, 신라왕실의 원찰이었던 황복사지가 있다. 사지에는 692년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으며, 주변에 당간지주, 귀부 등 통일신라시대 석조유물이 다수 남아있다. 1943년 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제2층 옥개석에서 사리기, 금제방형합, 은제방형합, 금제여래좌상, 금제여래입상 등이 들어있는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함의 명문에 의하면 신라 효소왕(재위 692~702)이 신문왕을 위해 건립한 후 성덕왕이 효소왕과 신목태후를 위해 성덕왕 5년(706) 5월30일에 불사리 4과와 순금제아미타불상 1구,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탑 안에 모셨다고 되어 있다.


낭산에 대한 신앙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5세기에는 신선들이 내려와 노닐던 신유림(神遊林)이었지만, 7세기에는 사천왕사가 건립되면서 사천왕신앙을 기반으로 한 호국의 영산이 되었고, 8세기가 되면 아미타신앙에 기반한 왕실의 기복처로 발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낭산마애삼존본존.

 


이 낭산의 서쪽 기슭에 있는 자연바위에 보물 665호로 지정되어 있는 낭산마애삼존석불이 있다. 바위의 남면에 삼존이 부조되어 있으나 마모와 박락이 심하다. 중앙의 본존상은 불곡감실상과 마찬가지로 감실 안에 표현되었으며, 머리카락은 머리 꼭대기에서 한 번 묶어서 정면 좌우와 뒤로 나뉘어 흘러내리고 있다. 머리카락 전체에 머릿결이 표현되어져 있어서 두건을 쓰지 않은 여성인 것이 확실하다. 원형의 상호, 가늘게 뜬 눈, 풍만한 턱은 마쯔오타이샤의 여신상과도 닮아있다. 천을 네모나게 잘라 이은 가사를 통견으로 입고 가부좌를 틀고 있다. 머리 이외에는 전신이 가사에 가려 보이지 않고, 양 손과 양 발도 노출시키지 않았다.


이 상은 등 뒤에 표현된 두 겹의 원형광배, 가사의 표현, 가부좌의 좌법 등에서 불교에 귀의한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즉 신라의 신상(神像)에 불상의 영향이 점점 짙어져서 산신 등의 토착신이 불교화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직 여성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고, 양손을 노출시키지 않는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하고 있는 점에서 여신상으로서의 특징 또한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본존의 좌우에는 갑옷을 입은 무장형의 신장좌상이 배치되어 여신을 수호하고 있다.

 

▲임석규 실장

전 국토를 불국토로 장엄하고자 했던 신라의 불교는 경주의 2대 진산이었던 남산과 낭산에서 산악신앙에 대한 전통적 관념과 불교사상과의 조화로운 혼합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남산감실상과 낭산마애삼존상은 아름다운 산천을 의지하여 격조 높은 불교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신라 불교문화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연구실장 noalin@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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